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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근의 고전환담古傳幻談

정의공주傳

세종,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 윤채근 단국대 교수

정의공주傳

[동아DB]

[동아DB]

공주로 살아온 나의 파란만장한 삶도 머잖아 작은 봉분으로 남겠구나. 막내아들 빈세(貧世)야. 오래전 세상을 뜬 너의 아비이자 나의 남편 안맹담(安孟聃)이 네 이름을 왜 그리 지었는지 아니? 부처님처럼 가난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다 가라는 뜻이었단다. 나 또한 그이의 유언대로 왕실이라는 덧없는 허울일랑 훌훌 벗어버리고 있는 듯 없는 듯 살아왔구나.

빈세야, 사랑하는 막내야. 나는 이제 곧 부처님 품으로 떠나 모자로서 너와 맺었던 이승의 연을 끊게 될 거야. 너의 아비 맹담이 그러하였듯, 너의 형들이 그러하듯, 욕심 없이 숨죽이며 살다 어미 곁으로 와주련? 설령 벼슬을 받는다 해도 궁궐엔 입조하지 말 것이며 그저 왕실붙이로 태어난 죄려니 여겨 불가 생활에나 마음을 쏟았으면 해. 너의 외숙 세조가 벌인 무도한 살육 속에서 너의 아비와 나도 그렇게 살아남았단다.


가슴에 품고 산 이야기

일국의 공주로 부족함 없이 산 내가 죽음에 임박해 무슨 여한이 있으랴마는 유독 막내인 네겐 형들만큼 사랑을 주지 못했고, 그래선지 널 두고 떠나기 이리도 애틋하고 미안하구나. 빈세야. 어미 마음은 갓 태어난 너에게 있었으나 몸을 네 옆에 둘 수 없었고 밤조차 낮 삼아 할 일이 있었으니 잠시도 널 품고 누워보질 못했어. 모두 네 외할아버지이자 나의 아버지, 세종 임금님 때문이었단다. 가슴에만 품고 산 어미 얘길 한번 들어보련?

언니 정소공주가 일찍 죽는 바람에 난 졸지에 집안 맏딸이 됐단다. 아버지께선 유독 딸들을 아끼셨는데 언니가 사라지자 그 애정이 내게 곱으로 몰려 어느덧 주체할 수 없을 지경까지 이르렀어. 그 살뜰했던 자상함을 어찌 잊을까? 오빠와 바로 아래 남동생, 그러니까 돌아가신 문종 임금님과 세조 임금 얘기란다. 우리 삼남매는 터울도 얼마 되지 않아 항상 몰려다녔는데 더러 아버지 식사 자리를 함께하기도 하였지. 그때마다 아버지께선 날 무릎에 앉히시고 어찬 가운데 맛난 것들을 골라 직접 입에 넣어주셨어. 네 외할아버지는 엄숙하신 분이 아니었단다. 이렇게 말하다 보니 먼저 저승으로 떠난 똑똑했던 오빠 그리고 욕심쟁이 남동생마저 그리워지는구나. 그때는 그저 다정하기만 한 여느 남매들이었단다.

아버지께선 주무시기 전 침전으로 나를 불러 이것저것 말도 붙이시고 글도 가르쳐주시기도 하셨지. 쌓인 정이 하도 많아 내가 궐 밖으로 시집가던 날 눈이 퉁퉁 부으시도록 우셨어. 네 아비는 야심은 없었지만 제법 남자다웠고 풍류를 즐기되 내겐 담뿍 정을 줬단다. 그렇게 사이좋은 우리 부부를 보시겠다고 아버지께선 몇 번이나 궁 밖으로 행차하셨어. 사위랑 한잔하고 싶다는 둥 딸이 아프다는 둥 갖은 핑계로 사위집을 찾곤 하셨지. 사간원 관리들이 정의공주 궁가로 이어(移御)함이 너무 잦아 지나치다는 상소를 올릴 정도였단다.

어느 날부터인가는 궁에서 내시들이 찾아와 날 가마에 태워 궁으로 데려가곤 했는데 그때마다 아버지께선 경회루에서 날 맞이해 오래도록 이리저리 함께 산책하시곤 하셨어. 하루는 은근한 표정으로 이런 말씀을 하셨단다.

“아가야. 넌 누구보다 총명하여 수리에 밝고 언변도 뛰어나 조리가 있으니 내 하는 일을 돕자꾸나.”

난 처음에 그 말씀의 뜻을 알아듣지 못해 당황했단다. 그런 나를 이끌고 경회루 연못을 허위허위 지나 집현전에 당도하신 아버지는 무슨 비밀 작업이라도 하려는 사람 모양 조심스레 말씀하셨어.

“지금부터 너와 난 한패가 되는 거다. 말인즉슨 우린 동지라는 것이다. 알겠지?”

고개를 끄덕인 나는 아버지 등을 보며 집현전 구석 작은 방에 들어섰어. 아버지께서 오른쪽으로 몸을 옮기자, 세상에나 오빠랑 젊은 학사 대여섯 명이 등잔불 두 개를 켜놓고 그 으슥한 곳에서 공부를 하고 있지 뭐냐.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던 오빠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구나.


훈민정음 창제 비화

당시엔 아버지께서 선위하지 않으신 때여서 오빠는 동궁 신분이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이 어린 학사들과 무릎을 맞대고 책을 검토하면서 가끔 어깨끼리 서로 부딪치는 것이 마치 친구처럼 굴더구나. 참으로 이상한 아버지와 오빠셨단다. 그때 내가 만나 인사했던 젊은이들은 훗날 네 둘째 외숙이 요절내버릴 사람들이었어. 성삼문, 박팽년, 아 그리고 신숙주도 끼어 있었구나. 그 사람들은 아버지와 오빠를 도와 새로운 나랏말을 만들고 있었어. 의자에 털썩 앉으셔서는 내 손을 쥔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단다.

“나이 많은 신하들은 이 일을 죄 반대하는구나. 특히 최만리와 정창손은 집현전을 책임지는 부제학이면서도 한사코 내게 대들었다. 이제 믿을 건 동궁과 너뿐이다. 도와줄 테냐?”

크게 고개를 끄덕인 나는 그때부터 겁 없이 그 일에 뛰어들었단다. 최만리가 상소까지 올려가며 언문 창제를 반대하자 아버지는 나를 핑계로 삼으셨어. 어차피 새 글자는 공주 같은 여자들이나 까막눈인 아랫것들을 위한 것이니 선비들에게 해될 게 전혀 없다고. 언문을 암클이라 부른 게 아마 그때부터일 거야. 아버지는 대신들 반대에 굴하지 않으셨고 네가 태어나기 두 해 전 마침내 신자 창제를 마치셨어. 문제는 그다음이었지.

새로 만든 정음 문자를 반포하시려던 아버지께선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만나셨어. 신하들이 동궁이던 오빠의 자격 문제로 시비를 걸었던 거지. 천한 것들에게 글자나 가르치려는 훗날의 군왕이 과연 사농공상의 반상 질서를 존중할 것인지 의심했던 거란다. 아버지는 격노하셨지만 참고 또 참으시며 새로운 국자 제정을 미루셔야만 했어. 나는 늘 아버지 편이었지만 아버지께서 그 일에 왜 그리 골몰하시는지는 끝내 알 도리가 없었지.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널 회임했고 경기도 양주에 있던 시댁에서 꼬박 한 해를 지내야 했단다.

네 아비와 서촌 궁가로 돌아온 이틀 뒤, 아버지께선 널 보고 싶다 하시며 궁으로 부르셨어. 강보에 넣어 가슴에 품었던 네 모습은 어찌나 귀엽던지. 오랜만에 아버지와 경복궁 정원을 거닐며 이야기꽃을 피웠는데 갑자기 주변 사람들을 물리신 아버지께선 이런 말씀을 하셨단다.

“아가야. 임금 자리가 얼마나 외로운지 너는 아느냐? 이 자리가 쓸쓸하여 우주 사방을 둘러봐도 말 나눠줄 이가 없구나.”

마침 가을바람 서늘하여 풍광도 좋았건만 달빛을 받으며 서 계시던 아버지 모습은 무주공산에서 외로이 꼴 베는 필부처럼 처량해 보였단다. 임금이야 그 위에 아무도 없는 독존의 지엄한 자리인지라 아니 외로울 수 없으셨겠지만 그날의 아버지는 뭔가 더 특별하셨어. 그러시더니 그 말씀을 내게 하셨단다. 이러했어.

“아가야. 난 네가 마음속으로 하는 영특한 생각들을 항상 들어왔다. 아주 어릴 때부터 여태껏 나는 쉬지 않고 남들의 마음을 들어왔지. 그게 이 아비의 고달픈 삶이었다.”

처음엔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도통 몰랐고 늘 하시던 농이려니 여겼다가 또 골똘히 헤아려보니 이게 보통 일은 아닌지라 이렇게 여쭸지.

“아버지. 그렇담 남의 속을 귀로 들으시는 양 다 들어오신 것이어요?”

비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시더구나. 아뿔싸, 그랬어! 세종 임금님께선 청각이 트이시자마자 남의 마음을 꿰뚫어 들으실 줄 아는 비범한 능력을 갖게 되셨던 거야. 딸인 나는 물론이고 궁궐을 오갔던 수많은 사람이 속으로만 중얼대던 생각을 다 듣고 계셨던 거야. 처음엔 퍼뜩 두렵더구나. 혹시나 불경한 생각을 품지나 않았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품게 되지나 않을는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아버지께선 강보 속의 너를 한번 힐끗 보시곤 이렇게 말씀하셨어.

“빈세가 배고프다 하는구나.”

그날 이후 아버지가 두려워진 나는 궁궐 발걸음을 끊었고 아버지께서도 더는 부르지 않으셨어. 나는 아버지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다시 생각했단다. 내가 말하기도 전에 약과를 넌지시 집어주시거나 신하들이 어전에 들기가 무섭게 뜬금없이 화부터 내시던 이유를 그제야 알게 되었지. 남의 마음을 읽는 삶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나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어. 그리고 아버지를 연민하게 되었고, 마침내 그 쓸쓸함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을 때 서둘러 입궐하여 아버지 품에서 한참을 울었단다.

아버지께서 왜 사람 만나기보다 책을 더 가까이하셨는지, 노련한 원로대신들을 멀리하고 하필 나이 어린 집현전 학사들이나 욕심 없는 딸들을 유독 아끼셨는지 나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지. 빈세야, 너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오빠 문종대왕께선 혼이 맑은 분이셨단다. 그래서인지 오직 오빠와 나만이 아버지 곁을 오래 지킬 수 있었어. 우리 둘만이 아버지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그분이 국자를 제정하시려는 참뜻을 이해하고 있었어. 한번은 우리 남매를 편전으로 불러 앉히시곤 이러시더구나.

“실어 펼 길 없어 말을 마음에만 품고 산다는 건 지옥인 거다. 말로 못 할라치면 글로라도 써서 뜻을 전해야 할 것 아니겠느냐? 글이 사람을 해치기라도 한다더냐? 짐승 아닌 사람일진대 아무리 어리석어도 글을 쓸 줄은 알아야 하는 법이다. 백성들이 갇혀 있는 무명(無明)의 지옥을 우리가 깨트릴 것이다.”


세종대왕의 숙원

경기 여주 세종대왕릉. [동아일보 윤완준기자]

경기 여주 세종대왕릉. [동아일보 윤완준기자]

그날 이후로 어미의 삶은 바뀌었단다. 나는 새로 만들어진 국자를 다듬고 시험하는 일에 혼신을 다하느라 어린 널 돌볼 틈도 없었어. 그리고 빈세 네가 돌을 맞이하던 해 가을, 마침내 아버지께선 훈민정음이란 이름으로 국자를 반포하셨지. 어땠는지 아니?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단다. 조정 신료들과 재야의 선비들 모두 아버지의 업적을 철저히 무시했고 몰래 경멸했어. 그냥 그렇게 무시하고 내버려두면 아버지께선 언젠가 붕어(崩御)하실 것이고, 착하지만 여린 오빠는 어차피 강성한 남동생들과 훈구권신들 손아귀에 놀아날 거란 계산속들이었겠지. 못난 자들 같으니라고.

절망하신 아버지께선 오빠에게 왕위를 선위하시고 다시 책 속에 빠져 사셨단다. 한동안 창제하신 훈민정음에 대해선 까맣게 잊고 사시는가 했지. 허나 웬걸, 그게 아니었단다! 아버지께선 당신을 따르던 유일한 원로대신 정인지를 통해 정음을 널리 퍼뜨리려 남몰래 혼신을 다해 노력하고 계셨던 거야. 그 때문에 정인지는 오빠와 아버지 사이를 수도 없이 오가며 정음과 관련한 많은 사업을 시도해야 했어. 그런 와중에 병이 깊어지신 아버지께선 덜컥 세상을 뜨셨단다. 오빠는 아버지 같은 모진 구석이 없었기에 새로 만들어진 국자마저 세상에서 아예 사라질 판이었지.

세상을 떠나시기 직전, 그러니까 빈세 네가 네 살 때란다. 오래전 내가 네게 물려준 한강 저자도 말이다. 그건 본디 아버지께서 우리 부부에게 선물로 준 섬이었단다. 네 아비와 나는 그 섬에 작은 별장을 짓고 머물고 있었지. 그 저자도에 아버지께서 들르셨어. 정인지도 함께였지. 한참을 내 얼굴만 바라보시다가 이렇게 말씀하셨단다.

“정 공과 우리 왕가는 한 몸이다. 내가 사라지더라도 정음까지 사라져선 아니 된다. 아무래도 아가야. 정 공과 네가 나의 비밀 유업을 이어받아야겠다.”

그랬단다. 정인지 아들과 네 누이가 혼인한 건 세종 임금님 뜻이었단다. 우리 안씨 집안과 정씨 집안은 사돈으로 묶여 한 가족이나 다름없게 됐지. 아버지께선 그걸 누누이 확인하시더니 내게 말씀을 이어가셨어.

“아가야. 내가 죽고 나면 정음청은 유명무실해질 테고 네 오빠는 권신들에게 휘둘리게 될 게 뻔하다. 바쁜 집현전이 정음청을 대신할 수도 없겠지. 그리 된다면 아가야.”


저자도의 추억

서울 광화문광장에 세워진 세종이야기 전시관 내부(위).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 훈민정음의 한문 해설서다. [동아DB. 사진 제공·문화재청]

서울 광화문광장에 세워진 세종이야기 전시관 내부(위). 간송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 훈민정음의 한문 해설서다. [동아DB. 사진 제공·문화재청]

그 당시엔 아버지께서 그토록 빨리 돌아가실 줄 몰랐어. 그래서 그다음 말씀을 자세히 기억할 수 없구나. 정 공조차 기억이 흐릿해져 훗날 물어봐도 고개만 갸웃거릴 따름이었어. 어쩌면 그 순간 난 너무 불안했었는지도 몰라. 내 속마음을 다 알고 계실 아버지의 시선을 피하기에만 급급했지. 아무 생각도 않으려고 너무 안간힘을 썼던 걸까? 그래도 이 말씀만은 확실히 기억이 나는구나. 

“암클이라 놀리면 또 어떠냐? 아가야. 네가 정음으로 많은 글을 써서 퍼트리거라. 반가 부녀자들 서신이라면 어떻고 상민들 읽는 잡서라면 뭐 어떠하냐? 공주가 즐겨 쓰는 글이라 하면 아무도 무시만 하진 못할 것이다.” 

빈세야, 이 어미가 밤마다 정음으로 편지를 쓰고 패설을 베끼다 새벽을 맞곤 하던 기억은 하니? 남편 맹담조차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정도로 열심이었단다. 그리 살다 보니 어느 겨를엔가 네가 훌쩍 커 있더구나. 다정한 어미가 못되어줬기에 이제야 후회가 밀려들지만 그땐 그리하지 않으면 도저히 아버지를 보내드릴 수 없었단다. 이 어미는 슬픔의 힘으로 붓을 꽉 부여잡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따스했던 애정에 보답해야 했단다. 

되돌아보면 딸로서도 어미로서도 부족하고 엉뚱한 삶을 살았구나. 허나 아버지께서 승하하시자마자 정음청이 상의원(尙衣院) 재봉소로 전락하는 꼴을 보고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단다. 오빠에게 대들어봤지만 되돌아온 건 신하들의 삼엄한 눈초리에 어쩔 수 없다는 대답뿐이었어. 나는 아버지께서 마지막에 남기신 말들을 벗 삼아 내 사명을 다했고 몸은 돌이킬 도리 없이 늙고 병들어버리고 말았구나. 이제 다정했던 네 아비 곁으로 돌아가 공주 아닌 지어미로 다시 살아보련다. 

입으로 하지 않은 마음속 말은 잠꼬대와 같아서 한을 남길 뿐이고 글로 쓰이지 않은 말은 봄기운에 녹아버릴 고드름처럼 허무한 것이란다. 아버지께서 만드신 글자로 어미의 마지막 마음을 이렇게 너에게 건넨다. 진중천만(珍重千萬)하고 천만진중(千萬珍重)하여라. 말로는 전해지지 않을 남은 마음일랑은 부디 다음 생에서 나누자꾸나. 자중하고 자애하여 극락에서 만나자꾸나.


※ 세종대왕께서 창제하신 훈민정음(정음)은 그 역사적 의의를 인정받기까지 참으로 오랜 세월이 걸렸다. 창제 직후 정음은 당시 지식인들에게 철저히 무시당했고 정음 보급을 위해 설치된 정음청은 긴 세월 유명무실하게 방치됐다. 오빠인 문종을 도와 정음 창제에 크게 기여한 정의공주는 왕가로부터 극진한 예우를 받으며 천수를 누리다 성종 8년인 1477년 사망했다. 그녀는 현재 도봉구 방학동에 소재한 남편 묘지에 합장되어 잠들어 있다. 그녀의 남편 안맹담의 신도비를 지은 이는 사돈 정인지이며 글씨는 막내아들 안빈세가 썼다. 안빈세는 모친 사후 부모 묘소 곁에서 시묘살이 하다가 이듬해 3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신동아 2018년 12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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