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호

영화, 그곳에 가고 싶다

우린 아직도 원시림에 갇혀 있다

‘지슬’ ‘비념’과 제주도

  • 글 · 오동진 | 영화평론가 사진 · 김성룡 | 포토그래퍼

    입력2016-01-29 10: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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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지슬’ 촬영지인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큰넓궤. 제주도 4·3사건 때 동광리 주민들이 2개월 동안 은신해 살았다는 이곳엔 인적이 없다. 동굴 안 넓은 터가 있다는데도 들어가기가 두려워진다. 아직 4·3의 원혼들이 살고 있을 것 같다. 그건 아직도 4·3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제주의 바다는 사람을 덮치지 않는다. 어떤 바다가 그럴까마는, 제주는 더욱 그런 느낌을 준다. 여기 바다는 사뭇 다르다. 기이한 공존의 느낌 같은 것? 공항에서 내려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휙휙 지나치는 오른쪽 해변이 ‘나는 지금 너와 함께 달리고 있어’라고 얘기하는 듯하다(노선을 애월을 지나 중문과 서귀포 쪽으로 잡았다. 성산일출봉을 찍을 수 있을까, 우도는 어떻게 하지, 거기는 포기해야 하는 거 아냐, 노선을 정하자고 노선을, 인생에선 노선이 중요해… 등등이 차 안에서 포토그래퍼와 나눈 대화다).
    부산의 해운대 해변이나 전남 해남의 해변은 좀 다르다. 해운대 남동해의 차디차고 넓은 바다는 사람을 좀 밀어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오지마, 위험해’라고 얘기한다. 해남의 해변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거기는 사람을 좀 껴안아주는 것 같다. 눈앞에 듬성듬성 떠 있는 작은 섬들 때문인데 그래서 바다가 딴 곳보다는 따뜻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렇지만 제주의 바다처럼 관조(觀照)하는 것 같은 이미지는 아니다.
    여기 제주의 바다는 당신이 어디를 가든 늘 따라다니며 챙겨주되, 잔소리는 하지 않는, 지적이고 세련된 여성처럼 느껴진다. ‘아하, 그래서 이렇게 마음이 설레는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늦은 나이에 연애하는 기분이 들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어도, 陰心을 자극하는 섬

    제주의 영화를 생각하면서 가장 먼저 마라도(馬羅島)를 떠올렸다. ‘그래, 마라도를 꼭 갔다 와야겠어’라고 되뇌기까지 했다. 국토 최남단에 있는 섬이라서 가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그건 이어도(離於島)를 생각해서였다. 전설의 섬 이어도. 이름처럼 멀리 떨어진, 그래서 격리된 느낌의 섬. 아틀란티스처럼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는 섬. 섬사람들의 욕망도 그때 한꺼번에 가라앉았다지….
    이어도는 멀다. (모슬항을 기준으로) 마라도가 뱃길로 약 11km, 중간에 있는 가파도는 5.5km밖에 안되니까 150km쯤 떨어진 이어도는 아주 멀리 있는 섬인 셈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음심(陰心)을 자극했는지도 모른다. 과연 그곳엔 누가 살고 있을까. 무엇을 하고 있을까. 뭍에서 하지 못한 일을 저곳에서는 다 저지르고 살 수 있지 않을까.
    1977년에 만든 김기영 감독의 ‘이어도’는 이청준 작가의 중편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이청준은 상상력이 뛰어난 데다 그것을 이야기로 엮어내는 데 탁월한 필력을 가진 인물이다. 영화 쪽 얘기로 하면 스토리텔링이 뛰어났던 거다.
    그의 소설을 영화로 만들면서 김기영은 자기 식의 독특한 화법으로 치환했다. 김기영은 미술로 얘기하면 살바도르 달리 같은 감독이다. 1920, 1930년대로 얘기하면 루이스 브뉘엘 같은 감독이 떠오르고, 현대로 옮겨 오면 미국의 데이비드 린치 같은 인물이다. 그는 정상이 아닌 생각을 갖고 있었고, 정상이 아니기 위해 애쓴 작가형 감독이다. 그의 초현실주의적 사고방식, 그로테스크한 이미지, 난해한 주제의식은 두고두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그의 영화가 황당무계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역설적으로 세상이 황당무계하다는 걸 깨닫지 못해서일 수 있다”고, 역시 천재 감독이던 하길종은 말했다.
    영화 ‘이어도’는 건설회사 부장이 제주도에서 리조트를 짓기 전에 도민들과 마찰을 피하기 위해 일종의 홍보 이벤트를 벌이다 겪는 일을 담았다. 그 이벤트가 바로 이어도 찾아내기 같은 ‘짓’이다. 건설부장은 지역 기자라는 사람에게서 항의를 받게 되고, 그와 바다에서 술자리를 같이하다가 아침에 깨어보니 뱃머리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그를 찾아낼 수 없게 된다. 영화는 이 남자가 결국 이어도로 가버린 것처럼 암시를 준다.

    오멸은 임흥순, 임흥순은 오멸

    그만큼 두 영화가 남다르다는 것이다. 그 둘이 이룬 예술적 성과가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작품은 모두 두 장르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지점에 서 있다. 큰넓궤 입구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야 탄식 같은 깨달음의 신음이 터져 나온다. 아, 이제야 오멸의 영화를 알겠어. 이제야, 이제야 ‘비념’이 얘기하려던 것을 알겠어.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위로공단’이라는 작품으로 은사자상을 탄 임흥순은 이후 종종 오멸과 비교됐지만 둘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제주도 영화를 내놨다. 그때부터 “오멸은 임흥순이고 임흥순은 오멸이다”라는 얘기를 들었다. 영화의 내러티브 구성이 미술적 이미지의 차용을 통해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두 사람 다 비슷한 시기에 4 · 3을 다룬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오멸의 ‘지슬’은 기이한 판타지로까지 느낌을 극대화한 작품이다. 잔혹한 학살 현장을 다룬 작품이 심지어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이 전복(顚覆)적 미학의 성취는 사람들에게 역사를 새롭게 깨우치는 계기가 됐다.
    임흥순은 ‘비나리’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비념, 곧 제주 토속 굿의 형식과 내용을 모티프로 4 · 3의 상황을 다이내믹한 관념으로 추론하고 연역하게 만든다. 임흥순의 이 역작이 놀라운 것은 전통 굿의 이미지를 현대미술의 모더니즘적 분위기와 결합시키고 있다는 점, 1947년에 벌어진 오욕의 역사를 현재의 강정마을 사태로 통합하고 있다는 점이다.
    두 작품은 부분의 이야기를 전체의 이야기로, 하나의 사건을 큰 역사의 흐름으로 이어지게 함으로써 두 사람 모두 역사의 실체를 얼마나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으며 그 관념의 직조 또한 대단한 수위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비념’은 2014년 제1회 들꽃영화상 다큐멘터리 부문과 신인감독상 부문 후보에 올랐다. 하지만 대상은 오멸의 ‘지슬’이 받았다. ‘지슬’이냐 ‘비념’이냐를 놓고 비평가들과 심사위원들은 상당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과거의 참혹한 역사를 극적인 순간들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오멸의 노력이 조금 더 평가받은 셈이 됐다.
    오멸이든 임흥순이든, ‘지슬’이든 ‘비념’이든 제주도의 이곳 안덕면 동광리 외진 오솔길에 서 있으면 사람들 스스로 문지방을 넘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마음의 빚을 일부나마 갚았다는 느낌도 든다.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는가. 그래도 역사의 현장에서 과거의 일들을 체험함으로써 사실을 사실 그대로 바라볼 ‘시력’을 얻게 된다는 건 뒤늦었지만 아주 잘한 일에 속한다.



    영화도 현장이다!

    여기 와 보면 그동안 4 · 3을 두고 숱하게 이어진 왜곡의 보도와, 왜곡의 교육과, 왜곡의 선전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나를 자연스럽게 꿰뚫게 된다. 역사는 현장이다. 무조건 그곳에 가봐야 통시(通時)의 깨달음이 온다. 이번 여행길로 한 가지 새삼 알게 된 사실은 영화도 때론 현장이란 점이었다. 영화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종종 스크린의 산을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스크린에 더 깊숙이 들어가 작가의 마음속 심산유곡을 헤매고 다닐 필요가 있다. 그래야 작품을 통해 감독이 해내고자 한 성취의 메시지가 저 멀리서 들려오기 시작한다.
    예상한 대로 제주도의 밤은 갑자기 찾아오는 듯했다. 큰넓궤의 오솔길을 빠져 나오는 길은 짙은 어둠에 빠져버렸다. 자,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4 · 3의 어두움에서 우리는 과연 어디를 향해 가야 하는가. 마음이 가라앉는다. 중간쯤 어디에선가 헤매던 길에서 만난 이름 없는 무덤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유도 모르고 죽어 나갔을까. 저 이름 없는 무덤 말고도 이름 없는 죽음이 얼마나 더 많을 것인가. 왜 우리 역사는 이렇게도 핏빛 역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그런데 그것이 지금 여기뿐이겠는가. 시리아에서는 아사드 정권이 30만 명의 자국민을 학살하고도 버젓이 정권을 쥐고 있다. 인도네시아 발리에서도 50년 전의 학살 사건이 여전히 청산되지 않고 있다. 아프리카에서는 제노사이드가, 중동에서는 IS 테러가, 남미에서는 툭하면 발생하는 수많은 납치 행위가 이어진다. 이성은 계속해서 발달하는 척, 문명이라는 게 더욱 더 발전하는 척하지만 인간은 여전히 원시림 속에 갇혀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근데 배가 뜰까?

    한 사람은 취재를 하고 한 사람은 사진을 찍는다. 두 사람의 작업은 늘 그렇지만, 처음에만 재잘재잘대다가 각자의 일에 들어가면 입을 다물고 집중하게 된다. 한 사람은 상상을 하고 한 사람은 그 상상을 뷰파인더에 담는다. 무엇을 찍으라고 청하지도 않고 무엇을 찍어야 하냐고 묻지도 않는다. 둘은 그렇게 합을 이룬다. 그래서 결국은 이런 결론에 다다른다.
    “배 안 고파? 우리 밥 안 먹어?”
    오늘 밤은 서귀포에서 자게 될 것이다. 그전에 제주도에 오면 꼭 먹어야 한다는 고등어회를 먹을 것이다. 술도 한잔 하게 될까. 둘이서 말없이? 그리고 우리는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다시 한 번 마라도로 갈 것이다. 근데 배가 뜰까. 바람이 이렇게 거센데? 고등어회를 먹을 수 있는지보다 더 궁금하고 걱정스러운 건 바로 그 점이었다.   
    ※제주 이야기는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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