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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빛바래지 않는 우리 안 순수의 뿌리

  • 정여울 | 문학평론가 suburbs@daum.net

영원히 빛바래지 않는 우리 안 순수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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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만 미소 짓는 별

“그때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어. 행동을 보고 판단해야지 말을 가지고 판단해서는 안 되는 거였어. 그 꽃은 나에게 향내를 풍겨주고 내 맘을 환하게 해주었어. 도망가서는 안 되는 건데 그랬어! 그 하찮은 꾀 뒤에 애정이 있는 걸 눈치챘어야 했는데, 꽃들이란 모순덩어리거든! 하지만 너무 어려서 사랑해줄 줄을 몰랐지.”

사랑하지만,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다. 그가 나에게 원하는 것을, 다 들어줄 수 없을 때. 그럴 만한 힘이 없는 존재임을 털어놓을 수가 없을 때. 사랑하지만, 도망치고 싶다. 하지만 떠나고나서야, 도망치고나서야 깨닫는다. 상대방이 내게 원하는 것은 대단한 모습도, 완벽한 모습도 아니라는 것을. 한 번 더 그를 향해 미소 짓고, 한 번 더 그를 꼭 안아주는 것이었음을. 그는 ‘괜찮다’고 한다. 내가 없어도 잘 견딜 수 있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깨닫는다. 입으로는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그의 눈망울이 울고 있다는 것을.

“아저씨가 밤에 하늘을 쳐다보면 내가 그 별 중의 하나에서 살고 있고 그 별 중의 하나에서 웃고 있으니까, 아저씨로서는 모든 별이 웃고 있는 것 같을 거야. 아저씨는 웃을 줄 아는 별을 갖게 되는 거지.”

어 린 왕자는 영원한 이별을 준비하면서도 자신의 아픔보다는 아저씨의 아픔을 걱정한다. 아저씨가 자신의 사라짐을 너무 아파하지 않도록, 미리 슬픔의 예방주사를 놓는다. 내가 내 별로 다시 돌아간다면, 아저씨는 누구도 갖지 못한 별을 갖게 될 거라고.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장미를 사랑하는 어린 왕자의 별을. 아저씨가 밤하늘을 바라볼 때마다 유독 환하게 미소 짓는 별을 발견한다면 그건 바로 어린 왕자의 별일 거라고. 이 외로운 아저씨는 이제 어둠 속을 혼자 날아도 무섭지 않을 것이다.

그의 발목께서 노란빛이 반짝했을 뿐이었다. 그는 잠시 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그는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나무 쓰러지듯 넘어졌다. 모래 때문에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눈 앞에서 사라져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봐야 할 때가 있다.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가장 힘들다. 아주 작은 버팀목이라도 돼주고 싶지만, 그는 나의 마음을 거절한다.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사랑하지만 함께 갈 수 없는 길 앞에서는, 누구나 그토록 냉정해질 것이다. 그를 붙잡고 싶지만, 그를 부르고 싶지만, 붙잡을 수도 부를 수도 심지어 바라볼 수조차 없다.
외로울수록 밤하늘의 표정이 잘 보인다. 고독할수록 별들의 웃음소리가 잘 들린다. 밤하늘의 별이 웃고 있다. 울고 있다. 웅크리고 있다. 날아가고 있다. 가끔 나에게도 그것이 보인다. 해 지는 풍경을 보기 위해 적어도 마흔네 번쯤은 의자를 옮기고 싶은 그런 날. 어린 왕자의 별에 두고 온 장미의 안부를 걱정하느라 한숨도 잘 수 없는 그런 날. 오직 나를 향해서만 환하게 웃어주는 별이 내게도 있을 것만 같다.



영혼의 망원경

돌이켜보니 10대 초반부터 거의 10년에 한 번씩 ‘어린 왕자’를 다시 읽곤 했다. 10년 후에도 또 10년 후에도 새로운 슬픔의 우물이 차올라 눈물을 흘리곤 한다. 지금은 그리운 것, 잃어버린 것,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것이 예전보다 더 많아져, 내 안에서 어린 왕자의 그림자가 짙고 길어졌다. 하지만 별을 바라보며 웃는 법을 잊지 않는다면, 내게도 기회가 오지 않을까. 별들이 하나하나 부르는 노랫소리의 화음을 이해할 수 있는 감성이, 내게도 아직 남아 있지 않을까. 저 하늘의 수많은 별 중에서 오직 내 안의 어린 왕자, 내가 그토록 그리워하지만 닿을 수 없는 어떤 존재를 찾아낼 수 있는 영혼의 망원경이, 내게 아직 남아 있지 않을까.




신동아 2016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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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 | 문학평론가 suburb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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