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호

<새 연재> 新東亞-미래硏 공동기획 | 미래한국 청년열전

탈북소녀 ‘생존투쟁’ 세계인 가슴 적시다

인권운동가 이현서

  • 구해우 | 미래전략연구원 원장 송홍근 기자 | carrot@donga.com

    입력2016-01-05 17:3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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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일곱 살 때 압록강을 건넜다. 갖은 고난을 겪으면서 일곱 개의 이름을 가졌다. 10년 넘는 시간을 바쳐 가족을 구해냈다. 가녀린 여인의 파란 많은 서바이벌 스토리에 청중과 독자는 만감이 가슴에 사무쳤다.
    여기, 세계가 주목한 대한민국 청년이 있다. 이현서(35). 2013년 2월 28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롱비치에서 열린 TED 강연에 연사로 나서면서 샛별로 떴다. 한국보다 서구에서 더 유명하다. 2015년 7월에는 ‘The Girl with Seven Names(일곱 개의 이름을 가진 소녀)’라는 제목의 영문 저서를 냈다.
    TED는 세계 각지의 전문가와 실천가가 아이디어를 나누는 지식의 향연. TED의 슬로건은 ‘Ideas Worth Spreading’이다. ‘퍼뜨릴 만한 가치가 있는 아이디어’를 세상에 알리는 게 목표.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같은 정상급 지도자를 비롯해 영화감독 제임스 캐머런, 요리사 제이미 올리버 등 다종다양한 실천가와 전문가가 TED 연단에 올랐다.
    TED 강연을 현장에서 들으려면 입장료 4400달러(520만 원)를 내야 한다. 1000명 남짓한 인원만 입장할 수 있다. ‘퍼뜨릴 만한 가치가 있는 아이디어’를 널리 퍼뜨리는 게 목표인 만큼 홈페이지(www.ted.com)에 강연 동영상을 올린다. 누적 시청 인원이 10억 명을 넘었다. 이현서의 강의는 700만 명이 봤다. 꾸미지 않은 진실이 세계인의 심금을 울렸다.  
    ▼ TED 강연을 통해 현서 씨를 알게 됐어요. 스피치가 인상 깊었습니다.
    “와우~ 감사합니다. TED에 자주 들어가세요? TED가 뭔지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영어 공부하는 대학생은 다 알죠.”



    “막 떨려서, 심장이 쿵쿵쿵”

    이현서는 탈북인이다. 1997년 압록강을 건넜다. 한국에는 2008년 입국했다. 동영상의 영어 액센트처럼 한국어 발음이 또박또박하다. 말하는 투가 씩씩하면서도 경쾌하다.  
    ▼ TED는 청년에게 꿈의 무대입니다. 어떻게 강연하게 됐나요.
    “사람들이 제일 궁금해하는 게 어떻게 저 같은 사람이 TED 무대에 올라갔냐는 거예요. 지원하거나 제안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주최 측에서 추천해야 하거든요. 운이 엄청 좋았던 게, TED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오디션을 열었어요. 2012년 핵안보정상회의 때 서울 인사동에서 닉 클레그 당시 영국 부총리를 만났습니다. 그분과 밥 먹는 게 TV에 나왔나 봐요. TED 측에서 뉴스를 보고 오디션 대상으로 추천했습니다. 연단에 오르기까지 1년이 걸렸어요. 1차, 2차, 3차 오디션. 첫 오디션은 서울 삼성동에서 청중 500명을 상대로 했습니다.”
    ▼ 예선인 셈이네요.
    “네. 예선 영상이 TED 웹사이트에 올라갔어요. 사람들이 동영상을 본 후 ‘추천’도 누르고, 이 사람 강연을 TED에서 듣고 싶은 이유를 적어냅니다. 최종 결과, 제가 1등을 했다고 해요. 놀랍죠? 강연을 잘해서가 아니라 콘텐츠 덕분인 것 같아요. 서울에 있는 외국인 지인들이 소셜미디어에서 ‘좋아요’를 누르면서 도와주기도 했고요.”
    그는 직접 겪은 스토리를 날줄, 북한 인권 문제를 씨줄로 삼아 강연을 구성했다.
    ▼ TED 강연이 현서 씨 인생에 어떤 변화를 줬나요.  
    “전환점!”


    ‘다른 우주’에서 온 여인

    ▼ 기립박수도 받았죠.
    “지금도 떨려요. 그렇게 큰 무대인지 몰랐어요. 못하겠더라고요. 머릿속이 하얘지고, 아무 생각 안 나는 거예요. 아, 진짜 세계적 망신을 다 당하겠구나, 막 떨려서, 심장이 쿵쿵쿵. 영어가 완벽하지 않아 스크립트를 통으로 외웠거든요. 용기를 냈어요. 아, 내가 이 자리에 나를 위해 서 있는 게 아니라 북한 사람들을 위해 대표로 서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다스렸죠.
    그런데 하나도 안 까먹고 그대로 다 뱉은 거예요. 반응이, 와…충격이었어요. 1000명 넘는 청중이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을 비롯해 엄청나게 유명한 사람들이 마구 안아 줬어요. 기립박수도 진짜 오래 받았습니다.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들도 하나같이 칭찬해줘서 ‘Thank you’를 하도 많이 말했더니 입이 벌렸는지 닫혔는지 감각이 없어질 정도였어요.”   
    이현서의 12분 강의는 청중에게 사무치는 감정을 느끼게 했다.
    “페이스북을 통해 아프리카에서도 메시지가 왔습니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도 ‘영상을 잘 봤다’는 반응이 왔고요. 깜짝 놀랐어요. 그곳은 엄청난 분쟁지역이잖아요. 중국에서도 응원 메시지가 많이 왔습니다. 가슴이 울렁울렁했어요. 중국인과 탈북자의 관계가 좀 그렇잖아요. 안 좋았던 기억이 많죠. 탈북자들이 상처를 입거든요, 중국에서. 중국인은 무조건 탈북자의 ‘안티’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이 우리의 현실을 잘 몰라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뿌듯한 점은 TED를 통해 최초로 북한 인권 문제를 전 세계인에게 알렸다는 겁니다. 나쁜 점은 대인기피증 비슷한 게 생겼다는 것. 이상한 메시지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사람을 잘 못 만나겠더라고요. 이 사람이 혹시 북한 스파이는 아닌지, 그런 게 좀 두려워서요.”
    2015년 12월 10일 오준 유엔대사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장에서 각국 대사와 방청객의 가슴을 적시는 연설을 했다. 10대에 북한을 탈출해 어머니와 동생을 구출하는 데 10년 넘는 시간을 바친 탈북 여성의 사무치는 사연을 소개했다. 오 대사는 연설에서 ‘The Girl with Seven Names’의 한 대목을 인용했다.   
    ‘북한을 떠나는 것은 그저 어떤 나라를 떠나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차라리 다른 우주로 떠나는 것과 같다. 즉 내가 얼마나 멀리 떠나느냐에 상관없이 나는 그 중력으로부터 진정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오준 대사와는 페이스북 친구”라면서 웃었다.  
    ▼ 아마존의 자회사인 굿리즈가 선정하는 ‘2015 굿리즈 초이스’ 수기와 자서전 부문에 후보로 올라 최종 3라운드까지 진출했더군요.
    “12월 2일 굿리즈 어워드 최종 결과가 나왔는데요. 아쉽게도 20개 후보작 중 4위에 올랐습니다. 1위와 4위 득표 차가 크지 않아 아쉽기는 해요.”   





    “돌아오지 마”

    ▼ ‘The Girl with Seven Names’는 다른 탈북자가 낸 책들과는 성격이 다르던데요.  
    “지금껏 탈북자가 낸 책들은 대부분 익스트림(extreme)한 쪽이잖아요. 정치범 수용소 아니면 목숨을 건 탈출, 뭐 그런 식이죠. 말씀한 대로 제 책은 각도가 달라요. 북한에서는 출신성분이 중요한데, 저는 운이 좋았어요. 돌아가신 아빠 직업이 ○○이었거든요. 고생을 별로 안 하고 자랐습니다. 압록강을 건넌 것은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가 궁금해서였습니다. 중국의 친척집을 찾아간 것이었거든요.
    중국에서 북한의 실체를 알게 되면서 충격을 받았죠. 책을 통해 ‘왜 우리가 세뇌를 당할 수밖에 없었는지’ 디테일하게 풀고자 했습니다. 북한이 독재국가라거나 핵무기를 개발하는 나라라는 건 세계인이 다 알아요. 책을 읽은 분이 ‘왜 저항하지 않고 노예처럼 사는지에 대해 답을 얻었다’고 하더군요.”
    ‘The Girl with Seven Names’는 가녀린 여인이 온몸으로 겪은 ‘서바이벌 스토리’다.  
    “제가 체구는 작은데, 기가 좀 센 거 같아요. 생존능력이 강한 것 같아요. 오랫동안 가족과 생이별을 했습니다. 가족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 희생정신 같은 게 독자들에게 다가간 것 같아요. 중국에 가서 어머니와 동생을 탈출시킨 것은 가족의 목숨을 건 행동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도 운이 좋았습니다. 동시대에 우리 가족 같은 삶을 산 이들은 찾기 어려울 겁니다. 스릴러가 한국말로는 뭐예요? 스릴러처럼 읽었다는 독자가 많아요. 픽션 같은 논픽션이라고나 할까요.”
    1997년, 열일곱 살 겨울방학 때 압록강을 건넜다. 어머니는 집을 나간 딸과의 첫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돌아오지 마.”
    “압록강을 건너 중국의 친척집에서 한 달을 보냈습니다. 북한으로 돌아가려는 참에 어머니에게 전화를 했죠. 북한에서는 선거 전에 반드시 인구조사를 해요. 투표율이 무조건 100%여야 하거든요.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인구조사가 있었나 봅니다. 강을 건너는 것을 누가 봤다고도 해요. 북한은 서울 같지 않고 동네가 굉장히 작아요. 이웃집에 무슨 일이 있는지 다 알죠. 소문이 쫙 퍼진 겁니다. 1997년만 해도 분위기가 지금과는 달랐어요. 강 건넌 게 알려지면 가족 모두 정치범 수용소나 감옥에 가는 걸로 알고 엄청 떨었던 거죠. 그래서 엄마가 실종신고를 했어요. 안 나타나는 게 가족이 상황을 모면하는 방법이었죠.”  


    유엔 안보리 비공개 증언

    ▼ 중국에서 곤경을 겪으면서 여러 개의 다른 이름을 갖게 된 사연이 궁금합니다.
    “탈북자가 중국에서 산다는 게 힘듭니다. 숨소리도 제대로 낼 수 없어요. 이름을 자주 바꾸게 된 이유는요, 누군가가 신고를 해 공안에 붙잡혔습니다. 중국 친구 중 하나였겠죠. 사복 입은 남자가 아우디를 끌고 찾아왔습니다. 중국이 참 부패한 나라여서 공안도 ‘급’이 되면 아우디 타고 다녀요. 웨이트리스로 일했는데, ‘너, ○○○지?’ 하는 겁니다. ‘맞다’고 했죠. 공안인 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이름을 부를 때 ‘아니다’라고 했으면 안 붙잡혔을 텐데요. 끌려가서 보니 탈북자가 많이 잡혀와 있더군요. 포대기에 싸인 채 테이블위에 놓인 신생아도 있었어요. 특별검열 기간이었죠.”     
    그때도 운이 좋았다. 중국어를 잘한다는 이유로 석방된 것이다. 그가 붙잡힌 2000년 당시만 해도 중국은 전국의 호구가 전산으로 정리돼 연결되지 않았다. 한 자녀 정책 탓에 호구에 이름을 올리지 않은 여성도 적지 않았다. 공안이 언어 능력을 테스트했는데 그는 탈북자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중국어를 잘했다.
    “중국엔 지금도 글을 못 쓰는 사람이 많아요. 중국 간 지 3년 됐을 때인데, 한자도 잘 쓰고 중국 신문도 읽었거든요. 풀려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지도 않았는데, 그 사람들이 잘못된 제보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말하는 것을 보니 아무리 봐도 북한 애가 아닌 거예요. 한국 대학생은 다른 나라 말을 공부할 목적, 여행갈 목적으로 배우잖아요. 저는 생존을 위해 배웠어요. 좀 슬픕니다. 한국 젊은이들과 동시대에 사는데, 생존투쟁을 해야 했으니까요.”


    “막 무시하면서 외계인 취급”

    ▼ 사는 곳을 바꿀 때마다 이름이 바뀌었군요.
    “이름 여러 개를 갖고 살았어요.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많아요. 회사 사람들은 A라는 이름으로 알았는데, 밖에 사람들은 B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생일 파티에 갔는데, 양쪽에서 사람들이 왔습니다. 이 사람은 A로 부르고, 저 사람은 B로 부르고…. 사람들이 어느 게 진짜 이름이냐고 다그쳐 당황했죠.”
    ▼ 유엔 같은 국제기구나 NGO에서 북한 인권과 관련한 활동을 해보고 싶다고 했죠. 북한 인권 문제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뭐라고 봅니까.
    “북한인권법을 제정해야 해요. 제가 2014년 4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참석했습니다. 유엔 주재 미국대사를 비롯해 15개 나라 대사들이 다 참석했거든요. 아, 아니다…러시아대사와 중국대사는 불참했어요. 북한에 대한 그쪽의 태도가 그렇잖아요. 북한대사는 문 뒤에 숨어서 엿들었고요. 안보리가 여태까지 북한의 핵이나 정치적 이슈만 다뤘습니다. 제가 참석한 날 처음으로 북한 인권 문제를 다뤘다고 해요. 대사들이 ‘역사적인 날’이라고 했습니다.
    2014년 11월 북한인권결의안이 유엔에서 채택됐어요.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죠. 북한 정권의 압박을 받은 지 70년이 됐습니다. 중국에서 탈북자가 인권 유린을 당하고요. 그런데도 북한의 참상이 세계에 온전하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늦었지만 국제사회에서 북한 인권 이슈가 조명받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해요. 문제는 아직도 국제사회에서 북한 인권 문제가 메인 이슈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세계 각국을 돌며 강연하면서 호소하는 거예요. 참 민망한 게, 외국에서 거꾸로 물어봅니다. ‘왜 한국에서는 북한인권법이 통과가 안 되느냐’고요.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는 “북한 인권 문제는 우리의 문제”라면서 “외국인들이 발 벗고 나서주는 것은 감사한데, 정작 한국에서는 관심이 적은 게 안타깝다”고 강조했다.  
    ▼ 유엔에서 북한 인권 실태를 고발한 탈북자 신동혁 씨의 증언과 그가 저서에서 밝힌 내용 중 일부가 거짓이라는 게 드러났습니다.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탈북자들의 주장이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고요.  
    “외국 기자들은 대놓고 물어봅니다. ‘과장하거나 이야기를 지어내는 문제가 있는데, 이현서 씨 이야기가 진짜라는 것을 어떻게 믿어야 하느냐’고. 신동혁 씨뿐 아니라 방송에 나가는 사람들 탓에 불거지는 문제가 예전부터 있었는데, 일부 사람들의 거짓말 때문에 북한에서 일어나는 실상이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해선 안 됩니다.”
    ▼ 탈북자들이 북한 인권 개선에 기여하고 나아가 통일 과정과 통일 이후에 실질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려면 대한민국 국민뿐 아니라 자신들이 함께 생활한 북한 주민들로부터도 공히 신뢰를 얻는 게 중요한 과제라고 봅니다.
    “우리 탈북자끼리도 모여서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통일이 되면 누가 거짓말하고 누가 진실을 말했는지 다 들통나겠네, 이렇듯 좀 시니컬하게 이야기해요. 경력을 부풀린 사람도 엄청 많고, 거짓말한 사람이 신동혁 씨만이 아니에요. 북한에서 탈북자 증언의 거짓을 증명하는 비디오를 만들어 공개하잖아요.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은, 사명감을 갖고 진실한 마음으로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탈북자가 더 많다는 점입니다.”


    ‘진짜 저렇게 사는 걸까?’

    ▼ 한국에서 탈북자로 살면서 가장 어려운 건 뭐였나요.
    “중국에 숨어살 때 한국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컸어요. 한국은 지구상에서 제일 못사는 가난한 나라라고 북한에서 교육받았거든요. 김일성이 일제로부터 북한을 되찾아준 것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감사가 장난이 아니었어요. 중국에 도착해 한국이 잘산다는 것을 알았죠. 중국인도 부러워하는 나라가 됐다는 게 솔직히 자랑스러웠어요. 한국에 오는 게 엄청난 꿈이었습니다.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곳도 아니었죠. 10년 넘는 긴 시간이 걸렸거든요.
    그런데 두 팔 벌려 환호해줄 줄 알았는데, 인천공항에서 망명신청을 하는데, 그냥 막 무시하는 겁니다. 외계인 취급하더군요. ‘아. 이게 뭐지?’ 싶었습니다. 바라던 거와는 정반대였어요. 한국에서는 중국 교포라고 말해야 일자리를 구하기가 더 쉬워요. 저도 신분을 숨겼어요. 강원도에서 왔다고 했거든요. 중국에서도 신분을 숨겼는데, 한국에 와서도 똑같아야 하는 게 너무나 싫었습니다. 중국은 내 나라, 내 땅이 아니지만 한국은 다르잖아요. 상하이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중국에서 받는 편견이 더 낫다고 생각했어요. ‘고향이 강원도’라고 하면 ‘강원도 어디예요?’ ‘학교는 어디 나왔어요?’라고 묻습니다. 거짓말이 꼬리를 무는 거죠. 지금은 ‘북한에서 왔어요’라고 곧바로 말합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불평할 게 아닌 것 같아요.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살다보니 멀어진 것뿐입니다.”
    그가 2010년 어머니와 함께 탈출시킨 남동생은 한국에 적응하지 못해 북한으로 돌아가고자 북중 국경지대까지 갔다고 한다. 누나의 설득으로 한국에 되돌아왔다. 남동생은 미국 대학에 합격해 출국을 앞뒀다.
    “(동생이) 북한으로 넘어간다면서 국경에서 전화를 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요. 한국 여권 가진 애가 북한에 가면, 그게 뭘 의미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었거든요. 두 나라에서 다 범죄자가 되는 거예요. 최선을 다해, 죽을힘 다해 설득했습니다. 그랬던 동생이 마음을 다잡고 미국 ○○대학으로 떠나요. 동생이 한국에 다시 돌아와 잘 적응했어요. 저를 잘 따라줬고요. 너무나 고맙죠. ○○대에 입학한다는 게 자랑스럽습니다.”
    ○○대는 미국의 명문 사립대다.
    ▼ 북한에 사는 친척을 걱정하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북한 인권 관련 활동 탓에 친척에게 해를 끼치면 안 되잖아요. 북한 당국이 이현서가 누구인지 못 알아내는 게 희망입니다. 어린 나이에 탈북한 터라 골칫덩어리 이현서가 어디 살던 누군인지 모를 겁니다. 엄마와 동생 얼굴은 책에서도 모자이크로 처리했어요. 북한의 친척이 해를 안 입게 하는 게 사명이고 의무라고 생각해요. 북한의 친척과 통화는 가끔 해요, 이모랑. 통일이 되는 날까지 건강하게 살아주면 좋겠어요. 언제쯤 우리 가족이 이산가족 상봉을 할까요.”



    “한 가족이잖아요, 우리는”

    ▼ 21세기 한반도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통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남과 북의 청년이 통일의 주역이 되면 좋겠어요. 북한 청년이 자유로운 삶을 갖는 것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청년도 통일 선진국을 만드는 과정에서 많은 기회를 갖게 될 겁니다. 대한민국 청년에게, 북한 청년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까.
    “외국 기자들은 하나같이 ‘한국 젊은 세대는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바탕에 깔고 질문합니다. 슬프지만, 현실이죠. 솔직히 기분은 안 좋더라고요. 우리는 관심이 없고, 외부 세계는 관심을 갖는 통일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북한에 있는 청년에게 당부할 말은 없습니다. 북한이 3대 세습 독재라느니 이런 말 하면 오히려 남쪽에 거부감만 더 생깁니다. 압록강을 갓 넘었을 때 중국의 한 친척이 ‘김정일, 김일성이 나쁜 사람’이라고 얘기하는데, 저는 그 친척이 미친 사람인 줄 알았어요. 세뇌당한 사람은 진실을 들어도 받아들이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북한의 현실을 알려주는 것보다 한국 드라마 같은 것을 북한 사람이 많이 보게 하면 좋겠습니다. 예전에는 배고파서 도망쳤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새로운 희망을 찾아서 북한을 떠나는 겁니다. 한국 드라마, 솔직히 아무 내용 없잖아요. 사랑 이야기, 눈물 짜내는 이야기인데, 북한 사람들은 그걸 보면서 ‘진짜 저렇게 사는 걸까’라고 의문을 갖게 됩니다. 드라마를 포함한 외부의 미디어를 북한에 보내는 게 엄청나게 중요해요. 그래서 미디어를 북한에 들여보내는 외국 단체들도 있습니다.”
    ▼ 대한민국 청년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강연 덕에 미국, 유럽을 돌아다닙니다. 그쪽과 비교하면 남한 청년도 안 됐다 싶습니다. 통일을 하면 경제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해 반대하는 거잖아요. 우리가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갈라진 나라거든요. 통일을 하면 인구가 8000만 명입니다. 큰 나라가 되면 기회가 더 많아질 거예요. 왜 우리가 허리가 잘려 살아야 하나요. 한 가족이잖아요, 우리는 무조건 통일해야 해요. 그래야 이득 창출도 생깁니다. 북한 경제의 수준이 어느 정도 올라온 후 통일하자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라고 봐요. 중국이 지금도 지하자원을 빼갑니다. 중국 회사가 북한에 쫙 깔렸어요. 돈 좀 있는 북한 사람들은 북한이 중국 밑으로 가도 상관 없다고 대놓고 말합니다. 남북한이 통일해야지, 왜 중국 아래로 들어갑니까. 경제는 잘 모르지만 통일하면 더 부강한 나라가 될 거예요.”
    그는 현재 ○○대 4학년이다. 늦깎이로 2011년 입학했다. 외국 활동 탓에 졸업이 늦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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