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호

‘혼밥판사’의 한끼 | 갈비탕

갈비뼈를 관통한 칼날

  • 정재민 전 판사, 작가

    입력2019-07-08 14: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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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판은 상처로 시작해서 상처로 끝난다. 당사자들 상처에 비할 순 없지만 판사도 상처를 입는다. 그럴 때면 나는 혼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가곤 한다. 정갈한 밥 한 끼, 뜨끈한 탕 한 그릇, 달달한 빵 한 조각을 천천히 먹고 있으면 울적함의 조각이 커피 속 각설탕처럼 스르륵 녹아버리고 위로를 받는다. 그러면서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고 해서 법정에서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맞은편 빈자리에 앉은 누군가에게 한다.
    [shutterst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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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심에는 갈비탕을 먹었다. 달걀, 파 고명에 대추까지 올라가 있다. 국물에 기름기도 뜨지 않는다. 젓가락으로 고명을 휘저으면서 당면을 건져 올렸다. 후루루룩. 고기 냄새가 듬뿍 밴 면과 국물이 특별한 맛을 낸다. 만들 때 핏물을 완벽히 제거했는지 누린내도 일절 없다. 갈비탕은 보기보다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다. 

    고기도 맛있다. 적당히 부들부들하고 뼈에서 잘 뜯긴다. 그러나 갈비탕에 들어가는 갈비 자체는 그리 양질은 아니고 물에 빠진 고기를 좋아하는 편도 아니다. 고기보다 국물을 더 즐긴다. 대파와 다시마, 무와 함께 우려낸 육수가 시원하다. 이 국물에는 밥이 술술 넘어간다. 밥 한 공기가 수월하게 비워지기 때문에 반 공기 정도 더 먹어야 한다. 

    그래도 갈비탕을 일부러 찾아가서 먹지는 않는다. 그 이유를 정확히는 모른다. 고깃집에 가면 고기를 먹지 갈비탕을 먹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갈비탕에 관한 추억이 그리 편치 않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촌놈’의 서울 여행

    어릴 적 차례나 제사를 지내려고 큰아버지 댁에 가면 어김없이 갈비탕을 먹었다. 갈비탕 앞에 앉은 꼬맹이는 마치 흥부네 자식처럼 허겁지겁 밥그릇을 비우고 또 달라고 했다. 설렁탕, 곰탕, 육개장과 달리 갈비탕은 친숙한 서민 음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큰아버지 댁이 우리 집보다 크고 잘 살았기 때문에 갈비탕이 큰아버지 댁에서만 먹을 수 있는 고급 음식처럼 각인됐을지도 모르겠다. 

    그다음 갈비탕에 얽힌 추억은 대학입학시험을 치던 때 생겼다. 1996년에 대학입학 본고사를 치기 위해 생전 처음 서울에 발을 디뎠다. 시험 이틀 전 나와 어머니는 새마을호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새마을호도 처음 타보는 것이었다. 의자 등받이 머리 두는 곳에 호텔 시트처럼 깨끗한 천이 걸린 것에 감탄하고, 서울역이 가까워질 때 기차 선로가 예닐곱 개 이상으로 퍼지는 것을 보고서 살짝 현기증을 느낄 정도로 ‘촌놈’이었다. 



    서울역 광장에서 고풍스러운 역사와 육중한 대우빌딩을 번갈아가며 넋 놓고 바라보고 있으니 기다리던 사촌형님이 다가왔다. 중견 회사 영업팀장으로 일하던 사촌형님이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언제나처럼 자신감 넘치는 유쾌한 표정으로 다가와서 우리를 주차장에 세워둔 ‘각 그랜저’에 태우고 자기 집으로 향했다. 시골 출신 사촌형님이 맨손으로 서울에 가서 번듯한 회사에 다니며 고급차를 타고 집도 장만한 것을 보니 굉장히 출세한 것 같았다. (따지고 보면 그때 사촌형님은 지금의 나보다 다섯 살이나 어렸다. 지금 나는 그때 형님처럼 큰 사람이 못 되는 것 같다.) 

    원래 어머니는 내가 시험을 치르는 대학교 옆 신림동 하숙집에 이틀간 묵기로 약속해놓은 상태였다. 처음 가격은 5만 원 안팎으로 쌌다. 그런데 시험 날짜가 다가오자 입시 특수를 맞아 하숙집들이 가격을 30만 원으로 올렸다. 우리가 예약한 하숙집에서도 전화를 걸어와 30만 원을 안 주면 방을 내줄 수 없다고 했다. 5만 원이던 가격이 30만 원으로 오르니 돈을 내기 부담스러워진 어머니가 조카에게, 그러니까 내 사촌형님에게 연락한 것이다. 사촌형님은 내가 시험 기간 용산에 있는 자기 집에서 머물러도 좋다고 했다. 

    사촌형님 차를 타고 낮고 오래된 주택이 가득한 언덕의 구불구불한 길을 한참 올라가자 비로소 집이 나왔다. 그런데 형님 집은 우리 둘이 더 머무르기에는 너무 좁았다. 게다가 형수님이 초등학생 아이들을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가 대학입학시험 공부를 하겠다고 책을 펼쳐놓고 있으니 어린 조카들이 떠들고 놀 때마다 형수가 내 눈치를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서른 초반의 새댁이던 형수님이 시이모 모자를 위해 하루 세끼를 내놓는 것도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이만저만 폐를 끼치는 것이 아닌 것 같아서 나와 어머니는 이튿날 사촌형님 집을 나오기로 했다. 돈을 비싸게 주더라도 원래 가기로 했던 신림동 하숙집으로 가려 했다. 마침 그 하숙집에 아직 빈방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다음 날 아침 일찍 말리는 형수님을 억지로 떼어놓고 형님 댁을 나왔다. 전철도 생전 처음 타보는 것이었다. “신용산역에서 파란색 라인 4호선을 타고 가다가 사당역에서 초록색 라인 2호선으로 갈아타면 돼요, 도련님”이라는 형수님 지시 사항만 반복해 되뇌었다. 우리는 4호선 지하철을 타고 사당역에서 내리자마자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2호선의 초록색 전철이 우리를 태우러 오기를 기다렸다. 하나의 버스정류장에 여러 종류 버스가 오듯 같은 지하철 플랫폼에 여러 종류의 지하철이 다니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초록색 전철은 오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지하철 역 밖으로 나가서 택시를 탔다.
     
    어머니와 나는 신림동 녹두거리 근처에 있는 하숙집에 도착했다. 한 달치 이상의 하숙비를 건네받은 주인아주머니는 얼굴에 화색을 감추지 못했다. 싱글벙글하는 아주머니는 저녁으로 이런저런 푸짐한 반찬에 갈비탕을 내주었다. 그동안 먹어본 것 중 가장 비싼 갈비탕이었다. 그러나 위암이 깊어진 어머니는 뜨는 둥 마는 둥 했다. 

    하숙집 창밖으로 밤새 눈발이 날렸다. 대학입학시험철만 되면 귀신같이 찾아오는 입시 한파였다. 겨울바람이 휘파람 소리와 함께 유리문을 흔들어대면서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바람에 책을 펴도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잠에 들기도 어려워 밤새 뒤척였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다음 날 아침 본고사가 개시된 대학교 법과대학 현관 앞에서는 수험생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옷을 춥게 입은 어머니에게 이제 그만 돌아가서 하숙집에서 쉬고 계시라고 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고개를 건성으로 끄덕이면서 나에게 어서 시험장에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오전 시험을 마치는 종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점심 도시락을 먹지 않고 1층 현관으로 내려가봤다. 손바닥으로 성에가 가득 낀 현관 유리창을 닦아보니 예상대로 어머니가 아침에 본 그 자리에서 눈을 감고 무덤처럼 고요하게 서 있었다. 

    시험 중에는 문이 잠겨 있었기 때문에 대화를 할 수 없었다. 나는 주먹 쥔 손의 가운데 손가락 마디로 유리창을 톡톡 두들겼다. 몇 번을 반복하자 인기척을 느낀 어머니가 눈을 떴다. 나는 추운데 덜덜 떨면서 몇 시간을 기다린 것에 대해 원망이 담긴 눈초리로 잠시 어머니를 쳐다보다가 한 자 한 자 입 모양을 만들었다. “시, 험, 잘, 봤, 어, 요.” 

    어머니는 말귀를 한 번에 못 알아들었다. 나는 더욱 천천히 같은 입 모양을 반복했다. 그러자 얼어붙은 어머니의 깡마른 얼굴이 풀리면서 미소와 함께 불그스름한 생기가 돌았다. 마치 이제 막 갈비탕 한 그릇을 다 비운 사람처럼.

    갈빗집 살인사건

    갈빗집을 운영하던 부부가 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웠다. 날이 갈수록 싸움 정도가 심해졌다. 서로 날이 돋친 말을 경쟁적으로 해댔다. 그러던 어느 날 큰 부부 싸움 끝에 남편이 죽었다. 갈비를 뜨는 칼이 남편의 갈비뼈 사이로 파고들어 심장을 단번에 관통했다. 

    검찰은 부인이 칼로 찔렀다고 보고 살인죄로 기소했다. 그러나 부인은 무죄를 주장했다. 남편이 먼저 그 칼을 들고 자신을 찌르려고 했다고 주장했다. 남편이 칼자루를 거꾸로 들고 자신에게 달려들었고, 자신은 이것을 막으려고 몸싸움을 벌였는데, 그 과정에서 남편이 자기 손으로 자기 심장을 찔렀다는 것이다.
     
    부검 결과 죽은 남편의 가슴에는 15cm 깊이의 자창(칼에 찔린 상처)이 나 있었다. 그런데 방향이 의미심장했다. 피해자가 반듯이 서 있었다면 지면과 수평을 이루는 것이었다. 또 남편의 시체에 주저흔이나 방어흔이 없었다. 

    1심과 2심은 피고인(부인)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피고인의 주장과 같이 남편이 칼자루를 거꾸로 들고 있다가 실랑이 과정에서 자기 몸을 스스로 찔러죽었다는 것이 합리적으로 납득하기 어렵고 특히 그런 경우 자창이 지면과 수평으로 나기 어렵다는 게 주요 이유였다. 사망 당시 칼이 시체에 꽂혀 있지 않은 점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부인의 주장대로라면 남편은 자기 심장을 찌른 칼을 스스로 뺐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남편이 자기 칼에 스스로 찔릴 당시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고 하거나, 남편이 칼에 어떻게 찔렸는지 기억이 안 난다고 하는 등 여러모로 부인 진술이 의심스러운 것도 유죄의 큰 이유였다.

    합리적 의심 너머

    이런 사정만 보면 누구라도 부인의 변명이 석연치 않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러나 부인이 거짓말을 한다고 해서 곧바로 부인이 살인죄를 저질렀다고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얼마나 의심이 들어야 피고인에게 유죄 판결을 선고할 수 있는 것일까. 확률로 따지자면 51% 이상이면 유죄, 49% 미만이면 무죄인가. 아니면 90% 이상이어야 유죄인가. 아니면 99%이어야 유죄인가. 

    이에 대해서 법과 판례가 제시하는 기준은 ‘합리적 의심이 없을 정도(beyond the reasonable doubt)’이다. 여기서 합리적 의심이라는 것은 피고인이 죄를 저질렀다는 의심이 아니라 반대로 죄를 저지르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의심을 말한다. 유죄의 입증 정도에서 언급되는 ‘합리적 의심’이란 합리적으로 판단하더라도 검찰이 제기한 공소사실 외에 다른 시나리오가 존재할 수 있다는 의심을 말한다. 이러한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입증됐다고 판단되는 경우에 판사가 유죄 판결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합리적 의심’인지도 애매할 때가 많다. 이처럼 확신이 들지 않을 때 판사를 구출해주는 법리가 바로 입증책임이다. 입증책임은 판사가 어느 쪽 말이 맞는지 아무리 살펴봐도 확신을 가질 수 없을 때 입증책임을 지는 쪽에 불리하도록 사실이 인정되는 법리다. 형사재판에서 입증책임은 검사만 진다. ‘의심스러울 때에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법언이 적용된다. 다시 말해 형사재판에서는 판사가 어떤 사실의 존재 여부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하면 무죄로 인정된다. 

    이 사건에서 대법원은 이와 같은 대전제에서 부인을 무죄로 판단했다. 부인과 남편이 실랑이하는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칼을 든 남편이 스스로를 찔러 사망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키가 더 작고 힘도 약한 부인이 더 강한 남편을 칼로 찔렀다면 남편에게 방어흔이 있을 텐데 방어흔을 찾을 수 없는 점, 정신없이 싸우는 도중에는 칼날은 어떤 방향으로든 신체에 꽂힐 수 있는 점 등이 근거였다. 남편 시체를 부검한 법의학자가 이 사건에서 칼날이 남편의 갈비뼈나 물렁뼈를 피해 바로 근육에 꽂혔기 때문에 칼날이 수월하게 파고들었고, 같은 이유로 수월하게 칼을 빼낼 수도 있으므로 스스로 칼날을 빼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고 한 점도 근거가 됐다. 

    갈비탕을 휘젓다 내 젓가락이 갈비뼈와 물렁뼈를 피해 곧바로 소의 근육에 꽂히면서 이 사건이 생각났다. (먹을 때는 먹는 것만 생각해야 하는데 혼밥판사를 쓰다 보면 어쩔 수가 없다). 이 사건을 회상하다 보니 아내에게 평소에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에게 갈비탕을 대접해야겠다.



    정재민 | 혼밥을 즐기던 전직 판사이자 현 행정부 공무원. ‘사는 듯 사는 삶’에 관심 많은 작가. 쓴 책으로는 에세이 ‘지금부터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소설 ‘보헤미안랩소디’(제10회 세계문학상 대상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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