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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의 괴물여지도

흰여우 : 충남 부여, 전남 담양 등

‘구미호’보다 흥미로운 흰여우 전설

  • 곽재식 소설가 gerecter@gmail.com

흰여우 : 충남 부여, 전남 담양 등

  • 한국 괴물 기록을 모으기 시작한 후 이상하게 여긴 점이 하나 있다. 구미호에 대한 옛 기록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꼬리 아홉 달린 여우’가 여자로 변해 남자를 홀리거나 해치는 이야기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안다. 그런데 19세기 이전 우리 문헌에는 구미호 이야기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더 자주 눈에 띄는 건 흰여우에 대한 전설이다.
[일러스트레이션·이강훈/ 워크룸프레스 제공]

[일러스트레이션·이강훈/ 워크룸프레스 제공]

요즘 한국인은 구미호를 도깨비와 더불어 대표적인 우리 괴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구미호를 소재로 한 영화, 만화, TV 드라마는 도깨비 이야기보다 오히려 많다. 그런데 19세기 초로만 거슬러 올라가도 구미호가 나오는 일화, 전설 등을 찾아보기 어렵다. 

구미호라는 괴물을 우리 선조들이 몰랐던 건 아니다. 고대 중국의 괴상한 신화와 전설을 다룬 책 ‘산해경’에는 관련 내용이 기록돼 있다. 이후에도 구미호에 대한 전설이나 속설을 담은 중국 책은 몇 천 년에 걸쳐 꾸준히 출간됐다. 중국 책을 많이 읽고 중국 문화에 관심을 둔 사람들은 이를 통해 구미호라는 단어를 알고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선비들이 사악한 간신배를 “구미호 같은 사람”이라고 비난하는 대목이 나온다. 

반면 “구미호가 우리나라에서 나타났다”는 유의 조선시대 이전의 기록은 드물다. “조선 어느 고을 무슨 산에는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가 살고 있다더라” 또는 “누구누구가 어릴 때 구미호를 본 적이 있다더라”와 같은 짤막한 기록조차 찾기 어렵다. 최소한 나는 18세기까지 생산된 조선의 역사, 일화, 설화, 신화, 전설 기록 중 어디서도 구미호 이야기를 찾지 못했다.


사람을 홀리는 여우

고대 중국 신화와 전설을 다룬 책 ‘산해경’에 실린 구미호 그림. [한국콘텐츠진흥원KOCCA 제공]

고대 중국 신화와 전설을 다룬 책 ‘산해경’에 실린 구미호 그림. [한국콘텐츠진흥원KOCCA 제공]

우리처럼 중국 영향을 받은 일본에는 구미호를 사악하고 무서운 괴물로 묘사한 이야기가 일찍부터 다수 전승됐다. 그러나 우리나라 대중소설, 신문기사 등에 구미호에 대한 언급이 많아지는 건 20세기 이후부터다. 나는 중국, 일본에서 유행하던 구미호 이야기가 20세기 초 한국에 영향을 끼치고,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라디오 TV 등 대중매체의 확산과 더불어 더욱 널리 퍼진 것이라고 본다. 

구미호가 한국 전통 괴물이 아니니 배척하자는 주장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20세기 초부터 구미호 이야기가 우리나라에 뿌리내렸다고 가정해도, 벌써 100년이 흐르지 않았나. 또 문화는 원래 이웃 나라와 영향을 주고받는 가운데 변화하고 성장하는 것이다. 다만 구미호 이야기를 수천 년간 이어져 내려온 가장 한국적인 괴물 전설로 여기지는 말았으면 한다. 



우리나라에는 구미호가 아닌 여우에 대한 전설이 많다. ‘삼국사기’의 ‘온달전’을 보자. 고구려 온달은 평강공주를 처음 만났을 때, 여우 귀신이 사람으로 변해 자신을 홀리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한다. 우리나라에 요사스러운 여우에 대한 전설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특히 우리나라에는 흰여우 이야기가 많았다. 옛 기록을 보면 흰 뱀, 흰 호랑이, 흰 까치, 흰 사슴 등 빛깔이 흰 동물을 신비롭게 묘사한 이야기가 많다. 한라산 백록담(白鹿潭)도 ‘흰 사슴의 샘’이라는 뜻으로, 신성한 흰 사슴이 있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흰여우 전설은 이것들과 맥을 같이한다. 

흰여우에 대한 비교적 앞선 시대의 이야기는 ‘삼국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서기 148년 음력 7월, 고구려 임금 차대왕(次大王)이 평유원(平儒原)이라는 곳에서 사냥을 하고 있을 때 흰여우가 임금을 따라오며 울었다. 임금은 흰 여우에게 활을 쏘았지만 맞지 않았다. 이후 차대왕이 사무(師巫)에게 이것이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사무는 이름을 보면 당시 고구려에서 주술적인 일을 담당한 사람 같다. 그는 왕에게 대략 이렇게 답했다.


전우치, 흰여우를 만나다

배우 강동원이 주연을 맡은 영화 ‘전우치’의 한 장면. [영화사 집 제공]

배우 강동원이 주연을 맡은 영화 ‘전우치’의 한 장면. [영화사 집 제공]

“본래 흰여우는 불길한 것입니다. 오늘 이 일은 하늘이 미래의 징조를 미리 성상(聖上)께 보여준 것입니다. 불길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미리 대비할 기회가 생긴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좋은 일로 여기시고 나라와 궁실을 바르게 이끄시면 기쁜 일이 될 것입니다.” 

사무가 흰여우를 불길한 징조로 여긴 게 분명하다. 그렇지만 임금이 화를 내지 않도록 최대한 돌려 말한 것이다. 차대왕은 당대에 폭정으로 악명 높던 인물이다. 사무가 최대한 조심스럽게 얘기한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그 노력이 허망하게도 임금은 “길하면 길한 것이고 흉하면 흉한 것이지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이유가 뭐냐. 이것은 필시 내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라고 화를 내며 사무를 처형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임금 자신도 반란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결국 흰여우가 나타난 뒤 사무가 죽고, 차대왕마저 그 뒤를 따른 것이다. 2세기 초반, 이미 흰여우는 불길하고 악한 괴물이라는 인식이 대중에 퍼져 있었던 셈이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흰여우 이야기도 실려 있다. 백제 멸망 무렵 여러 가지 흉흉하고 이상한 일이 일어났는데 그중 하나가 흰여우의 출몰이다. 서기 659년 음력 2월, 여러 마리의 여우가 백제 궁전에 들어왔다. 당시 백제 도읍은 충남 부여였으니, 이때 여우가 나타난 장소는 지금의 부여 시내일 것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때 나타난 여우 중 한 마리가 흰색이었다. 이 여우는 좌평(佐平)의 책상에 걸터앉았다. 좌평은 정승에 해당하는 백제 관직이다. 나라의 높은 관리가 업무를 보는 자리에 흰여우가 앉았다니! 이 이야기는 흰여우 같은 짐승이 정승 행세를 할 정도로 백제 상황이 엉망이었음을 상징하는 은유일 수 있다. 또는 흰여우가 경계가 삼엄한 궁궐에도 쉽게 침입할 수 있을 만큼 신묘한 힘을 가진 괴물임을 묘사한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겠다. 

조선시대 기록에는 좀 더 해학적이고 극적인 흰여우 이야기가 남아 있다. 소설과 영화 등으로 잘 알려진 전우치 이야기의 한 종류다. 이것을 기록한 사람은 18세기 조선 실학자 이덕무다. 이덕무의 ‘한죽당섭필’에는 전우치가 신기한 요술을 부리는 법을 터득하기 전, 글공부하는 평범한 청년이던 시절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전우치는 전남 담양 출신으로, 당시 어느 사찰에 머물며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사찰에서 승려가 담가둔 술이 사라지고, 전우치는 술을 훔쳐 먹었다는 누명을 쓴다. 억울함을 느낀 그는 승려에게 술을 한 번 더 담가 주면 지키고 서서 진짜 도둑을 반드시 잡겠다고 말한다. 

그렇게 해서 전우치가 술 도둑 잡기에 나선 뒤 밤이 깊은 어느 날, 흰 무지개 같은 기운이 창문 틈으로 들어와 술 항아리에 비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내 모락모락 술 냄새가 났다. 전우치가 그 흰 무지개 같은 기운을 살금살금 따라 가보니 바위 구멍이 나오고, 그 앞에서 흰여우가 술에 취해 졸고 있었다. 그러니까 흰여우가 흰 기운을 뿜는 이상한 술법을 이용해 사람이 담근 술을 훔쳐 마신 것이다. 

전우치는 이 여우의 입과 네 다리를 묶어 잡아왔다. 뒤늦게 깨어난 흰여우는 전우치에게 애걸하며 말한다. 

“선비님, 저를 제발 놓아주십시오. 그러면 선비님 은혜를 꼭 몇 배로 갚겠습니다.” 

전우치가 믿지 못하겠다고 하자 흰여우는 다시 빌면서, 이번에는 자기가 숨겨둔 비밀 책을 한 권 주겠다고 한다. 전우치는 흰여우와 함께 재차 바위 구멍에 가고, 거기서 여우가 꺼내주는 소서(素書) 한 권을 받게 된다. 흰여우가 준 책이니 ‘백호소서(白狐素書)’라고 이름 붙일 만하다. 전우치가 그 책을 펼쳐 보니 온갖 요술 비법이 적혀 있었다. 그중 비교적 간단하고 익히기 쉬운 술법에는 점이 찍혀 있었다.


흰여우 배 요술 대회

휴머니스트 출판사가 펴낸 책 ‘우리 고전 캐릭터의 모든 것’에 실린 전우치 삽화. [휴머니스트 제공]

휴머니스트 출판사가 펴낸 책 ‘우리 고전 캐릭터의 모든 것’에 실린 전우치 삽화. [휴머니스트 제공]

전우치가 이 책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갑자기 전우치 집의 종이 급히 달려 오더니 통곡을 하면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전했다. 전우치는 깜짝 놀라 책을 내던지고 다급히 종을 따라갔다. 그런데 막상 나가니 종이 보이지 않았다. 흰여우가 요술을 부려 전우치를 속인 것이다. 그 잠깐 사이 흰여우는 어딘가로 사라졌고 책도 흩어져 점이 찍힌 비법 몇 가지 말고는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이후 전우치는 사람을 속이는 요술로 대단히 유명해졌다. 그야말로 전설적인 인물이 됐다. 이덕무의 기록을 보면, 전우치의 그 화려한 요술이 실은 흰 여우가 전해준 책에 실린 수법 중 가장 기초적인 것 몇 개뿐이라는 걸 알게 된다. 어떻게 보면 아쉽고, 어떻게 보면 여운이 남는 이야기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기가 막힌 결말이라고 생각한다. 

흰여우가 숨겨둔 요술책은 결국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책을 손에 넣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신기한 술수를 부릴 수 있다는 이야기는 현대에도 인기를 끌 만하다. 산속에 터널 뚫는 공사를 하던 기술자들이 우연히 여우의 비밀 굴을 파헤치다가 이런 옛 요술책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지어보면 어떨까. 또는 흰여우를 자신의 상징으로 삼는, 아주 실력이 뛰어난 마술사가 있다는 이야기도 재미있겠다. 

기왕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 만큼 전남 어느 곳, 젊은 전우치가 살았을 만한 사찰이 있는 지역 근처에서 마술 대회 같은 것을 열어봐도 좋겠다. 우승자에게 흰여우의 요술책 모양으로 된 상패를 준다면 제법 어울릴 것이다.


흰여우 : 충남 부여, 전남 담양 등

곽재식 | 1982년 부산 출생. 대학에서 양자공학, 대학원에서 화학과 기술정책을 공부했다. 2006년 단편소설 ‘토끼의 아리아’로 작가 생활을 시작했으며 소설집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 교양서 ‘로봇 공화국에서 살아남는 법’ ‘한국 괴물 백과’ 등을 펴냈다.




신동아 2019년 6월호

곽재식 소설가 gerecte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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