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호

11세 연하 아내에게 ‘심쿵’ 하는 ‘돌부처’

‘응팔’ 최택 실제 모델 이창호 9단이 사는 법

  • 이혜민 기자 | behappy@donga.com

    입력2016-01-22 14: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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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사랑 아내, 5살·2살 딸과 알콩달콩
    • 최택보다 더한 ‘배려남’
    • 어수룩해도 ‘스트레스 다스리기’ 달인
    • 갤러그, 엑스리온 실제 1인자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하 응팔)은 숱한 화제를 남겼다. 개성 만점의 등장인물들 중 특히 주목을 받은 이가 국보급 바둑기사 최택(박보검 분)이다. 응팔의 인기가 더해갈수록 극중 최택의 실제 모델인 이창호(41) 9단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2005년 이창호 9단이 ‘불멸의 5연승’을 거둔 ‘상하이 대첩’이 응팔에서 재현되자 열기는 더 뜨거워졌다. 드라마 막바지에는 최택이 여주인공 성덕선의 미래 남편감으로 예상되면서 덩달아 이창호 9단의 ‘러브 스토리’도 새삼 화제가 됐다. 최택과 이창호 국수(國手, 바둑 등에서 그 실력이 한 나라에서 으뜸가는 사람. 한국에서는 한 번이라도 정상에 선 프로들에게 국수 칭호를 줌)는 과연 얼마나 닮았을까.
    최택. 1971년생. ‘바둑계의 돌부처’. 11세 때 프로에 입단해 13세에 세계 최연소 타이틀을 따내고 15세에 스승을 꺾은 이후 응팔의 배경인 1988년 현재까지 랭킹 1위를 지키며 중국, 일본 고수들을 압도하고 있다.



    ‘심장어택’ 상남자

    하지만 서울 쌍문동(응팔의 주무대) 골목길 동갑내기 친구들인 정환, 선우, 동룡, 덕선은 ‘바둑 신’을 ‘등신’ 취급한다. 동네 사람들도 택이를 누구나 챙겨줘야 할 ‘희동이’(쌍문동을 무대로 한 만화 ‘둘리’의 아기 캐릭터)로 여긴다. 골목 금은방 ‘봉황당’ 외동아들 택이는 어릴 적 엄마를 여의고 아버지와 함께 서울로 이사 왔고 아버지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는다.
    택이는 약속 장소도 못 찾고, 말수도 적고,욕도 못하고 뒷북도 잘 치고, 돈도 잘 빌려준다. 신발 끈도 못 묶고,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에 테이프를 못 넣고, 요거트 뚜껑을 못 열어 끙끙댄다. 라면도 못 끓이고, 축구도 못한다. 극도의 스트레스로 수면제를 먹어야 겨우  잠이 든다.  
    하지만 최택은 첫사랑 덕선이 덕분에 ‘상남자’로 변신한다. 택이는 덕선이 없는 자리에서 친구들에게 “나 덕선이 좋은데”라며 무심한 듯 당당하게 공표하는가 하면 친구와 대화하다 짝사랑하는 덕선이를 떠올리며 “(덕선이 없으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애정 공세도 적극적이다. 유공 연수원에 몰래 들어가 축구를 하다 경비원에게 들킨 쌍문동 친구들. 다리를 다친 덕선이를 왕자님이 공주 안듯 가뿐히 안고 운동장을 질주하는 이가 택이다. 덕선이가 남자친구에게 바람맞은 사실을 알고는 생애 처음으로 대국을 포기한 채 콘서트장으로 달려가 추위에 떠는 덕선에게 자신의 외투를 건네곤 씽긋 웃는다. 이런 택이를 보며 ‘심장어택’(‘심장’과 ‘attack’의 합성어로 반했다는 뜻)한 여인네가 한둘이 아니다.
    이창호. 이 국수는 1975년 전북 전주 중앙동에서 이시계점(李時計店)을 운영하는 이재룡· 채수희 부부의 삼형제 가운데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옛날 만주에서 시계수리 기술을 익힌 이 국수의 할아버지 고(故) 이화춘 씨가 광복 직전 고향에 돌아와 시계점을 열었고, 그의 4남1녀 중 셋째아들 이재룡 씨가 가업을 이었다.



    기자를 사랑한 기사

    이창호는 전북 우량아선발대회에서 1등을 했을 정도로 건강했다. 계산이 빨랐고 어릴 때는 줄곧 공책에 숫자만 썼다. 1부터 100까지 쓰고 나면 또다시 1부터 100까지 오로지 숫자만 다시 쓰는 식이었다. 고집도 셌다. 유치원에 가기 전, 시계점 밖에 나가서 놀겠다는 걸 “너무 늦어 안 된다”고 하자 시계점 유리문으로 그야말로 ‘돌진’해 통과했다. 유리 파편에 동맥을 다쳤고, 지금도 왼쪽 팔목에 흉터가 남아 있다.
    게임도 좋아했다. 아버지는 학교에 입학하지 않은 아들들을 데리고 오락실에 자주 갔고, 형제는 자연스럽게 게임에 흥미를 갖게 됐다. 특히 갤러그와 엑스리온을 좋아했는데, 동전 하나만 있으면 1시간이 넘도록 게임하며 기록을 경신, 또 경신했다. 다른 아이들이 게임을 못할 지경이 되자 오락실 사장은 이들 형제가 나타나면 돈을 쥐여주고 돌려보냈다.





    이 국수가 바둑 세계에 들어선 건 1981년. 할아버지가 친구들과 바둑을 두다 손자가 바둑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그 후 자전거 뒷자리에 손자를 태우고 기원에 데리고 다녔다. 처음에는 튕겨먹기(알까기), 오목으로 시작했고 바둑을 배운 지 2년 만에 해태배 전국 어린이바둑대회에 나가서 16강에 올라 장려상을 탔다. 9세에 1984년 당대 최고의 승부사 조훈현 9단의 내제자(內弟子)가 됐다. 프로 입단은 1986년.
    이창호의 방은 연희동 조 9단 자택의 2층에 마련됐다. 전주의 집에서도 혼자 자지 못한 아이는 조훈현 9단의 노부모와 함께 잤다. 나중에 혼자 자게 된 뒤에도 불을 켜고 문을 열어둔 채 잠이 들었다. 조 9단의 부인 정미화 씨가 “7년 동안 2층으로 올라가는 창호의 발소리가 울리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할 만큼 아이는 조심성이 많았다.
    이창호는 1989년 최연소로 국내 타이틀을 쟁취했고, 1992년엔 최연소 세계 타이틀 획득의 신기록을 세웠다. 이후 세계 6대 기전을 제패하는 슈퍼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국내외 통산 타이틀 획득 140회, 상금으로만 100억 원 넘게 벌었다.
    이창호 9단의 첫사랑은 지금의 아내인 것으로 추정된다. 11세 연하인 이도윤 씨와는 프로기사와 사이버오로(인터넷 바둑전문 사이트) 기자로 만났다. 2008년 늦여름 삼성화재배 32강전 때다. 대회가 끝나고 서울로 가는 차 안에서 이 기자가 이 9단의 해설을 듣고 관전기를 썼는데, 이 9단이 그렇게까지 해주는 경우는 드물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해 가을 태백산 대국 때 정상을 함께 오르며 친해졌다고 전해진다. 2년 열애 끝에 2010년 10월 양가 부모와 친지들만 모시고 검소하게 결혼식을 올린 부부는 5세, 2세 두 딸을 키운다. 



    ‘똑딱이 군화’ 탄생 비화

    요약을 끝냈으니 디테일로 들어가 보자. 우선 두 사람의 공통점. 지난해 12월 29일 제17기 맥심커피배 입신최강전 개막식 날 이창호 국수는 “최택 6단이 이창호 9단과 닮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최택은 잘생긴 미소년이라 드라마를 보는 분들이 저 때문에 감정이입이 안 될까봐 걱정”이라면서도 “어눌한 게 좀 닮지 않았나?”라고 반문했다.
    이 국수의 동생 영호 씨는 “응팔 제작진이 상하이 대첩뿐 아니라 자기가 관심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형의 모습을 놀랍도록 잘 재현했다. 형의 똑딱이 군화 일화가 떠올랐다”며 웃었다.
    이 국수는 프로기사로서는 최초로 합법적인 병역 혜택을 받았다. 그의 재능을 아낀 국회의원 105명이 후원회를 조직해 프로기사의 병역 혜택 청원서를 만들었고, 이를 계기로 바둑이 병역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예술, 스포츠의 한 종목으로 진일보했다. 이 국수는 1995년 3월 문화체육부 장관과 면담한 후 4주의 군사훈련을 받고 3년간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했다. ‘스포츠서울’의 ‘정용진의 바둑수첩’은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했다.

    포복절도할 에피소드 하나. 호랑이 조교의 집합명령이 떨어지자 소대원들이 번개 같은  ‘비마(飛馬) 행마’로 달려 연병장에 집합한다. 그런데 이창호 훈병은 내무반에서 군화(워커) 끈을 못 매 쩔쩔매고 있다. “이창호 훈병! 여기서 뭐 하나? 사회에서 신발 끈도 한번 안 매봤나?” 기록계시원 같은 ‘조교’의 초읽기 독촉에 이미 울상이 돼버린 우리의 이창호 훈병. “…한번도…전…운동화만 신어봐서….” 이창호 9단이 운동화만 신어봤다는 말은 사실이다. 그것도 끈 달린 운동화가 아닌 찍찍이 운동화만…. 조훈현 9단의 부인 정미화 여사의 증언이 이를 입증한다. “내제자로 받고 1~2년간은 손수 목욕을 시켰다. 머리를 혼자 못 감는 것은 물론 세수조차 제 손으로 제대로 못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긴 하지만 그 나이면 누구나 세면 정도는 할 줄 아는데, 창호는 본가에서 그렇게 애지중지 키웠던 듯했다. 운동화 끈이 한번 풀어지면 며칠이고 풀린 채로 지렁이 매달고 다니듯 신고 다녔다. 그래서 아예 끈을 묶을 필요 없는 찍찍이 신발을 사 신겼다. 원체 무감각, 무신경한 아이였다. 그러나 바둑에 대한 열정만큼은 집요해 고래 심줄보다 끈질겼다.” 그래서 어찌 됐을까. 생각다 못한 조교가 군화에 ‘똑딱단추’를 달아주는 아이디어를 내기에 이르렀다.



    ‘왼손이 모르게 하라’

    정미화 씨가 1998년 한국기원 ‘바둑가이드’에 쓴 ‘이창호 論-이창호의 내제자 시절 Ⅱ’에는 이창호가 최택처럼 ‘길치’인 데다 복기(復棋)를 할 때도 어수룩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연희동 우리 집에서 이화여대 부속 초등학교까지는 버스 다섯 정거장 거리였다. 처음엔 낯설어 그렇다 치고, 그런데 이 엎어지면 코 닿을 코스를 지나쳐 헤매기 일쑤였다. 그것은 바둑판 밖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 문제랄 것도 없었다. 정작 심각한 문제는 ‘전주 바둑신동’ 소리를 듣는 창호가 자기가 둔 그날 낮의 바둑을 제대로 복기 못할 때가 종종 있다는 사실이다. 이 대목에서는 조훈현 9단도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얘가 분명 내 스타일이 아닌 것만은 자명한데, 이거 내가 잘못 봤나? 아직도 그이는 창호가 복기를 제대로 못한 것을 ‘미스터리’로 여긴다. 하긴 창호와 절친한 김성룡 5단의 얘기를 들어보면 세계 넘버원이 된 지금도 헤맬 때가 있다고 하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최택은 중국에서 대국하면 친구들의 부탁으로 중국 술을 사오고, 친구들과 저녁에 피자를 같이 먹기로 약속해놓고 늦게 도착하자 친구들이 각자 집에서 먹을 수 있도록 피자 여러 판을 사온다. 친구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는 속 깊은 친구다.
    이창호 9단은 어떨까. 사이버오로 손종수 상무는 “이 9단은 돈이 안 되는 행사라 하더라도 한국기원의 처지를 생각해서 참석해야 할 행사라면 꼭 나가는 사람”이라고 했다.
    “2, 3년 전인가. 프로와 아마추어 7, 8명이 같이 밥을 먹는 자리가 있었어요. 밥 먹고 자리를 옮겨 술 한잔을 더 하게 됐죠. 당시 한 사람이 일 때문에 늦어져 술자리에 왔는데 밥을 못 먹었다고 하더라고요. 그 얘기를 들은 이 9단이 슬며시 일어나더니 편의점에 가서 도시락과 국을 데워 왔더라고요.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도 그런 호의를 베푸니 다들 멋있다고 했죠.”



    아내 이씨도 이 9단의 배려가 좀 지나칠 때가 있다고 귀띔했다.
    “친구들 만날 때도 다른 사람의 의견에만 맞춰요. ‘이젠 자기 의견을 어느 정도 내야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말해주는데도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집에서도 그래요. 연애 2년, 결혼 후 5년이란 시간을 함께해왔는데도 남편은 한결같아요. 첫째를 임신해서 입덧으로 메스꺼워할 때는 제가 냉장고 문을 한 번도 안 열게 해주고 음식물 쓰레기도 버려줬죠. 애정표현을 잘하는 건 아닌데 늘 저를 생각해주고 있다는 걸 느끼게 합니다.”
    배려심은 선행으로 이어진다. 이창호·이도윤 부부는 첫딸(이소정)의 돌잔치를 여는 대신 기부금을 모아 전달하는 ‘기부 돌잔치’를 벌였다. 현재 나눔첫돌잔치 홈페이지에는 ‘이소정의 이름으로 185만 원의 나눔이 모아졌고, 아프리카 말리 등 저개발국의 식수 개선 사업에 쓰일 예정입니다. 여러분의 관심과 사랑 감사드립니다’는 감사 글이 남아 있다. 동생 영호 씨는 “형이 내가 이런 말 한 걸 알면 싫어할 텐데…”라면서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형의 철학은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입니다. ‘유명한 사람이 좋은 일 하면 다른 사람들도 동참해서 같이 따라오지 않겠냐’며 선행을 알리라고 해도 형은 그렇게 안 해요. 형이 오래전부터 좋은 일을 많이 한 걸로 압니다.”



    수많은 광고 출연 제의 퇴짜

    극중 최택은 남에게 부탁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던 최택이 친구 아버지가 응급실로 실려가자 자신의 팬인 병원장에게 전화해 선처를 부탁한다. 이런 대목도 이 9단의 면모와 겹친다. 영호 씨는 “형이 자신을 위해 남에게 부탁하는 건 극도로 싫어하지만, 자기가 부탁해 누군가를 돕는 상황이라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했다.
    2011년 이 9단의 자서전 ‘이창호의 부득탐승(不得探勝)’이 발간됐을 때의 일이다. 손종수 상무는 한국기원 관계자와 함께 “방송사의 주요 뉴스 시간에 인터뷰 제안이 들어왔으니 출연하면 책 홍보가 잘될 것”이라고 설득했지만 이 9단은 끝끝내 응하지 않았다.
    “이 9단은 단체전 우승 공로로 시드(예선을 거치지 않고 본선에 출전하게 해주는 것)를 주면 사양합니다. 자기는 그걸 받을 자격이 없다는 거죠. 우승 상금을 n분의 1로 받을 수 있는데도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단호합니다. 그 많은 광고 제의를 거절한 것도 자기만의 원칙이 있어서 그랬을 겁니다.”
    시간을 정확히 맞춰 대국장에 나타나는 것도 최택과 이창호 9단의 닮은 점이다. 영호 씨는 “상대가 연장자일 경우 대국장에 늦게 나가면 후배로서 예의에 어긋나는 게 아니냐고 생각하는 분도 있겠지만, 승부사로서 최고의 컨디션으로 조절하기 위해 그런 습성은 서로 존중해줘야 한다”고 설명했다. 영호 씨는 자신의 책 ‘나의 형, 이창호’에 이렇게 썼다.   

    창호 형도 예전에는 10분쯤 미리 가서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지고 난 후부터는 수많은 카메라 플래시와 기자들의 인터뷰 시도 등으로, 일찍 도착한 시간만큼 수난을 겪었다. 결국 여기서 쌓인 피로가 대국에 악영향을 미치고 형은 컨디션 조절을 위해 일부러 정확한 시간을 지키게 된 것이다.

    최택은 와이셔츠 단추를 모두 채우고 바둑을 둔다. 최택이 희동이에서 바둑의 신으로 변신하는 건 정장을 입고 바둑을 둘 때다. 영호 씨는 이 부분은 형의 스타일과 다르다고 했다.
    “처음 세계대회에 출전했을 때 말고는 10년 넘게 넥타이를 안 맨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와 중국 일정을 함께한 1998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넥타이 맨 걸 본 적이 없어요. 목이 갑갑한 것을 무척 싫어했거든요. 예의를 지키면서도 대국에 지장을 주지 않는 복장이 무엇이냐를 놓고 가끔 논란이 있었는데, 형은 ‘노타이 정장’이 적정선이라고 판단한 것 같아요.”



    그렇다면 최택과 이창호는 어떤 점이 다를까. 지난해 12월 입신최강전 개막식 때 “최택 6단은 이성에게 아주 적극적인데 이창호 9단은 어땠냐”는 질문에 이 9단은 “그게 나와 아주 다른 점”이라고 답했다. 아내 이도윤 씨에게 같은 질문을 건네자 “그런 것도 같다”며 말을 아꼈다.



    안으로 눌러 참는 사람

    바둑 공부하는 스타일도 다르다. 최택은 기보를 보며 공부하다 새벽에 잠드는 경우가 많다. 한번 앉았다 하면 일어날 줄 모른다. 이런 페이스를 지속하다간 바둑을 오래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창호 9단은 새벽까지 공부하진 않는다. 최택처럼 매일같이 기원에 나가지도 않는다. 다음은 ‘나의 형, 이창호’의 한 대목.

    지금은 내(이창호)가 공부하던 시절과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내가 10대 초반에 공부에 열중했을 때 일주일에 세 번 정도 기원에 나가 실전 연습을 했고, 그 외에는 혼자 집에서 3, 4 시간 공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요즘은 경쟁이 너무 치열해서 대부분의 아이들이 하루 10시간 가까이 공부하는 것으로 안다.

    물론 이 9단의 공부가 새벽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대국을 앞두고는 그랬다. 영호 씨는 “책상 위에 놓인 바둑판, 어지럽게 놓인 돌들, 그 옆 침대 위에 피곤을 못 이기고 쓰러진 형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여기저기 바닥에 떨어져 있는 돌들을 조심스럽게 주워담는데 괜스레 가슴이 뜨거워졌다. 매번 힘든 승부를 펼쳐야 하는 형이 안쓰러운 생각도 들었고, 한편으로는 쉽지 않은 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묵묵히 걸어가는 모습이 자랑스럽게도 느껴졌다”고 썼다.  
    취미도 좀 다르다. 최택은 담배와 술을 하지만 이 9단은 술만 조금 마신다. 최택처럼 수면제를 먹어야 잠드는 것도 아니다. 최택은 스스로 “공 좀 찬다”고 하는데 친구 동룡이는 “(공부 못하는) 덕선이 서울대 가는 소리하고 있네”라고 비웃는다. 이 9단은 운동을 잘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는 씨름왕이었고 이후 탁구, 테니스, 골프를 즐겼다. 요즘 취미는 등산.


    응팔이 방영된 후 손종수 상무와 만난 이창호 9단은 “최택은 어린 시절 친구가 많은데 그런 점이 부럽다”고 했다.
    “이 9단은 바둑에만 몰두하느라 바둑 친구 외에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거든요. 많이 외로웠을 거예요. 원래도 과묵하지만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과 승부를 겨뤄 이기고 그걸 배려하다 보니 점점 안으로 눌러 참고, 말을 안 하는 버릇이 생긴 것 같습니다.”



    기권패는 멋있지 않다

    최택과 이창호의 가장 큰 차이점은 ‘기권패’에 있지 않을까. 최택은 남자친구와 콘서트를 보러 간다며 들떠 있던 덕선이가 바람맞자 대국 도중 기권하고 덕선이에게 달려간다. 시청자들은 “자신의 커리어보다 사랑을 택한 멋진 택이”이라며 치켜세웠다.
    바둑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행동이 얼마나 프로답지 못한 것인지 안다. 이도윤 씨는 “이런 행동은 전혀 멋있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다”면서 “조치훈 사범님은 교통사고를 당하고도 대국을 치렀을 만큼 프로기사에게 대국은 어겨서는 안 될 소중한 약속”이라고 했다.
    이창호 9단은 현재 한국 랭킹 32위(1월 기준)다. 손종수 상무는 이 9단이 가정에서 안온함을 얻으며 더 성장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보통은 한번 성적이 내려오면 상승하기 어려운데 이 9단은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회복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이 9단의 삶을 ‘복기’하면서 아홉 살짜리의 의사를 존중해 전주에서 서울로 올려 보낸 부모의 ‘믿음’이 이 국수를 키워낸 원동력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국수가 바둑이라는 넓은 바다에서 항해를 계속하길 바라며 그에게 아내 도윤 씨의 말을 전한다.
    “1인자가 뒤처진다는 건 큰 스트레스일 거예요. 하지만 그건 프로기사가 견뎌야 할 몫입니다. 그리고 물러난다고 해서 절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당연한 순리인 거죠. 저희 신랑은 분명 나이가 들어도 승부를 겨룰 사람이니 지는 것에 무뎌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런 시간을 지혜롭게 잘 넘기면 분명 더 큰 걸 얻을 수 있을 거예요. 그 큰 것이 1인자를 말하는 건 아니고, 뭔가 더 넓고 큰 깨달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이 글을 쓰기 위해 이창호 9단과 여러 차례 인터뷰를 시도했지만 이 국수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아내 이도윤 씨, 10여 년간 이 국수의 중국 원정길에 동행한 동생 영호 씨, 응팔 제작팀에게 바둑 조언을 해준 손종수 사이버오로 상무에게서 그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또 영호 씨와 손 상무의 책 ‘바둑판 위에 세상을 그리는 사람 나의 형, 이창호’, ‘반상의 CEO 이창호 스토리-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도 참고해 이 국수의 젊은 날을 복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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