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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자로 본 중국 | 윈난성

샹거리라엔 샹그릴라가 없다?

云 ‘세상의 끝, 새로운 세계’

  • 글 · 사진 김용한 | yonghankim789@gmail.com

샹거리라엔 샹그릴라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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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윈난성의 아름다운 자연과 개성적인 문화는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높은 산과 대협곡, 강, 호수, 석림(石林), ‘민족전시장’이라 할 다양한 소수민족. 서양과 중국은 이 땅이 ‘오지’로 남아 있기를 소망하지만, 그건 동물원에 동물을 가두는 것과 다름없는 욕심 아니냐고 윈난은 되묻는다.
샹거리라엔 샹그릴라가 없다?

윈난의 카르스트 지형이 만들어낸 석림(石林).

어느 해 1월 말, 윈난성 쿤밍(昆明)에 사는 친구의 초대를 받았다. 추위에 시달리던 터라 반갑게 응했다. 일기예보를 보니 한국은 맑은 날 최고기온이 5℃를 넘을까 말까 한데, 쿤밍은 최저기온이 6℃, 최고기온은 20℃를 넘나들었다. 한국의 가을 날씨니까 시원하게 보낼 수 있겠지.
그런데 웬걸? 쿤밍은 의외로 쌀쌀했다. 낮은 괜찮았지만, 밤이 문제였다. 남중국은 난방 없이도 겨울을 버틸 만하기에 난방을 전혀 하지 않는다! 북방은 난방을 잘하기에, 밖은 추워도 안은 따뜻하다. 남방인과 결혼한 북방인들이 춘절에 남방집이 춥다며 가기 싫어하는 심정이 이해가 됐다. 그래도 따사로운 낮은 참 좋았다. ‘영원한 봄의 도시(春城)’라는 별명답게 날씨는 화창했고 도처에 꽃이 만발했다.



꿈과 낭만의 무대

윈난(雲南)성의 약칭은 ‘구름 운(云, 번체는 雲)’자다. 아득히 먼 구름보다도 더 남쪽에 있는 곳. 속세를 벗어난 신비로운 느낌마저 주는 곳. 꽃구름 피어오르는 남쪽 땅(彩雲之南). 윈난성은 중국인에게 꿈과 낭만을 불러일으키는 곳으로, 소설 속에서 환상적인 무대로 곧잘 등장한다. 그래서 제갈량은 독천(毒泉)을 넘고 맹수부대와 등갑병을 격파해 남만(南蠻)을 평정했고, 대리단씨(大理段氏)는 절세무공 육맥신검(六脈神劍)과 일양지(一陽指)를 구사하며, 오독교(五毒教)의 먀오족은 맹독을 능수능란하게 다룬다.
윈난성은 지질학적으로 유라시아판과 인도판이 충돌한 경계지대다. 히말라야부터 바다로 가는 중간에 있어 해발 76.4m에서 6740m까지 다양한 지형이 펼쳐지고, 그 위에 북회귀선이 지나간다. 사시사철 어느 때고 열대부터 한대까지 모든 기후를 만날 수 있다. ‘산 하나에 사계절이 다 있고, 십리만 가도 날씨가 다르다(一山有四節,十里不同天)’고 할 만큼 윈난의 기후는 변화무쌍하다.
운귀고원(雲貴高原)에 발달한 대표적인 도시는 성도 쿤밍과 대리국의 근거지 다리(大理)다. 두 도시는 산과 호수를 끼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북쪽의 산은 매서운 북풍을 막아주고, 남쪽의 호수는 뜨거운 남풍을 식혀준다. 여름은 선선하고 겨울은 따뜻해서, 1년 내내 봄처럼 꽃이 피니 농사짓기도 좋다. 거대한 호수는 깨끗한 물과 풍부한 물고기를 선사한다.
살기 좋은 만큼 일찍부터 사람이 모여들었다. 쿤밍의 뎬츠(滇池) 호수 부근에서 발견된 위안머우(元謀)원인은 약 200만 년 전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유명한 베이징원인의 생존 추정 시기는 70만 년 전에 불과하다. 윈난의 역사가 얼마나 깊은지 짐작할 수 있다.
윈난은 오랜 세월 중국과 영향을 주고받으면서도 독자성을 지켜왔다. 춘추전국 말기 초장왕의 후예 장교(莊蹻) 장군이 윈난을 정벌했으나 진이 초를 치는 바람에 귀국할 수 없었다. 이에 장교는 ‘옷차림을 바꾸고 그곳 풍속을 따라 그들의 우두머리가 됐다.’(사마천, ‘사기’, 서남이열전(西南夷列傳)). 중국의 장군이 토착세력을 정복한 뒤 현지 문화를 받아들이고 지도자가 된 것은 위만조선, 조타의 남월과 유사한 사례다. 장교는 전왕(滇王)을 자칭했다. 쿤밍 일대를 지칭한 ‘땅 이름 전(滇)’자는 윈난의 또 다른 약칭이다. 전국시대 말기부터 헤아려봐도 2000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담은 이름이다.



투쟁과 반란의 땅

샹거리라엔 샹그릴라가 없다?


한 무제와 제갈량이 남만을 정벌했을 때도 토착지배층을 제거하지 않고 자치권을 인정했다. 삼국지 팬들은 제갈량이 윈난의 우두머리 맹획을 일곱 번 잡고 일곱 번 풀어줬다는 칠종칠금(七縱七擒)이 진짜냐 아니냐 논쟁하곤 한다. 그러나 핵심은 제갈량의 유화정책에 있다. 오는 노련한 사섭이 죽자마자 교주를 점령하는 등 적극적인 정복정책을 폈고 현지인들의 격심한 반발을 샀다. 반면 제갈량은 촉한이 절대 우위임을 현지인에게 각인시키면서도, 관리 파견도 주둔군 배치도 없이 곱게 물러난다. 오히려 현지인들의 신망을 얻던 맹획을 어사중승(감사원 사무총장급)이란 요직에 앉히고 윈난의 자치권을 보장했다.
윈난의 독자적 발전은 당송시대에 절정에 이른다. 250년 남조(南詔)와 300년 대리국 등 500년 넘게 독립왕조가 이어졌다. 당나라와 토번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며 당 현종의 10만 대군 원정을 두 차례나 격파하는 등 만만찮은 역량을 과시했다. 불교가 융성하며 윈난의 대표적 문화재인 법계통령명도승탑(法界通靈明道乘塔)을 세우고 고유 문자를 만드는 등 문화의 꽃도 활짝 피었다.
그러나 무적의 몽골군을 이기지는 못했다. 쿠빌라이는 남송을 포위 공격하려 대리국을 멸망시켰다. 원대에 이르러 쿠빌라이 서자 혈통의 왕이 윈난을 다스렸지만, 대리 단씨의 영향력은 여전히 남아 있어 연합정권적인 면을 보인다. 원나라가 몰락하며 윈난은 다시 독립을 꿈꿨지만, 명 태조 주원장은 윈난의 은광산을 탐내 윈난을 무력으로 복속시켰다. 이때부터 한족 이주민이 많아지고 윈난은 중국과 일체화한다. 조선 개국 때만 해도 독립성을 유지하던 지역이 결국 중국에 편입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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