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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나] 공포심 먹고 자란 ‘자소서 산업’

“잘 쓴 자소서? 결국 스펙 갖추라는 것”

  • 고재석 기자 jayko@donga.com

“잘 쓴 자소서? 결국 스펙 갖추라는 것”

  • ● 계륵이던 자소서, 취업전선 총아로
    ● 컨설팅, 작성 대행 등 ‘장삿거리’ 돼
    ● ‘자소서 포비아’ 낱말까지 횡행
    ● “기업, 자소서 리터러시 갖췄는지 의문”
 2018년 9월 4일 채용박람회가 열린 서울 안암동 고려대학교 화정체육관에서 학생들이 게시판을 보고 있다. [동아DB]

2018년 9월 4일 채용박람회가 열린 서울 안암동 고려대학교 화정체육관에서 학생들이 게시판을 보고 있다. [동아DB]

‘사바나’는 ‘회사, 알바 그리고 나’의 약칭인 동아일보 출판국의 컨버전스 뉴스랩(News-Lab)입니다. ‘사바나’ 기자들은 모두 밀레니얼 세대에 속합니다. 부쩍 오랫동안 ‘알바생’ ‘취준생’으로 살았습니다. 커보니 ‘취업이 바늘구멍’이 돼버린 경제 현실에 절망했고, ‘노력 안 한 탓’이라는 세상의 ‘충고’에 울기도 했습니다. 시행착오를 반복하다 운 좋게 기자가 됐습니다.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사바나’를 만들었습니다. [편집자 주]

한때 취업준비생 사이에서 자기소개서가 계륵(鷄肋)으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자소서의 효용가치는 서류전형까지만 유효했다. 누구나 입사의 관건은 필기와 인‧적성 평가, 면접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대충 쓰기에는 어딘지 꺼림칙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글. 그것이 취준생의 자소서였다. 

오래지 않아 자소서가 남다른 존재감을 내뿜기 시작했다. 학벌과 학점, 영어점수, 자격증 여부를 보지 않겠다는 ‘탈스펙 바람’은 자소서를 취업전선의 총아로 탈바꿈시켰다. 한 경제신문은 “스펙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자소서를 못 써서 떨어지는 것”이라는 표현을 기사에 썼다. 일각에서는 자소서를 ‘장삿거리’로 활용했다. 

포털 사이트에서 ‘자소서 컨설팅’을 검색하면 100건이 넘는 광고가 바로 뜬다. 키워드를 ‘자소서’로 바꾸면 ‘자소서 작성 대행’이라는 문구를 버젓이 단 광고까지 검색에 걸린다. 한 채용정보 사이트는 ‘합격 자소서’를 등록한 회원에게 상품권을 증정한다. 적게는 1000자에서 많게는 9000자 내외에 담긴 ‘인생살이’는 이런 식으로 팔린다.


“이것이 지원자만의 경험일까요?”

서울의 한 대학도서관 모습. [동아DB]

서울의 한 대학도서관 모습. [동아DB]

앞선 사이트는 대기업, 공기업 등 취준생이 선망하는 회사에 한해 익명을 전제로 ‘샘플 자소서’에 대한 평가를 게시하고 있다. 한국철도공사(코레일) 자소서를 두고는 아래와 같은 ‘지원-평가’가 오갔다. 문항은 ‘지원 분야와 관련해 특정영역의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꾸준히 노력한 경험에 대해 기술해 주십시오’다. 다소 길지만 취준생들이 자소서를 쓰는 데 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텍스트다.



-A지원자: 전문성을 향상하기 위해 다양한 설계 프로그램을 공부했습니다. 전공 수업에서 설계 프로그램을 처음 배웠습니다. AUTOCAD(자동화설계디자인), CATIA(3D기계설계)를 처음 접해봤지만, 굉장히 재밌었습니다. 학기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설계 프로그램에 관한 저의 열정은 식지 않았습니다. 설계에 관해 더 깊이 배우기 위해 학원에 등록했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더 깊이 있고 상세하게 많은 프로그램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많은 설계 프로그램을 배운 덕분에 도면 및 규격에 관한 지식도 쌓을 수 있었습니다. 저의 전문성을 통해 철도차량 설계 및 유지보수에 최선을 다하는 인재가 될 것입니다. 

-평가자: 결론적으로 지원자가 한 것은 전공수업을 수강하고 학원에서 추가 교육을 받은 것이 전부입니다. 이 경험이 지원자만의 경험일까요? 이 회사에 지원하는 많은 지원자들이 똑같이 가지고 있을 수 있는 평범한 경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평범한 경험이 비범한 내용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작업이 필요할까요? 이 경험을 통해 지원자가 어떤 능력과 실력이 있는지, 그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그것이 이 회사 해당 직무에 어떤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A지원자의 글은 비교적 군더더기도 적은 편이다. 서술은 문항의 취지에 부합했다. 대학시절 지원 직무와 관련한 전공수업에 흥미를 느꼈고 학원까지 다니며 지식을 쌓았다. 하지만 평가자는 ‘많은 지원들이 똑같이 가지고 있는 평범한 경험’이라고 일축했다. 경력사원이 아니라 신입사원을 지망하는 지원자에게 내놓은 평가다. 대졸자가 갖춰야 할 ‘비범한 경험’이란 무엇일까. 전기통신 직무에 지원한 B지원자는 같은 항목을 두고 이렇게 썼다.


자소서 포비아

-B지원자: 통신이론, 통신 네트워크 및 정보통신에 대한 지식 등 다양하게 있었고, 이를 학습한 저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과 결과물을 얻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사 자격증 획득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반복 학습과 이에 대한 내용을 다시 정리하여 공부한 결과, 무선설비기사, 정보통신기사, 정보처리기사 3가지의 자격을 얻게 되었습니다.

B지원자의 글은 A지원자의 그것과 달리 다소 거친 편이다. 하지만 속 내용은 알차다. 자격증을 3가지나 취득했다. 부러 적지는 않았으나, 자격증 취득에 들인 노력이 얼마나 컸을 지는 행간만으로 가늠할 수 있다. 평가자는 어떤 판단을 내렸을까.

-평가자: 공공기관에서 가산점을 주는 자격증에 대해 언급한 점은 나쁘지 않으나 그것만 있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즉, 자신의 전문성을 자격증 취득만 제시할 것이 아니라 전공 및 직무와 관련한 개인적인 노력, 학습, 경험 등도 적극적으로 제시되어야 하고, 글 결과 어떤 지식과 능력, 실력이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지원 직무와 어떤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지를 제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A지원자는 전공수업과 학원만 다녔다고 타박을 받았다. B지원자는 자격증만 갖고 있다고 지적받았다. 전공과 직무 관련 경험, 학원수강, 자격증 등을 포괄적으로 제시하는 글이 ‘좋은 자소서’라는 인식이 드러나 있다. 사실상 자소서가 ‘스펙 PR’의 창구 노릇을 하고 있는 것. 취준생들이 블라인드 채용 등 ‘탈스펙’ 분위기에 동조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취업포털 ‘사람인’이 4월 5일 공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구직자 259명 중 62.9%는 “울해 상반기에 취업할 자신이 없다”고 답했다. 이중 50.9%(복수응답)는 취업에 자신이 없는 이유로 ‘스펙을 잘 갖추지 못해서’를 꼽았다. 이어 ‘계속 취업에 실패하고 있어서(‘43.6%), ‘대내외 경제상황이 좋지 않아 불안해서’(33.1%), ‘직무 관련 경험이 별로 없어서’(31.3%), ‘학벌이 좋지 않아서’(31.3%), ‘취업이 어려운 전공이어서’(16.6%), ‘목표 기업의 채용이 줄어서’(15.3%) 순으로 나타났다. 직무 관련 경험, 학벌, 전공도 ‘스펙’의 일종이라는 점에서 취준생 사이에 감도는 열패감을 여실히 엿볼 수 있다. 

이에 ‘자소서 포비아(Phobia‧공포증)’라는 낱말까지 등장했다. ‘사람인’이 지난해 10월 20일 공개한 또 다른 설문조사에 따르면 구직자 400명 중 75.5%가 ‘자소서 포비아’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주된 이유로는 ‘무엇을 써야 할지 막막해서’(69.9%, 복수응답)와 ‘쓸 만한 스토리가 없어서’(49.3%)가 꼽혔다. 자소서 탓에 입사 지원을 포기했다는 응답자도 65.5%나 됐다. 그 이유를 묻자 61.5%(복수응답)가 ‘답변할만한 경험이나 스펙이 없어서’(61.5%, 복수응답)라고 답했다. 도돌이표처럼 ‘스펙’이 튀어 나오는 모양새다.


“스펙 없으면 서사라도”

이미 정규직으로 입사한 직장인 중에서도 자소서가 ‘탈스펙’ 채용을 보장할지 여부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경우가 적잖다. 국내 10대 그룹 6년차 직장인 나경준(가명‧남‧33) 대리는 “잘 쓴 자소서라고 해서 보면 결국 사례들이 좋더라. 잘 쓰려면 쓸 만한 사례가 있어야 하고, 이 말인즉슨 스펙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한 현실”이라고 말했다. 

변선우(가명‧남‧39) 과장은 취준생 사이에서 선호도가 높은 대기업에 재직하고 있다. 변 과장이 일하는 기업의 풍경은 이렇다. 

“1차 서류전형에서는 신입사원이 입사 후 일할 부서의 실무책임자들이 지원자의 자소서를 직접 평가합니다. 40대 차장, 부장급들인데 이들이 요즘 세대의 자소서를 읽어낼 만한 ‘리터러시’를 갖췄는지는 의문이에요. 또 부서마다 일관된 평가가 가능한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어요. 과거에 낮은 점수로 최종 입사했던 분이 퇴사 후 ‘자소서 특강’을 하고 다니더라고요.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정보가 제한돼 있으니 바깥에서는 공포심을 기반 삼아 마케팅하는 것이죠.” 

세간에는 자소서가 아닌 ‘자소설’(자소서+소설)이라는 냉소가 퍼졌다. 정부 출연기관에서 7년째 일하는 정성미(가명‧여‧34) 대리는 “채용규모가 크지 않은 공공 기관에서는 자소서가 면접의 향배까지 가르는 핵심 요소”라면서 “(이런 경우) 자소서에 쓸 경험, 즉 스펙이 없으면 서사를 만들 능력이라도 있어야 하더라”라고 전했다. 

이에 대해 장민지 연세대 커뮤니케이션연구소 전문연구원은 “각자도생이 내면화되다보니 자기 PR이 필수무기로 둔갑했다. ‘본질’이 아닌 모습으로라도 자신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이 작용하고 있다”면서 “시장은 취준생의 공포를 자극해 틈새를 파고들어 하나의 산업을 만들었다. 이는 고스란히 밀레니얼 세대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바나’가 취재한 보다 자세한 ‘자소서 산업’ 이야기는 6월 17일 발매 예정인 ‘신동아’ 7월호를 통해 공개합니다.




신동아 2019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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