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호

글로벌 인물탐구

궈타이밍 훙하이그룹 회장

‘대만 트럼프’ 꿈꾸는 안티 삼성맨 총통부 입성할까

  • 최창근 객원기자

    caesare21@hanmail.net

    입력2019-06-02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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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난한 외성인(外省人) 아들, TV부품 업체 창업

    • 中에 공장 건설 모험, ‘컴팩‘과 손잡으며 확장

    • 직원을 동물에 비유…막말, 구설, 기행 논란

    • “혁명은 미완성”…국민당 총통후보 경선 도전

    2월 2일 타이베이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는 궈타이밍 회장. [AP=뉴시스]

    2월 2일 타이베이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연설하고 있는 궈타이밍 회장. [AP=뉴시스]

    “오! 나의 여신(女神)님!” 

    4월 17일 오전 대만 수도 타이베이(臺北)시 외곽의 신베이(新北)시의 츠후이궁(慈惠宮), 야구 모자를 눌러쓴 한 남자가 궁에 봉안된 마쭈(女馬祖·바다를 관장하는 여신)에게 예를 표했다. 참배를 마친 그는 “며칠 전 마쭈신이 꿈에 나타나 ‘고난 받고 있는 백성들을 위해 좋은 일을 하라. 젊은이들에게는 희망을 주라’고 지시했다. 마쭈신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그날 오후, 그 남자는 타이베이시에 있는 국민당 중앙당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중화민국(대만)의 국부(國父)이자, 영원한 국민당 총리인 중산 쑨원(孫文·1866~1925) 초상화에 예를 표한 그는 쑨원이 후세에 남긴 유지인 ‘총리유교(總理遺敎)’ 한 구절을 읽어 내려갔다. 

    “혁명은 아직 미완성이다. 동지들이여, 분발하라.” 

    이어 장제스(蔣介石)·징궈(經國) 부자(父子) 총통 초상화에도 예를 갖추고는 “2020년 1월 치러질 대만 총통선거 국민당 초선(初選·당내 경선)에 공식 도전하겠다”고 선언했다. 우둔이(吳敦義) 국민당 주석은 그에게 ‘명예당원증’을 교부했다. 경선 참여를 허가한다는 의사 표시였다.



    대만 부호의 대권 도전

    ‘여신의 이름’으로 대권 도전을 선언한 남자는 궈타이밍(郭台銘) 훙하이(鴻海·Foxconn)그룹 회장이다. 그의 대권 도전 선언은 대만 정계를 요동치게 했다. 대만 최대 부호가 정치권력까지 쥐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궈타이밍 자산은 2018년 기준 73억 달러(약 8조3000억 원), 1년 동안 22억 달러(2조5000억여 원) 줄었지만 여전히 대만 부호 1위 자리를 지켰다. ‘포브스’가 매년 발표하는 세계 부호 명단에서도 지난해 181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궈타이밍의 대권 도전 선언이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이유는 단순히 그가 부자라서가 아니다. 그는 각종 기행(奇行)과 막말, 구설, 스캔들로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며 ‘재계의 이단아’로 불렸다. 부동산 재벌에서 미국 대통령이 된 도널드 트럼프와 연관 지어 해석하기도 한다. 거침없고 저돌적인 성격, 첫 부인과 사별하고 24세 연하의 무용수와 재혼한 인생 이력 등도 트럼프와 묘하게 겹친다. 차이점은 그가 자수성가한 사업가라는 점이다. 

    궈타이밍은 1950년 10월 18일 타이베이현 반차오시(오늘날 신베이시 반차오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궈링루이(郭齡瑞)는 중국 산시(山西)성 진청(晉城) 출신이고, 어머니 추융전(初永眞)은 산둥(山東)성 옌타이(煙臺)가 고향으로 1948년 대만으로 건너왔다. 궈타이밍은 이른바 외성인(外省人·중국 본토에서 국민당 정부와 함께 대만으로 건너온 한인)이었다. 

    중일전쟁 시기 국민혁명군에 입대한 궈링루이는 이후 경찰에 투신했고, 대만으로 온 후에도 지룽(基隆)시, 타이베이현(신베이시) 등에서 일선 형사로 일했다. 당시 중화민국 정부는 국공(國共)내전에서 패해 대만으로 쫓겨 온 처지였고, 외성인인 궈씨 가족에게 대만에서 비빌 언덕은 없었다. 

    2009년 5월 방영된 대만 FTV 다큐멘터리 ‘대만연의(臺灣演義)’ 궈타이밍전(郭台銘傳奇)에 따르면, 궈링루이 부부는 반차오의 마쭈를 모신 사당 츠후이궁 경내 단칸방에 보금자리를 만들었고, 그곳에서 1950년 장남 궈타이밍, 1953년 차남 궈타이창(郭台强), 1960년 삼남 궈타이청(郭台成)이 차례로 태어났다.

    鴻飛千里 海納百川

    가난한 집안의 장남인 궈타이밍은 반차오고급중학(板橋高級中學) 중학부를 거쳐 1966년 고교 과정과 전문대 과정이 합쳐진 5년제 중국해사전과학교(中國海事專科學校·오늘날 타이베이해양과기대학) 항운관리과에 입학했다. 1971년 대학을 졸업한 궈타이밍은 푸싱(復興)항운에 입사해 운송 화물에 적합한 선박을 찾는 업무를 맡았다. ‘메이드 인 타이완’ 제품의 성가가 나날이 높아가던 시절이었다. 

    첫 직장에서 경력을 쌓을 무렵, 궈타이밍은 ‘운명의 여인’과 조우했다. 린수루(林淑如)였다. 1950년생 동갑내기 린수루는 명문 타이베이의학원(오늘날 타이베이의학대학) 약학과 졸업 후 제약회사 연구원으로 일하던 재원(才媛)이었고 집안 형편도 여유가 있었다. 반면 궈타이밍은 가난한 집안 장남에 전문대 졸업 학력의 일개 회사원에 불과했다. 

    린수루에게 반한 궈타이밍은 편지, 전화로 구애 공세를 펴 마음을 얻었지만, 린수루 집안의 반대에 부딪혔다. 결혼에 이르기까지 궈타이밍은 3년여 공을 들여야 했다. 

    1974년은 궈타이밍에게 운명적인 한 해였다. 그해 린수루와 결혼에 성공했고, 창업을 했다. 궈타이밍이 결혼을 앞둔 무렵, 어머니 추융전은 20만 신(新)대만달러를 건넸다. 궈타이밍은 그중 절반은 결혼자금으로 썼고, 나머지 절반은 ‘미래를 위한 계획’에 투자했다. 결혼 후 궈타이밍은 자본금 40만 신대만달러로 직원 10명이 일하는 ‘훙하이(鴻海)’를 설립했다. 사마광의 ‘통감절요’(‘자치통감’의 요약해석서)에 나오는 구절 ‘홍비천리 해납백천(鴻飛千里 海納百川·기러기는 천리를 날고 바다는 수많은 강물을 받아들인다)’을 인용했다. 언젠가 바다를 건너 웅비하겠다는 야망을 담았다. 

    훙하이 기업은 집안 필수 가전제품으로 자리매김하던 TV 부품을 납품하면서 성장가도를 달렸다. 두 동생도 차례로 회사에 합류해 형을 도왔다. 1980년에는 미국 비디오 게임회사 아타리(Atari)로부터 게임 컨트롤러와 TV 연결용 커넥터 위탁 생산을 의뢰받아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1983년 일명 ‘아타리 쇼크’로 불리는 비디오 게임기 공급 과잉 현상이 빚어지면서 관련 업계가 줄줄이 도산했고, 훙하이도 막대한 손실을 떠안았다. 그러나 새로운 발주처를 찾아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꿋꿋이 버틴 덕분에 훙하이는 오늘날 세계 유통 비디오 게임기 90% 이상을 생산하고 있다.

    궈타이밍의 모험과 明暗

    [뉴스1]

    [뉴스1]

    대만 연합보(聯合報)와 자유시보(自由時報) 등에 따르면, 1988년 궈타이밍은 또 다른 모험을 강행했다. 중국 광둥(廣東)성 선전(深土川)에 현지 공장을 설립한 것. 대만해협을 둘러싼 양안 긴장이 가시지 않던 시절, 중국 본토 투자는 위험한 도박이었다. 기업 관련 법제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고, 양안 관계도 불안했다. 승부수였다. 생산관리와 원가절감이 ‘업(業)의 본질’인 제조업의 특성상, 사업을 지속하고 확장하기 위해서는 저렴한 인건비의 노동력을 찾아야 했다. 1988년 문을 연 폭스콘 전자공장은 이후 40만 명 노동자가 일하는 단일 규모 세계 최대 공장으로 성장했고, 폭스콘의 성공 후 선전에는 전자·IT기업들이 몰려들어 ‘중국판 실리콘밸리’로 성장했다. 

    1996년 폭스콘은 당시 세계 PC시장 점유율 1위 업체 미국 컴팩(Compaq·2012년 HP에 인수)과 PC·노트북 케이스 위탁 생산 계약을 체결한 뒤 IBM과 HP 등 경쟁 기업들과도 잇달아 계약을 성사시켰다. 유수의 글로벌 기업들과 계약을 계기로 궈타이밍은 생산 품질 제고에 만전을 기했고, 이는 까다롭기로 소문난 애플 CEO 스티브 잡스의 눈에 띄면서 연간 1억 대에 달하는 아이폰 생산량 대부분을 위탁 생산하게 된다. 폭스콘 생산방식은 ‘설계·디자인=IT기업, 위탁생산=폭스콘’이라는 오늘날 IT제품 제조 시스템의 전형이 되기도 했다. 

    폭스콘 생산제품은 전 세계 유통 가전의 40%를 점했고, 120여만 명을 고용했다. 궈타이밍 개인 자산도 늘어 대만과 중화권을 넘어 세계적 부호 명단에 매년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영광 뒤엔 그늘도 있었다. 4반세기 만에 세계 최대 제조 기업으로 성장시킨 궈타이밍은 하루 16시간씩 일하는 ‘워커홀릭’이었다. 식사도 외부 일정이 없는 한 집무실에서 도시락으로 해결하는 게 원칙이다. 그는 직원들에게도 냉혹하다. 

    대만 주간지 ‘이저우간(壹週刊)’의 ‘2018년 대만 50대 부호 스캔들’에 따르면, 2010년 중국 선전 공장에서 일하던 폭스콘 노동자 18명이 자살을 기도해 그중 14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공장 노동자 다수가 하루 12시간 주 6일 근무를 했던 것. 언론은 폭스콘의 ‘가혹한’ 노동환경을 폭로하기 시작했다. 여파는 폭스콘에 생산을 의뢰한 애플, HP 등 유명 IT기업에 대한 소비자 비판과 불매운동으로 이어졌고, 기업들은 노동환경 개선을 주문했다. 궈타이밍은 생산 인력을 늘리고, 휴식 시간을 보장하는 등 처우 개선에 노력했다.

    삼성전자를 향한 독설

    중국 선전의 폭스콘 공장은 단일 규모 세계 최대 공장으로 성장했다. [AP=뉴시스]

    중국 선전의 폭스콘 공장은 단일 규모 세계 최대 공장으로 성장했다. [AP=뉴시스]

    언행도 자주 구설에 올랐다. 자살 노동자가 대부분 창문에서 투신한 것에 착안, ‘투신 방지’를 명분으로 선전공장 내 시설의 모든 창문을 여닫는 데 30초 이상 걸리게 만들었다. 계단 난간에는 투신 방지용 그물을 설치했다. 직원을 ‘동물’에 비유해 비판받았다. 노동자 자살을 문제 삼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폭스콘은 전 세계에서 100만 명 이상 인력을 고용·관리하고 있다. 인간도 동물인 만큼 100만 동물을 관리하려면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거침없는 그의 입은 ‘혐한(嫌韓)’ 발언으로 한국에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발단은 2010년 삼성전자가 가격 담합 혐의로 LG디스플레이 등 6개 경쟁사를 유럽연합(EU)에 고발한 사건이다. 훙하이 계열 LCD패널·TV제조 브랜드 치메이(奇美)는 과징금 3억 유로를 내야 했지만, 삼성전자는 ‘신고자 면책 조항’을 이용해 과징금을 면제받았다. 궈타이밍은 공개석상에서 삼성전자를 지목해 “경쟁사 등에 칼을 꽂는 소인배”라 비난했다. “배신자 삼성전자를 무너뜨리는 게 내 인생 목표”라고도 했다. 이후 아이폰과 안드로이드 계열 스마트폰의 경쟁이 격화되면서 연일 “부끄러운 제품 갤럭시를 사지 말라. 아이폰을 사라”며 독설을 쏟아냈다. 

    삼성전자와의 악연은 이어졌다. 경영난으로 자본잠식 상태에 빠진 일본 샤프의 경영권 인수에 나선 궈타이밍은 유력한 경쟁자인 삼성전자를 의식해 7000억 엔(약 7조7000억 원) 출자라는 거액을 베팅해 샤프 인수에 성공했고, 이후 샤프는 삼성전자에 LCD 패널 공급을 중단했다. 

    재계를 어느 정도 평정하자 그는 권력으로 눈을 돌렸다. 사실, 그의 ‘정치에 대한 관심’은 오래됐다. 창업 전인 1970년 국민당에 입당했고, 당비를 납부하는 권리 당원이 됐다. 2016년 국민당에 4500신대만달러(17억 원)를 쾌척해 ‘대권 도전을 위한 사전 포석’이라는 해석을 낳기도 했다. 

    2020년 1월 예정된 총통·입법원 동시 선거를 8개월 앞둔 대만 정계는 궈타이밍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 발표로 다시금 요동치고 있다. 4월 17일 대만 최대 일간지 핑궈일보(果日報)의 국민당 경선 후보 여론조사에서 궈타이밍(29%)은 한동안 한참을 앞서가던 국민당 소속 한궈위(韓國瑜·29.8%) 가오슝(高雄) 시장과 오차범위 내 초박빙을 이뤘고, 민진당의 차이잉원(蔡英文) 현 총통과의 가상 양자대결에서는 50.2%를 얻어 27.1%에 그친 차이잉원을 더블스코어에 가깝게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4월 22일 대만 롄허보(聯合報) 자체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궈타이밍은 26%를 기록한 한궈위에 이어 19%로 2위를 차지했다.

    만만찮은 경쟁자들, 親中 이미지

    2018년 6월 28일 미국 위스콘신주 마운트 플레전트에서 열린 폭스콘 공장 착공식에서 궈타이밍 폭스콘 회장이 위스콘신 출신인 폴 라이언 하원의장과 악수하고 있다. 왼쪽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뉴스1]

    2018년 6월 28일 미국 위스콘신주 마운트 플레전트에서 열린 폭스콘 공장 착공식에서 궈타이밍 폭스콘 회장이 위스콘신 출신인 폴 라이언 하원의장과 악수하고 있다. 왼쪽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뉴스1]

    ‘대만 정계의 슈퍼 루키’로 부상한 궈타이밍 앞에 놓인 길이 ‘꽃길’은 아니다. 6월 중으로 예정된 국민당 당내 경선이 첫 관문. 기업인으로 평생 살아온 그는 100년 정당 국민당 내 기반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당내에는 ‘선거의 왕자’로 불리는 주리룬(朱立倫) 전 신베이 시장, 1975년부터 현재까지 43년 ‘현역’ 입법위원으로 1999~2016년 16년 동안 입법원장(국회의장)을 지낸 왕진핑(王金平) 등 거물들이 일찌감치 출마 선언을 했다. 정치 이력이 긴 이들은 당내 지지 기반이 굳건하다. 다른 변수도 있다. 아직 공식 출마 선언을 하지 않은 한궈위 가오슝 시장도 압도적인 여론의 지지를 받으며 경선 출마를 저울질하고 있다. 4월 22일 국민당 지도부와 회동한 한궈위는 “국민당 지도부가 경선 룰(여론조사 및 당원투표 비율)을 바꿀 경우 출마할 수도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후보 지명 후 본선도 녹록지 않다. 집권 민진당은 차이잉원 현 총통, 라이칭더(賴淸德) 전 행정원장(국무총리 해당)이 치열한 당내 경쟁을 벌이고 있지만, 후보가 확정될 경우 ‘대만 독립’이라는 기치 아래 단결하고 집권당 프리미엄이 더해질 경우 결과를 예단하긴 어렵다. 실제 셰마오쑹(謝茂松) 중국공산당중앙당교 교수는 궈타이밍을 “‘스포일러(방해 입후보자)’에 불과하다”며 “궈타이밍이 차이잉원 총통과 대결한다 해도 최대 지지율은 30% 정도에 그쳐 민진당 후보에게 도움을 줄 것”이라고 평가절하했다. 민진당은 토론회와 여론조사를 거쳐 6월 5일 총통 후보를 확정할 계획이다. 

    궈타이밍의 지나친 친중(親中) 이미지도 부담 요인이다. 그는 외성인 출신에 중국 본토에 투자한 ‘대상’(臺商·대만 출신 기업가)의 대표주자다. 후진타오(胡錦濤) 전 주석, 시진핑(習近平) 현 주석과는 매년 만남을 이어오는 오랜 친구(老朋友) 관계이지만, 이러한 ‘관시(關系)’가 정치에는 독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오늘날 대만 유권자의 절대 다수는 중국인이 아닌 대만인 정체성을 지니고, 이들은 중화권(중국·대만·홍콩·마카오)에서 유일하게 완전한 민주주의를 구현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지닌 반면 사회주의 체제에 반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메이신위(梅新育) 상무부 국제무역경제협력연구원 연구원은 “중국으로서는 투자해주는 기업인을 환대할 수밖에 없지만 사업과 정치는 엄연히 다르다, 중국이 ‘정치인’ 궈타이밍을 다루는 법은 사뭇 다를 것”이라고 평가했다.

    궈타이밍의 험난한 앞날을 예고하는 것일까. 출마 선언 다음 날인 4월 18일, 동부 화롄(花蓮)에서 진도 6.1의 지진이 발생해 대만 전역이 흔들렸다. 호사가들은 마쭈의 현몽을 대권 도전 이유로 내건 그를 빗대 “신의 계시를 받은 것이 아니라 신의 노여움을 샀다”며 비아냥거렸고, 2008년 재혼한 부인 쩡신잉(曾馨瑩)은 “남편이 정치를 하면 개인과 가족생활을 보장받지 못한다”며 일주일 동안 ‘가출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한편 ‘대만의 트럼프’를 꿈꾸는 궈타이밍이 지난 5월 1일 백악관을 방문해 50여 분간 실제 트럼프를 만났다.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만남 사실을 공개하며 “대만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제목을 붙여 트럼프의 대선 슬로건을 연상시켰다. 

    이에 대해 손상범 영남대 무역학부 교수는 “궈타이밍의 트럼프 예방은 장제스·징궈 부자 총통 이후 대만 지도자 중 유일하게 백악관과 채널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입증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외교적 고립이 심화되는 대만에 이는 중요 포인트가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1979년 1월 1일 미·중 수교와 동시에 취해진 미·대만 단교 이후 양국은 상호 방문에 제약을 받고 있다. ‘평행이론’처럼 트럼프와 묘하게 닮은 궈타이밍이 대만 총통부에 입성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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