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호

유럽역사기행

‘자유의 도시’ 체코 프라하

얀 후스에서 하벨로 이어진 저항의 역사

  •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입력2019-08-11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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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년 중 가장 쾌적한 8월

    • 제2차 세계대전 후 전개된 자유화운동

    • 체코인들의 정신적 지주, 얀 후스

    • ‘프라하의 봄’을 떠올리다

    블타바 강의 카를 다리 풍경.

    블타바 강의 카를 다리 풍경.

    체코의 수도 프라하는 자유의 도시다. 저항과 투쟁, 그리고 혁신으로 점철된 프라하의 역사를 나는 사랑한다. 근 30년 동안 나는 몇 차례에 걸쳐 프라하를 찾았다. 기회만 된다면 언제든 다시 가고 싶은 나라 중 하나다. 

    프라하는 체코공화국 중서부에 위치한다. 블타바(몰다우) 강이 도시를 관통한다. 너른 곳의 강폭은 대략 300m 정도, 황혼의 운치가 각별하다. 블타바 강 카를 다리에서 바라보는 낙조는 황홀함 그 자체다. 이곳은 날씨도 비교적 따뜻한 데다 습도가 낮다. 연간 강수량도 한국의 절반 이하다. 8월의 프라하는 쾌적하기 이를 데 없다. 8월 평균 최저기온은 12℃, 평균 최고기온도 23℃ 정도 된다.

    억압의 사슬을 풀다

    이 도시의 전성기는 14세기였다. 당시 체코는 보헤미아왕국으로 신성로마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제국의 황제 카를 4세는 보헤미아 왕을 겸했다. 당시 인구는 4만 명으로 유럽에서는 대도시 축에 들었다. 체코인은 슬라브족에 속한다. 5~6세기경부터 그곳에 거주했다. 프라하가 도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건 11세기부터다. 

    얼마 후 프라하는 중부유럽 최대 도시로 성장했다. 하지만 15세기 초 종교전쟁에 휘말리면서 침체의 늪에 빠져들었다. 그러다 18세기 말에 이르러 프라하는 또 한 번의 전환기를 맞았다. 수공업의 발달로 경제가 급성장한 것이다. 19세기 프라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 손꼽히는 공업도시로 성장했다. 한국독립군도 체코제 기관총을 사용했다. 

    독립을 향한 체코인의 의지는 시간이 갈수록 강해졌다. 마침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 독립국 체코슬로바키아가 탄생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소련의 공산체제에 저항하며 민주자유화운동(1968년 1월)을 벌여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로부터 20년 후 프라하는 동구권 몰락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1989년 여름, 동독을 탈출하려는 동독 시민 수천 명이 프라하 주재 서독 대사관에 몰려와 망명을 요청했다. 그해 9월 이들은 프라하 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독을 향해 달려갔다. 참으로 역사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를 계기로 동독은 무너졌고, 동구권 전체가 급속도로 해체 단계에 접어들었다. 따라서 프라하는 소련의 지배체제에 대한 저항의 출발지이자 결정타를 날린 종착지라 할 수 있다.

    체코인의 정신적 지주 얀 후스

    자유를 향한 체코인의 저항에는 깊은 역사가 있다. 프라하에 사는 내 친구 얀은 나를 프라하 시내 한복판에 있는 ‘종교개혁 광장’으로 안내했다. 광장에는 부패하고 몰락한 성직자들에게 맞서 싸운 프라하 보헤미아 출신의 성직자 얀 후스(Jan Hus·1372~1415)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동상은 순교 후 500년이 지난 1915년 7월에 세워졌다. 체코 최고의 조각가 라디슬라프 샬로운(Ladislav Šaloun)이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것이다. 동상의 기단에는 의미심장한 문장이 새겨져 있다. 

    “서로 사랑하라. 사람들 앞에서 진실, 정의를 결코 부정하지 말라!” 

    이는 후스의 옥중서신에 나오는 문장이다. 그에게 사랑이란 정의를 실천하는 것임과 동시에 부도덕한 체제에 대한 저항이다. 이 날카로운 글귀 하나가 지난 500년간 체코인들의 가슴에 살아 숨 쉬었다. 체코인의 정신적 지주인 얀 후스는 복음주의자였다. 성서야말로 신앙의 유일한 근거라 믿었기에, 그는 로마가톨릭교회의 부패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결국 그는 1415년 콘스탄츠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화형당했다. 그는 체코를 대표하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움을 이겨낸 끝에 카를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1398년 신학교수가 됐고 1409년에는 카를대학교 총장에 선출되는 영예를 얻었다. 여기까지는 성공 신화다. 

    하지만 가톨릭교회와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가시밭길 같은 삶이 시작됐다. 그는 신앙의 자유를 추구했다. ‘교회론(Deecclesia)’과 ‘강론집’ 등의 저술에서 그는 ‘영혼의 구원은 신이 예정한 대로 이뤄진다’고 주장했다. ‘면벌부(면죄부) 따위로 죄를 씻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후스는 교황청을 비판하는 이유를 4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교황이 천주의 율법과 복음을 이해하는 참된 신자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낡은 전통에 얽매여 있다는 것. 둘째, 교황과 사제들이 세속적 이익만 추구한다는 것. 셋째, 교황이 교회의 일에 모리배를 동원하고 있다는 것. 넷째, 구원을 소망하는 신자들에게서 교황은 천주의 말씀을 빼앗았다는 것이다. 

    사태가 이쯤 되자, 1410년 프라하 대주교는 후스를 파문했다. 그 이듬해 로마교황 요한 23세도 그를 파문했다. 결국 후스는 종교재판으로 화형에 처해졌다.
     
    얀 후스는 한 세대 일찍 태어난 ‘체코의 마틴 루터’라 할 수 있다. 프라하의 베들레헴 성당에서 주임사제로 재임할 때, 그는 이미 라틴어가 아닌 체코어로 강론하며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또한 성서를 체코어로 번역했으며 체코어 맞춤법을 고안하기도 했다. 마틴 루터를 비롯한 후대의 종교개혁가들은 후스에게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루터와 후스의 차이는 무엇일까? 루터 때는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있었다. 루터는 이 새로운 매체의 가치를 알아보았다. 그는 인쇄물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온 세상에 널리 알렸다.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고 교황청마저 그에게 함부로 손을 대지 못했다. 만약 후스의 시대에도 금속활자가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는 시대를 앞서 종교개혁에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후스 편이 아니었다.

    저항과 개혁의 상징, 카를대학교

    카를대학교 카롤리눔

    카를대학교 카롤리눔

    후스가 화형을 당하자 그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던 체코 사람들은 일제히 들고일어났다. 후대의 역사가들은 그들과 가톨릭교회 사이에 벌어진 전쟁을 ‘후스전쟁’이라 부른다. 1419년 7월 30일 얀 젤리프스키(Jan Zelivsky) 등 강경파 후스주의자들은 관청에 체포된 동료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프라하 시의회 의원들을 시청 창문 밖으로 내던졌다. 그러자 교황 마르티노 5세는 군대를 동원해 후스파 진압에 나섰다. 

    하지만 후스전쟁은 쉽게 결판나지 않았다. 1433년의 리판(Lipan) 전투를 고비로 교황 측이 일단 후스파를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후스파의 저항은 오랫동안 지속됐다. 결국 교황청은 교황 비오 2세 때(1620) 대다수 후스파를 다시 가톨릭교회로 불러들였다. 그럼에도 후스의 사상을 이어받은 소수파, 곧 ‘보헤미안 공동체’는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18세기에 그들은 모라비아 교회(체코 개신교)로 독립했다. 

    해 질 무렵 카를 다리에서 황금빛 석양을 함께 바라보며, 내 친구 얀은 후스에 관한 이야기를 더욱 자세히 들려줬다. 그의 얼굴은 유난히 홍조를 띠었다. 그때 나는 가슴으로 느꼈다. ‘얀 후스는 체코의 민족적 영웅이구나’ 하는 사실 말이다. 그를 체코 민족의 수호신이라 불러도 손색없다. 후스는 체코 민족운동의 정신적 지주임이 분명하다. 

    얀 후스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카를대학이다. 1348년 카를 4세가 세운 학교로, 이탈리아의 볼로냐대학과 프랑스 파리대학을 본떠 지은 카롤리눔(Carolinum·카를대학 본부)은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대학 건물이다. 신학과 법학, 의학 및 철학과가 존재했고, 보헤미아를 비롯해 독일의 작센과 바이에른, 폴란드 등 4개의 교원조합이 대학을 운영했다. 서양의 대학교(University)는 일반인이 참여하는 조합이란 뜻인데, 카를대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대학을 통해 체코는 서유럽의 새로운 학문을 수용했다. 그 결과 후스처럼 출중한 인물을 배출할 수 있었다. 얀 후스는 카를대학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후스주의 운동의 요람이자 체코 종교개혁운동의 성지가 바로 카를대학이니 말이다. 이곳 출신들로 인해 한동안 체코는 종교개혁과 사회개혁이 봇물을 이뤘다. 

    후스전쟁으로 인한 타격도 컸다. 이 대학교의 독일인 교수 및 학생들은 자국의 라이프치히로 돌아갔다. 카를대학은 위기를 맞았다. 이후 신교와 구교의 종교 분쟁이 ‘30년 전쟁’(1618~1648)으로 비화하자 이 대학은 오래 침체됐다. 전후 체코가 가톨릭교회의 영향력 아래 놓이자, 이 대학교는 예수회의 영향 아래 보수적 성향을 띠었다. 

    이 대학의 졸업생 가운데는 근현대의 정상급 문인이 많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를 비롯해 프란츠 카프카(1883~1924), 카렐 차페크(1890~1938), 밀란 쿤데라(1929~)가 대표적이다. 릴케와 카프카는 현대 독문학계의 큰 별이었고, 차페크는 사회 비판 정신에 충일한 작가였다. 쿤데라는 자유를 추구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한계에 신음하는 인간 존재의 비극을 탐구한다. 그는 두말할 나위 없이 현대 문학계의 거장이다. 


    브라헤와 케플러를 추억하다

    프라하의 지식인들은 저항과 혁신을 지향했다. 그래서일까. 근대과학에 조용한 혁명을 일으킨 여러 학자가 프라하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나는 프라하의 구 시청사 벽에 걸린 천문시계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얀과 함께 튀코 브라헤(Tyge Ottesen Brahe·1546~1601)의 생애를 이야기했다. 

    브라헤는 탁월한 천문학자였다. 그는 덴마크인으로 성격이 괴팍했다. 사촌과 결투하다 코가 잘리는 바람에 황동으로 만든 코를 달고 다녔다. 브라헤는 최후의 순간도 극적이었다. 갑자기 방광이 터지는 바람에 운명했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묘비명을 미리 준비했는데, ‘그는 현명하게 살다가 바보처럼 죽었다’가 바로 그것이다. 

    브라헤는 처음에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가 주창한 천동설(지구중심설)을 신봉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천문관측을 한 끝에 이를 부정했다. 그는 천동설과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태양중심설)의 장점을 모아 천문학의 새로운 체계를 구성했다. 일찍이 그는 초신성의 존재를 발견했고 이를 통해 큰 명성을 얻었다. 덴마크의 왕 프레데릭 2세는 그에게 벤(Hven)섬을 하사하며 천문 연구를 도왔다. 그 왕이 죽자 브라헤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돌프 2세의 재정 지원을 약속받아 프라하로 이주했다. 

    브라헤는 자신을 후원한 황제와 귀족들의 성원에 점성술로 보답했다. 당시만 해도 사람들은 천문 현상이 인간사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고 믿었다. 브라헤도 그런 믿음이 있긴 했으나 초신성이나 혜성 또는 일식 등이 세상의 멸망을 예고한다는 식의 해석은 거부했다. 

    1570년 브라헤는 천문관측 장비인 사분의(Quadrant)를 개량했고, 직경 12m 육분의(Sextant)도 제작했다. 그는 별의 위치를 누구보다 정밀하게 측정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천문학자였는데, 그가 죽은 지 8년 뒤 망원경이 발명됐다(1609). 망원경이 있었더라면, 그의 천문관은 아마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브라헤의 제자,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1571~1630)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 신앙의 자유를 찾아 프라하로 왔다.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수용했고, 스승 브라헤의 관측 결과를 토대로 행성이 타원형의 궤도를 따라 움직인다는 점을 확인했다. ‘행성운동’의 제1법칙이었다. 그 밖에도 면적과 속도가 보존된다는 내용의 ‘행성운동’ 제2의 법칙도 발견했다. 또 행성과 태양의 거리와 운동의 주기에 관한 제3법칙도 알아냈다. 케플러는 평생 신앙의 자유를 찾아 헤매다 쓸쓸이 죽었다. 그의 탁월한 학문적 성과를 재확인한 이는 뉴턴이었다.

    프라하에 불어온 자유화 바람

    프라하의 봄이 시작된 1968년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는 동안, 프라하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인이 불타는 탱크 옆으로 국기를 흔들고 있다. [The Central Intelligence Agency]

    프라하의 봄이 시작된 1968년 소련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하는 동안, 프라하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인이 불타는 탱크 옆으로 국기를 흔들고 있다. [The Central Intelligence Agency]

    자유를 향한 프라하의 행진은 계속됐다. 사람들은 아직도 ‘프라하의 봄(Prague Spring)’을 기억한다. 1968년 8월이었다. 소련군을 선두로 바르샤바조약기구의 탱크들이 프라하를 침략했다. 그들은 체코에서 벌어진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혁신을 무력화했다. 그해 1월 체코의 개혁파는 체코 공산당 제1서기 노보트니를 사임시키고, 두브체크를 후임으로 선출했다. 체르니크가 총리직을 맡았고, 온건파의 스보보다는 대통령이 됐다. ‘프라하의 봄’은 그렇게 시작됐다. 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의 지식인층이 오랫동안 민주화와 자유화를 추구한 결과였다. 

    같은 해 4월 체코 공산당은 공산체제의 근본적인 개혁안을 발표했다. 목표는 민주적인 사회주의 체제의 건설이었다. 이에 동구권의 맹주 소련이 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과 함께 체코를 압박했다. 이에 굴하지 않고 체코 지식인들은 이른바 ‘2000어 선언’을 발표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구현하기 위해 시민운동이 전개됐다. 그들은 얀 후스의 후계자임이 분명했다. 

    요컨대 삼권의 분립을 보장하며, 언론에 대한 사전검열제도 폐지하기로 했다. 또 선거제도의 민주화를 약속하며, 언론·출판·집회 등의 기본권도 보장할 예정이었다. 국외여행은 물론 이주의 자유도 허락하기로 했다. 감시와 통제 위주의 경찰정치를 중단하고, 경제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체코와 슬로바키아도 상호 동등한 자격으로 연방제를 실시하기로 했다. 이러한 개혁안에 따라 다수의 정당 및 정치단체가 부활했다. 체코 의회는 미래를 위한 다양한 논의에 불을 지폈다. 

    소련을 비롯한 공산국가들은 체코에서 일련의 개혁조치가 효과를 내기 시작하자 가슴을 졸였다. 소련은 체코의 체제 변화를 ‘마르크스·레닌주의로부터의 이탈’이라고 혹평했다. 이어서 바르샤바조약기구가 무력을 동원해 체코의 개혁 의지를 꺾었다. 1968년 8월 20일, 바르샤바조약기구에 속한 5개국이 보낸 20만 명의 군대가 프라하로 밀려들었다. 그들은 삽시간에 체코의 개혁파를 숙청했다. 개혁파로 분류된 50여만 명의 당원도 체코 공산당에서 제명됐다. 

    내 친구 얀은 프라하 고성 앞에서 바츨라프 하벨을 떠올렸다. 하벨은 이름난 극작가였다. ‘프라하의 봄’ 때 그는 ‘독립작가클럽’과 ‘앙가주망 비당원클럽’에서 활동했다. 소련이 프라하를 점령하자 그는 극장에서 추방됐다. 그의 작품도 공연이 금지됐다. 하지만 하벨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역경 속에서도 그의 반체제운동은 계속 이어졌고 어느덧 반체제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거듭났다. 

    1989년 공산체제가 붕괴하자, 체코슬로바키아 연방의회는 만장일치로 하벨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그는 민주주의 개혁의 견인차로서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1989~1992)에 이어, 체코공화국 대통령이 됐다(1993~2003). 국제사회는 그를 박식하고 균형 잡힌 지도자라며 환영했다. 15세기 초 얀 후스가 시작했던 자유를 향한 체코의 여정은 그렇게 고귀한 결실을 보았다. 내 친구 얀과 나는 ‘필스너’ 맥주잔을 가볍게 부딪치며 프라하 자유의 공기를 함께 들이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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