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호

봉달호 편의점 칼럼

“나는 유죄!”라고 말하지 못하는 ‘세모 보수’에게 내일은 없다

  • 봉달호 편의점주

    runtokorea@gmail.com

    입력2019-06-29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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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약 운반으로 부를 쌓으며 별의별 짓을 다했지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시간이었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는 모든 것!’이다. 되돌릴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아는 사람이 보수주의자 아닐까. 깨끗하게 인정할 건 인정하는 사람이 보수주의자 아닐까. ‘세모 보수’는 보수가 아니다.
    [장승윤 동아일보 기자, 안철민 동아일보 기자]

    [장승윤 동아일보 기자, 안철민 동아일보 기자]

    한두 해 사이 관계가 소원해진 친구가 둘 있다. 한 친구는 ‘집회’ 때문에 그렇게 됐다. 편의점 점주들의 1인 릴레이 시위가 있었다. 주휴수당에 반대하는 내용이었다. 아이스버킷 챌린지처럼 그 친구가 자기 다음으로 나를 지명했는데 딱 잘라 거절했다. 내가 운영하는 편의점은 24시간 영업하지 않고 주말에는 쉰다. 밤낮없이 일하는 점주도 대타 알바 구해가며 릴레이 시위에 동참하는데, 피켓 들고 마스크 쓰고 국회의사당 앞에 그냥 서 있기만 하면 되는 그 흔한 시위 방식을 ‘조건 다 갖추고 경력 다 갖춘’ 사람이 꽁무니 뺀다고 친구는 구시렁댔다. 

    나중에 광화문광장에서 자영업자들의 최저임금 인상 반대 시위가 열렸다. 친구는 시위를 앞두고 일종의 격문이랄까, 참여를 독려하는 인터넷 게시글을 만들었으니 윤문을 좀 해달라고 했다. 역시 거절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그 정도 문장 손보는 일쯤은 내게는 껌을 파는 일처럼 간단한 수고임을 알기에 친구가 무척이나 섭섭해했다. 

    종국에는 그냥 집회에만 참석하라고 했다. 그것도 나가지 않았다. 마음으로 응원할게, 문자메시지만 보냈다. 내가 그토록 그 집회를 멀리한 이유는 내용에 반대해서가 아니다. 찬반을 떠나 번잡한 일 자체에 얽히고 싶지 않은 내 유별난 이기주의, 혹은 개인주의 때문이다. 친구는 1년 넘도록 연락이 없다.

    그깟 정치 탓에?

    다른 친구는 ‘칼럼’ 때문에 서먹해졌다. ‘신동아’에 실리는 이 칼럼 말이다. 나는 어릴 적 아버지께서 빠지지 않고 구독해 늘 식구처럼 함께했던 ‘신동아’에 대한 추억 – 1980년대 ‘신동아’는 독재 정부에 반대하던 이들에게 한줄기 빛이었다 – 을 비롯한 개인적 인연을 갖고 있다. 

    친구가 폭발한 계기는 최저임금 문제에 대한 칼럼이었다. “어떻게 그런 칼럼을 쓸 수 있느냐”는 게 불만의 요지였다. 내가 좀 신랄하게 쓰기는 했다. 그래도 정치 세력에 대한 호불호와 정책에 대한 지지는 나눠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서 있는 현장에서 할말을 한 것이다”라고 했는데 그 뒤로 친구는 연락이 없다. 무척이나 서운하고 실망했나 보다. 



    정치적 견해를 이유로 관계를 멀리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사실 좀 어리둥절하지만 - 그깟 정치 때문에? - 이번 경우는 똑같은 사안을 두고 양쪽에서 ‘팽’ 당한 경우라 씁쓸한 웃음마저 나온다. 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까. 

    두 친구의 전혀 다른 서운함의 근원에서 공통된 태도를 본다. 자신의 목소리에 흔쾌히 동의하지 않는다고 가차없이 등을 돌리는 옹졸함, 혹은 쿨함? 이쪽이나 저쪽이나 비슷한 것 같다. 그리하여 누군들 설득할 수 있을까, 양쪽 모두 걱정된다.(하긴 애써 관계 회복에 나서지 않는 나 역시….) 

    지난주 작은 모임에 갔는데 내기가 벌어졌다. 내년 총선에서 어느 당이 이길 것 같으냐는 것이었다. 원래 정치 이야기는 잘 하지 않는 모임인데 이런저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거기까지 흘렀다. 

    내일 일도 모르는데 내년 일은 어찌 알 수 있을까. 게다가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는, 잘나가던 정당의 지지율도 ‘갑툭튀’ 이슈 하나로 10%가 순식간에 훅 빠지기도 하고, 혹은 훅 생겨나기도 하는 ‘다이내믹한’ 사회인데 말이다. 게다가 단 1표 차이에도 당락이 갈리는 승자독식 선거에서, 투표 당일 출구조사 1% 차이마저 쉬 가늠할 수 없는데, 어찌 내년 봄 선거를 지금 분위기로 예측할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내일 당장 선거가 열린다면’이라는 하나 마나 한 전제를 달았는데, 그렇게 따져보니 참석자 모두가 여당의 승리에 걸었다.(비록 다섯 명밖에 되지 않고, 필부들의 술자리 정치 좌담에 불과하지만.) 

    그날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 이야기가 하나 있다. “지금과 같은 정치, 경제, 사회 분위기에 제대로 된 야당이 있었다면 현 정부의 지지율은 30%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30%가 뭔가? 20%에도 못 미쳤을 것이라 반박하는 사람마저 있었다. 정말 형편없는 정부이지만 딱히 대안이 없으니 하릴없이 지지한다는 뜻이다. 정치적 반대편에 있는 야당이 너무나 형편없기 때문에, 최악 가운데 최악을 피하려고 ‘그나마 최악’을 선택하겠단 뜻이겠다.

    ○도 ×도 아니라 △라니

    2018년 7월 16일 편의점주들이 서울 성북구 전국편의점가맹점협회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최저임금 인상 공동대응책을 발표하고 있다. [뉴시스]

    2018년 7월 16일 편의점주들이 서울 성북구 전국편의점가맹점협회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최저임금 인상 공동대응책을 발표하고 있다. [뉴시스]

    화제를 돌려, 한국 보수의 지리멸렬함은 대통령이 탄핵된 지 2년이 지났는데 제대로 된 ‘탄핵 백서’ 하나 만들어내지 못하는 데 있는 것 같다. 

    한쪽에서는 대통령 탄핵을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어쨌든 우리 손으로 뽑은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쫓아낸 일인데, 자기들이 전폭적으로 지지해 당선시킨 대통령인데, 왜 그런 사달이 벌어졌는지, 시스템과 운영상 잘못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무엇이 빈틈이었는지, 앞으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머리를 맞대 연구하고 되짚어보고 대열을 정비하며 설득하고 노력하는 반성의 자세가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언감생심 백서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탄핵 공청회마저 제대로 열린 적 없다. 이른바 보수 세력은 리더십 자체가 실종했고, 서로 물어뜯기 바쁘다. 살아남기에만 급급한 것 같다. 

    자유한국당 대표를 선출할 때 황교안 대표는 탄핵에 대한 입장을 묻는 질문에 ○도 ×도 아닌 △라고 답했다.(원래는 ×라고 했다가 나중에 △로 바꿨다.) 물론 일반적인 사안이라면 ‘좋은 측면, 나쁜 측면 두루 있으니 쉽사리 그것을 평가할 수 없다’는 견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특히, 자신이 총리로 있을 적에 벌어진 역사적인 사건을 두고 마치 중립자인 듯 행세하는 그런 어정쩡한 태도로 과연 국민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을까. ‘황 세모’를 앞세워 그들은 총선에 이길 수 있을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건 아주 불행한 일이 될 것 같다. 국가적으로도 불행한 일이고 보수 세력에도 불행한 일이다. 뜯어고쳐 재기할 기회를 잃고, 그들은 또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마치 자기들이 잘나서 다시 선택을 받았다는 듯, 구태를 반복할 테니까. 정말 암울한 시나리오이긴 하지만 현 정부의 실책이 이대로 계속된다면 내년 이맘때 그렇게 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어 보인다. 

    적잖은 사람들이 지겹도록 반복하는 이야기지만 결국 한국 정치는 민주당이 한국당 살려주고 한국당이 민주당 살려주는 적대적 공생 관계로 살아가는 순환 구조가 분명한 것 같다. 

    한국당은 박근혜 탄핵과 더불어 역사에서 사라졌어야 할 정당이 아닐까. 그런 정당이 살아남았다.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뻔뻔스럽게도 그 정당은 지난 대통령선거에 후보를 내기까지 했다. 

    자숙하는 의미로 ‘이번 대통령선거에는 후보를 내지 않겠습니다’ 해도 모자랄 판인데, 지지를 호소했다. 그런 것이 통할 수 있다는 한국 정치판이 숨 막히도록 암울할 지경인데, 적잖은 득표율(24%)까지 얻었다. 표심은 다양하겠지만 죽었다 깨어나도 민주당은 싫다는 ‘영원불멸 적대세력’이 존재한다는 증거다. 한국당은 그것을 자양분으로 살아간다. 죽었다 깨어나도 쪽박은 면할 밑천이다. 게다가 민주당이 실수해서 중도층 10~20%만 뺏어오면 언제든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는 구조다.

    “검찰은 정권의 충견”

    민주당은 또 어떤가. 정치, 경제, 외교, 안보, 노동, 복지,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 없이 뒤죽박죽이고, 집권 2년을 넘겼는데도 이제 막 출범한 듯 여전히 어수룩하고 어수선한 정부는 살다가 처음 보는 것 같다. 그런데 지지율이, 여러 정황으로 보자면 30%도 못 돼야 정상일 것 같은데,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과반에 달하는 국민이 이 정부와 여당을 지지한다. 

    혹자는 여론조사의 신뢰성을 의심하지만 생활 현장에서 보면 그럭저럭 민심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독한 정치 혐오나 무관심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보수 세력을 싫어하는 탓이다. 

    또 지난 10여 년간 학습 효과를 통해 이 정부가 여론전과 쇼맨십 하나에는 강한 것 같다. 어쨌든, 민주당이 아무리 죽을 쑤고 난리를 쳐도 결코 한국당에는 표를 줄 수 없다는 사람들이 주위에 흔하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타격을 받은 젊은 자영업자들조차. 

    차제에 이야기하자면, 현 정부의 이른바 적폐청산 궤적을 보면, 이건 완전히 위인설관이 아니라 위인설죄(罪)가 아닌가 싶다. 표적이 정해지면 어떻게든 잡아 가두는 것 자체를 목표로 하는 것 같다. 

    과거에 나는 “검찰은 정권의 충견”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일부 정치검찰보다 훨씬 많은, 묵묵히 일하는 검사와 수사관들을 지나치게 매도하는 말 아닌가 하고 생각했는데, 이번 정부처럼 검찰은 정권의 충견임을 분명히 증명해 보인 시기가 언제 있었나 싶다. 이걸로 안 되면 저걸로, 저걸로 안 되면 이걸로, 뭐든 하나라도 나올 때까지, 스스로 죽을 때까지, 들춰대고 쑤셔댄다. 

    수사권 문제를 두고 대립하는 경찰까지 가세해 충성 경쟁하듯 좌우에서 두들겨 팬다. 무죄추정이나 죄형법정주의, 피의자 인권, 공소시효, 일사부재리까지, 교과서에서 배운 원리와 원칙 같은 것은 잘 느껴지지 않는다. 주저 않고 서슴없이 칼을 휘둘러댄다. 갑자기 없던 정의감이 생겨나 두 주먹 불끈 쥐고 적폐청산의 선봉장이 된 걸까. “100배 1000배로 되갚아주리라”는 복수혈전에 그들은 ‘내 손에 피 묻히지 않고 복수해주는’ 앞잡이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여전히 그것은 극히 일부 정치검찰, 정치경찰의 일탈일 뿐이라 믿고 싶다.)

    우아한 보수

    영화 ‘라스트 미션’ 스틸컷. [Warner Bros 제공]

    영화 ‘라스트 미션’ 스틸컷. [Warner Bros 제공]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이런 비정상적 일탈에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분명 존재해야 하는데, 모두가 쥐죽은 듯 조용하다. 섣불리 나섰다가 자신도 표적이 될까 두렵기도 하고, ‘적폐청산’이라는 정권의 모토가 여전히 적잖은 여론의 공감을 얻기 때문이다. 

    “그놈들은 그렇게 당해도 싸.” 반복되는 레퍼토리에 지겨워하는 사람도 있지만 오늘도 이렇게 통쾌하게 여기는 군중이 있다. 이런 상황에 보수 세력은 기막혀 한다. 하지만 주인공만 바뀌어 되풀이해 틀어주는 고루한 영화가 꾸준히 관객을 끌어모으는 비결에, 그러한 오늘에, 보수 세력은 먼저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한다. 책임을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지금껏 계속 ‘보수’라고 칭했지만 이럴 때마다 우리가 진지하게 묻는 것은 ‘그들은 정말 보수인가’ 하는 점이다. 보수주의란 무엇인가. 여러 가지 정의가 가능하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기존에 형성되고 유지돼온 가치와 질서, 과정과 배경을 존중하는 태도’가 아닐까 싶다. 법치를 앞세우고 절차와 시스템을 중시하며 감성보다 이성에 호소하는 한편으로 공동체적 감수성을 이해할 줄 알고 오래 걸리더라도 원칙을 중시하는 태도 말이다. 

    우아한 보수를 보고 싶다. 한국에 과연 그러한 보수가 있는가. 자유한국당에? 아서라! 그렇다면 이른바 ‘새로운 보수’를 주장하는 사람 중에는 그러한 싹이 보이는가? 희망이 없다. 중년 아저씨들의 술자리 좌담을 이어나간 이 칼럼의 결론은 지극히 단순하다. 한국 정치에는 희망이 없다. 그런 지독히도 간단한 이야기를 또 뻔뻔히 이렇게 길게 늘어놓았다. 

    좀 말랑말랑하게 영화 이야기를 해보자. 진보 일색 할리우드 영화판에 어쩌면 유일하다 싶을 정도로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는 인물이 있다. 배우이자 감독인 클린트 이스트우드. 

    그는 독특한 캐릭터다.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면서도 진보 쪽으로부터 왕따당하지 않고 지금껏 건재하다. 아니 보수와 진보 양쪽에서 존경받는다. 현실 정치에도 발을 디뎌 캘리포니아주 카멜시 시장을 지냈지만 특별한 내상을 입지 않았다. 배우로도 자타공인 성공했고, 감독으로도 수작을 선보였다. 

    최근 그가 인생 마지막 작품이라고 선언한 영화를 만들었다기에 찾아가 보았다. 제목은 ‘라스트 미션’. 제목부터 감독의 마지막 영화임을 연상케 하지만 사실 한국에서만 이러한 제목이 붙였다. 원래 제목은 ‘The mule’, 그러니까 마약 운반책이다. (유럽, 중화권, 일본은 ‘운반자’ 등으로 번역됐는데 유독 한국만 다르다.)

    “I’m guilty(나는 유죄다)!”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체포 당시 87세, 역대 최고령 마약 운반책으로 화제를 모은 물에서 힌트를 얻었다. ‘할아버지가 마약 운반책이었다’는 모티프를 가져왔을 뿐 영화의 내용은 다 허구라고 하는데, 대체 이 보수주의자가 그 사건을 어떻게 버무렸나 봤더니 입이 떡 벌어진다.(당연히 이스트우드가 그 할아버지 역할이다.) 

    영화는 할아버지가 마약을 운반하는 과정을 지루할 정도로 반복해 보여준다. 물론 문자 그대로 ‘지루하다’는 말은 아니다. 6·25전쟁에 참전한 경험이 있고(역시 이스트우드다운 설정!), 원예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둔 적도 있는 인물이, 가족을 팽개치고 오로지 사업에만 미쳐 있다가 결국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농장이 망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손녀 결혼식에 갔다가 우연히 만난 사람의 유혹으로 주인공은 ‘어디에서 어디까지 물건만 운반해주면 되는’ 일을 시작한다, 한 번 일한 대가로 수십만 달러를 받는 고액 일자리, 바로 마약 운반책이었다. 처음엔 그것이 마약인 줄 모르고 시작했다가 차차 그 사실을 알게 되고 그러면서도 점점 심취하는 심리 변화를 영화는 흥미롭게 보여준다. ‘완고한 수구꼴통 할아버지’가 퇴락하는 과정이랄까. 

    도대체 왜 이런 영화를 만들었을까, 단순한 오락 영화인가 싶었는데 마지막 몇 분이 압권이다. 결론을 말해버려 미안하지만 영화에서 주인공은 ‘고령이었다, 모르고 그랬다, 참전용사임을 감안해달라’면서 선처를 요구하는 변호사의 변론에 최후 진술로 딱 이렇게만 말한다. “I’m guilty!(나는 유죄다)” 그러고 일어선다. 

    내가 저지른 일이니, 나는 벌을 받아야지 하는 태도다. 일체의 선처를 바라지 않는다. 와, 대단하구나. 소름이 쫙 끼치는 대목이다. 이 지독한 보수주의자는 마지막까지 지독한 보수주의 영화를 우리에게 남겨놓고 떠난다. 지킬 건 지키라는 이야기다. 그런 당연한 이야기를 그토록 긴 이야기에 담았다.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의 소중함

    영화를 본 사람들이 명대사로 꼽는 대목은 맨 마지막에 주인공이 “다 살 수 있었지만 시간은 살 수 없더구나” 하는 말이다. 마약 운반을 하면서 엄청난 돈을 벌어 흥청망청 썼지만 그가 살 수 없었던 것, 그것은 시간이었다. 시간은 단순한 시침과 분침의 움직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되돌릴 수 없는 모든 것!’이다.
     
    되돌릴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보수주의자 아닐까. 깨끗하게 인정할 건 인정하는 사람이 보수주의자 아닐까. ‘세모 보수’는 보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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