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호

새 연재 | 동아시아 격전장을 가다

日 우익 ‘네마와시’(물밑작업) 무르익는 新정한론(征韓論)

  • 전계완 | 시사평론가, ‘일본, 다시 침략을 준비한다’ 저자 jkw68@daum.net

    입력2016-01-05 09:5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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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복 70년 드라마 KBS-이순신, NHK-요시다 쇼인
    • ‘대동아전쟁’ 전시장엔 반성 대신 “천황 만세!”만
    • 국지전 개입해 군사력 과시하고 ‘평화 위한 조치 선전?
    2015년 12월 현재 한국과 일본은 새로운 협력 공동체를 만들 가능성이 매우 낮다. 11월에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총리가 만났지만 난마처럼 엮인 실타래를 풀지 못했다. 핵심 의제는 손도 대지 못했다. 만남 자체가 미국의 압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뤄졌다는 해석에 힘이 실렸다. 정상회담 이후 상황은 더 꼬이고 있다.
     아베 총리는 위안부 문제의 연내 타결 노력에 합의했지만, 귀국하자마자 “과거에 이미 끝난 일”이라고 말을 바꿨다. ‘협상용’과 ‘국내 정치용’ 코멘트가 따로 노는 형국이다. 오히려 우경화 행보에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
    안보법 통과로 ‘전쟁 가능한 나라’가 된 일본은 아베 총리 취임 후 최대 규모인 12만 명의 반대 시위에도 눈도 깜박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일 군사동맹 체제를 강화해 유사시 한반도 작전계획을 세우며 자위대의 대규모 군사훈련을 준비하고 있다. 아베의 질주에 공포심을 느낀 일본인은 적극적 저항은 포기하고 소극적 관망 상태로 돌아선 듯하다. 일본 우익의 활개가 이처럼 거칠게 드러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일본의 식민 지배를 사죄한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에게 지난 10월 일본 우익이 차량 위협 시위를 벌인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자국의 전직 총리를 ‘매국노’라 부르며 6차선 도로를 가로막고 10분간 도로를 점거한다는 것은 일본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11월 23일에는 야스쿠니 신사 화장실에서 사제 폭발물이 터졌는데, 일본 경찰은 폐쇄회로 TV 분석을 통해 27세의 한국인 전모 씨를 용의자로 지목했다고 일본 언론이 보도했다. 공식 발표가 없는데도 ‘아사히신문’ ‘산케이신문’ 등은 연일 이 사람을 ‘폭탄테러 용의자’로 특정해 보도했고, 전씨는 일본에 재입국하자마자 체포됐다. 우리 외교부는 전씨의 얼굴이 일본 언론을 통해 공개된 것과 관련해 엄중항의했지만, 전씨의 개인정보와 수사 상황은 연일 언론에 보도되면서 일본 경찰이 사실상 피의 사실 공표를 하고 있는 것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됐다.


    21세기형 임진왜란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대응은 한가롭고 위태로워 보인다. 자위대의 한반도 진출을 놓고 ‘된다’ ‘안 된다’는 식으로 싸우는 걸 보면 정말 큰일이 벌어지겠다는 위기감이 든다. “우리 정부가 뾰족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한 정치인의 말에 더욱 놀란다.
    물론 똑같은 역사는 없다. 420년 전 임진왜란이나 120년 전 일본에 의한 조선 몰락이 똑같이 반복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역사는 되풀이된다. 비슷한 상황은 일어날 수 있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21세기형’ 임진왜란이나 한일 강제병합이 순식간에 일어날 수 있다. 이미 일본에는 한반도를 향한 침략 DNA가 꿈틀거리고 있다. 무력을 이용한다면 그 실행 형태가 완전히 달라질 것이고, 무력이 아니라면 새로운 방식으로 한반도를 넘볼 것이다.
    지난 11월 스산한 바람이 불던 어느 날 필자는 도쿄 시내 지요다(千代田)구에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찾았다. 강렬한 느낌의 포스터 한 장이 눈에 띄었다. ‘대동아전쟁 종전 70주년 특별전’이었다.
    오랜만에 접하는 ‘대동아(大東亞)전쟁’이라는 용어가 생소했다. 우리는 1941년 일본의 미국 진주만 공격으로 시작된 전쟁을 ‘태평양전쟁’이라 일컫는다. 일본은 국제사회가 뭐라고 하든 대동아전쟁이라고 한다. 아시아 전체가 연합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는 일본식 주장이다. 식민지 침략과 제국주의 확장을 합리화하겠다는 의도가 숨어 있다.
    그러니 대동아전쟁 종전 70주년 특별전시장에선 사죄나 반성의 기미를 찾아볼 수 없었다.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원으로 출정 전에 남긴 유서, 대일본제국과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친 뒤 야스쿠니에서 다시 만나자는 결의문, 천황의 뜻에 따라 온 국민이 하나로 뭉쳐 헌신했다는 사진과 그림이 붙어 있다. 젊은이들의 영정사진은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몇 년 전 일본에서는 가미카제 특공대원을 다룬 하쿠타 나오키의 소설 ‘영원의 제로’가 출간됐다. 전쟁 미화 논란에도 베스트셀러가 됐고 드라마도 만들어졌다. 일본의 한 40대 주부는 “논란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전쟁에 뛰어들어 갈등하고 고뇌하는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는 흥미로운 소설이었다”고 말했다. 
    전시장을 둘러보고 나오면 바깥에 부조상이 하나 있다.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12명의 판사 중 유일하게 일본 전범들이 무죄라고 주장한 인도 출신 라다비노드 팔(1868~1967)의 얼굴과 어록이다. 일본 우익은 팔 판사를 기리고 그의 ‘용기와 정열’을 후세에 전한다는 명목으로 현창비(顯彰碑)를 세웠다. 그의 어록은 일본 우경화 행보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


    ‘평화로운 나라’

    ‘시간이 열광과 편견을 누그러뜨릴 때, 이성이 허위진술로부터 가면을 벗을 때, 법의 정의는 평형을 유지하기 위해 과거의 상과 벌의 위치를 바꿀 것이다.’
    ‘야스쿠니(靖國)’는 ‘평화로운 나라’라는 뜻이다. 야스쿠니 신사엔 1858년 도쿠가와 막부를 무너뜨린 보신(戊辰)전쟁 때부터 전란으로 목숨을 잃은 246만여 명의 영령을 안치했다. 일본에서 가장 큰 신사다. 이곳이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은 것은 일본 우익이 정부의 묵인 아래 태평양전쟁 전범들을 합사했기 때문이다. 전쟁을 지휘한 당시 총리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A급 전범 14명이 1978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됐다. 군국주의 부활의 상징으로 재탄생하는 순간이었다. 2차 세계대전의 주범인 히틀러와 그의 부하들이 독일 건설을 위해 순국한 사람들과 함께 국립묘지에 묻혀 있는 꼴이다.
    그런 야스쿠니 신사가 이제는 정치인을 포함한 우익세력이 때를 가리지 않고 참배하는 곳이 됐다. 아베 총리의 참배와 공물 헌납이 한국과 중국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상대국을 자극하지 말라는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자제 요청은 2015년부터 사라졌다. 오히려 미국은 일본의 우경화에 눈감고, 미일 군사동맹을 강화하고, 자위대 역할을 확대하고 있다. 중국 견제를 위해 일본을 내세우겠다는 복안이다. 
    야스쿠니 신사는 아베 총리의 의도대로 전쟁범죄자를 영웅으로 만들고 있었다. 평화로운 나라라는 야스쿠니는 전쟁할 수 있는 군국주의 일본을 부활시키는 지렛대로 바뀌고 있었다.   



    ‘계몽’의 두 얼굴

    씁쓸한 마음을 뒤로하고 도쿄 미나토구에 있는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대학을 찾았다. 계몽주의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1835~1901)가 세운 명문 사립학교다. 흔히 게이오대학이라고 부른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지난 1000년 동안 일본을 빛낸 인물 ‘톱 10’에 드는 사람이다. “일본이 서양의 식민지가 되지 않으려면 근대화만이 살길”이라고 주창한 개화론자다. 미국과 유럽을 견학하며 서양 문물 도입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낀 그는 산케이신문의 전신인 지지신보(時事新報)도 설립했다. 일본 근대화의 선구자로 추앙받으며 1만 엔 지폐에 등장한다.
    그러나 조선에는 원흉과 같은 인물이다. 그는 조선 침략과 제국주의 사상을 전파한 장본인이다. “조선 인민은 소나 말, 돼지와 다를 것 없다”며 조선인을 비하했다. 1884년 갑신정변 실패 후 조선 침략의 정당성을 일본 사회에 널리 퍼뜨렸다. “같은 한자문화권인 조선과 중국은 일본의 불행이며, 이들과 가깝게 있다는 것만으로 일본에 화가 닥칠 수 있다. 나쁜 친구를 버리고 서양과 함께 가자”며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을 설파했다.
    흥미로운 점은 그동안 후쿠자와를 존경하던 일본인들 사이에서 그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고야대 출신의 원로학자 야스카와 주노스케는 ‘마루야마 마사오가 만들어낸 후쿠자와 유키치라는 신화’라는 제목으로 책을 냈다. 전후 진보 지식인으로 평가받는 마루야마 마사오가 전체주의적 보수주의자인 후쿠자와를 마치 시민적 자유주의자인 것처럼 왜곡했다는 내용을 담았다.
    후쿠자와가 마루야마에 의해 ‘제국주의 신민 형성의 선구자’에서 ‘천부인권론자’로 변신했다는 야스카와 교수의 지적은 일본 사회에 울림이 컸다. 그는 “일본 국민의 유순함은 집에서 기르는 비쩍 마른 개와 같다. 이런 노예적 습관이 추후 자본주의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고 한 후쿠자와를 결코 자유주의자라고 부를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후쿠자와 찬양세력은 아베 총리를 비롯한 우익세력”이라며 “이들은 후쿠자와를 민주주의 신봉자로 내세워 전쟁국가 회귀를 노린다”고 따끔하게 지적했다.





    요시다 쇼인의 그림자

    사후 110년을 넘겨 다시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된 후쿠자와 유키치. 게이오대 교사(校舍)에 세워진 그의 흉상 앞에 서니 ‘역사, 왜곡할 수는 있어도 숨길 수는 없다’는 진실의 목소리가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듯했다.
     일본에 내재된 ‘침략 DNA’를 확인하면서 착잡한 심정이 들었다. 호텔로 돌아와 TV를 켜니 잔잔한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었다. 일본에서 대하드라마는 커다란 인기를 끌고 있다.
    2015년은 우리나라엔 광복 70주년, 일본엔 종전(終戰) 70주년인 해다. 1945년 8월 15일을 바라보는 두 나라의 시각은 정반대다. 2015년 양국 TV에 방영된 대하드라마만 봐도 그렇다. KBS는 임진왜란을 다룬 ‘징비록’(2월 14일~8월 2일)을, NHK는 메이지유신을 소재로 한 ‘하나모유’(1월 4일~ )를 선보였다.
    ‘꽃 타오르다’는 뜻의 ‘하나모유(花燃ゆ)’는 1868년 메이지유신 시대가 배경으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1830~1859)의 여동생 스기 후미가 주인공이다. 도쿠가와 봉건 막부체제를 무너뜨린 혁명의 정신적 지도자 요시다 쇼인과 스기 후미의 인생 역정이 담겼다. 요시다 쇼인은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기초를 닦고 조선과 중국 정벌을 교시한 인물. 아베 총리는 2013년 8월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요시다 쇼인 묘소를 참배하고 “결심을 다지겠다”고 했다. 넉 달 뒤인 12월, 주변국 반발에 아랑곳하지 않고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감행했다.   


    그 무렵 NHK는 ‘하나모유’ 제작을 결정했다. 일본 언론은 아베 총리가 요시다 쇼인과 관련된 대하드라마 제작을 압박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일본 드라마는 통상 방영 2년 전쯤 제작 여부를 발표하는데, ‘하나모유’는 1년을 앞두고 제작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사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스기 후미를 내세우려고 NHK 제작진이 수개월 동안 자료 찾기에 공을 들였다는 얘기도 나왔다. 정한론(征韓論)의 창안자인 요시다 쇼인을 전면에 세우는 데 부담을 느낀 아베 정권과 NHK가 여동생 후미를 대신 내세웠다는 해석이다. 아베 총리에게 요시다 쇼인의 부각이 그만큼 중요했다는 방증이다. 
    그러나 드라마는 성공하지 못했다. 초반 시청률이 16%를 넘었다고 발표했지만, 이는 지난 15년 이래 최악의 대하드라마 시청률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시청률은 더 떨어져 2015년 11월 말엔 10% 전후를 기록했다.
    도쿄의 한 주부는 “메이지유신을 다루는 드라마에 무명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탓에 큰 관심을 끌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온라인에는 ‘역사를 경시한다. 시청자를 얕잡아보지 말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정치가 방송에 개입해 드라마를 드라마답지 않게 만든 당연한 결과였다. 이처럼 아베 정권의 우경화 행보는 비단 정치 영역뿐 아니라 드라마 제작 개입설에서 보듯 문화 영역에서도 감지됐다.
    아베 정권의 ‘하나모유’ 개입 논란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비친다. 그것은 2018년 메이지유신 150주년을 향한 진군(進軍)이다. 1868년 봉건 막부를 무너뜨린 메이지유신 세력은 제국주의 사상 계승을 거듭하며 아베 정권을 만들어낸 일본 우익의 깊은 뿌리다. 아베 총리 등에게 2018년은 ‘강한 일본’이 완성되는 역사적 전환기다. 한국이 광복 70년을 맞아 ‘새로운 30년’을 내세울 때 일본은 메이지유신 150년을 향해 치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메이지유신 150년 향한 進軍

    일본에 ‘네마와시(根回し)’라는 말이 있다. 나무를 옮겨 심기 전에 수월하게 일하기 위해 잔뿌리를 제거하고 뿌리 전체를 밧줄로 감싸는 작업을 말한다. 일본인은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사전에 네마와시를 하고 목표한 일에 차질이 없도록 물밑작업을 한다. 예측 가능한 상황을 미리 설정해놓고 정해진 수순에 따라 만장일치로 일을 끝내려고 한다. 일본인을 자주 만나다보면 결론을 이미 내놓고 형식적인 미팅을 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한국인은 일단 만나서 실무적으로 논의하지만, 일본인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중요한 작업을 먼저 끝낸다. 
    이는 사전에 특정 사안을 둘러싼 대립과 마찰을 정리하고, 전체 회의를 통해 집단행동을 결의하는 일본 문화를 반영한다. 어떤 일을 대할 때 일본인은 네마와시를 거쳤다고 미루어 짐작하기 때문에 최종 결정 사항에 대해 거칠게 항의하는 예가 드물다. 잔뿌리와 같은 개인보다 큰 줄기를 중시하는 일본의 집단문화가 네마와시에 담겨 있다.
    표면에 떠오른 정치 현안도 비슷하다. 일본 주류 정치인의 발표는 어디선가 네마와시를 마친 결론이라고 봐야 한다. 한국처럼 여론용으로 정책을 발표했다가 반발이 있으면 덮어버리는 식의 정치는 일본 주류 정치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목표와 계획 수립, 진행절차, 최종 실천 등의 과정이 시나리오처럼 나와 있다.
    아베 정권 출범 이후 군사대국을 향한 일관된 흐름도 일본의 네마와시 문화로 설명할 수 있다. 상시적인 독도 도발, 위안부 문제 회피, 역사교과서 왜곡, 집단자위권 강화, 헌법 재해석 등은 결코 일시적, 감정적, 즉흥적인 행동이 아니다.


    激戰을 꿰뚫는 지혜

    아베는 지난 10월 안보법 통과 이후 일본과 국제사회에 격정적인 목소리로 ‘평화’를 외치지만, 이를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아베의 ‘평화’ 속에는 반성하지 않는, 결코 반성하지 않을 침략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겼다. 일본 역사에서 평화라는 말은 동전의 양면처럼 늘 전쟁이라는 말과 함께 사용돼왔다. 자살비행단인 가미카제 특공대를 ‘세계평화를 위한 거룩한 죽음’이라고 선전하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에 나서는 나라가 일본이다.
    세계 평화와 강한 일본을 추구하는 우익세력의 네마와시는 무엇인가. 단언컨대 한반도 주변의 무력활동 강화와 국지도발 개입으로 압도적 우위의 군사력을 세계에 과시하는 일이다. 그러면서 평화를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설명할 것이다. 1945년 태평양전쟁 전범재판에서 일본의 A급 전범들이 식민지 침략과 전쟁이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며 미군 중심의 재판을 부정하던 장면과 비슷할 것이다. 역사에서 부끄러움이라는 단어를 지우고 군국주의로 회귀하려는 일본은 점점 괴물로 바뀌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태무심하다. 우리 정치권 일부에서 일본 안보법을 ‘북핵 억지력 강화와 동북아 평화 기여’ 등의 기회로 삼자는 것을 보면 허탈해진다. 지금이라도 치밀하게 대응전략을 세워야 한다. 정치권은 일본 문제에 대해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야 한다. 일본을 비난하면서 애국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우익이 주도하는 ‘괴물’ 일본에 어떤 지혜로 맞설 것인지 초당적으로 연구해야 한다.
    일본 우익은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과연 그 종착지는 어디인가.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지 말고 우선 그들의 네마와시를 읽어내야 한다. 그리고 다시 한국을 읽어야 한다. 그 속에서 격전(激戰)을 꿰뚫는 지혜로운 길을 찾을 수 있다. 시간이 많지 않다.



    ▼몰락한 日 한인타운▼
     

    “도쿄에서 한국이 사라졌다”

    2010년 전후 도쿄 중심가에 한류(韓流)가 넘치는 거리가 있었다. 신오쿠보(新大久保)다. 도쿄의 명물로 ‘한인타운’으로 불렸다. 일본 젊은이와 한국 문화가 어우러지는 공존의 현장이자 말 그대로 불야성을 이루던 곳이다.
    2015년의 신오쿠보는 맥이 빠졌다. 인근 신주쿠(新宿)와 비교하는 것은 물론이고 도쿄 중심부라고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한산한 분위기다. 주말 저녁인데도 한류 용품 판매장에는 지나가던 사람이 가끔 내부를 들여다볼 뿐 고객 발길이 뚝 끊겼다. 도쿄에서 유독 한인타운만 불황에 허덕이는 느낌이었다.
    신오쿠보 바로 옆에 있는 신주쿠의 유흥가 가부키초(歌舞伎町)는 경기침체를 실감하지 못할 만큼 사람들로 붐볐다. 하지만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대부분 중국 관광객이었다. 한국 관광객이 많이 줄었다는 것도 한 눈에 알 수 있다. 도쿄 지하철이나 기차에서 단체관광객이 있는 곳을 가보면 열에 아홉은 중국인이다.
    신오쿠보에서 한국식 엿강정을 팔고 있던 상인은 “예전에 비해 손님이 30%밖에 되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분위기가 반전되거나 상권이 회복될 가능성이 없다는 점이다.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대안도 마땅치 않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현상은 2011년 동일본대지진 이후 반한시위, 혐한운동이 본격화하면서 나타났다. 일부 지역에서 일어나던 시위는 2013년을 넘어서면서 도쿄 번화가인 신오쿠보에 집중됐다. 시위에 등장한 구호는 ‘한국과 단교하라’ ‘조선인 물러가라’였다. 협박에 가까웠다. 반복적으로 집요하게 이뤄졌다. 먼저 한류 문화를 공유하려던 일본인이 발길을 끊었다. 뒤이어 일본 언론이 한국과 한류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민단체의 극단적 행동에 일본 우익 정치세력이 동참하면서 일본 전체가 혐한·반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한 상인은 “일본 여성과 젊은이에게 선망의 대상이던 한국이 이제 불편하고 껄끄러운 상대로 변했다. 한국에 관심있다는 사람도 크게 줄었다”며 답답해했다. 한일관계의 파국 속에서도 민간교류만큼은 끝까지 지켜야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자국 국민감정을 자극하며 ‘내수용 정치’에 몰두하는 두 나라 지도자는 ‘신오쿠보의 어둠’에 큰 책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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