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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보다 의리! 직원에게 기억되는 경영자 될 것”

도전과 배려 싣고 오대양 누비는 김현겸 팬스타그룹 대표

  • 배수강 기자 | bsk@donga.com

“이익보다 의리! 직원에게 기억되는 경영자 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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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바다소년에서 선박 4척 해양그룹 CEO
  • ● 당장 이익보다 신뢰…“돈에도 눈이 있다”
  • ● 출산휴가 1년 6개월, 사회적기업 지원
  • ● “2500명 승선 크루즈에 태극기 달고 오대양 누빌 터”
“이익보다 의리! 직원에게 기억되는 경영자 될 것”

박해윤 기자

쩌렁쩌렁한 목소리, 메추리알만한 정권(正拳)과 두꺼운 손은 그가 ‘바닷 사람’이라는 걸 짐작게 한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에 유머러스한 화술은 비단처럼 부드럽다. 잠시 눈을 감는다. 폭우가 쏟아지는 거친 밤바다, 그는 휘청거리는 배 안에서 굵은 밧줄을 잡아당기며 닻을 올리다가도, 잔잔한 지중해에선 와인 한 잔에 오후의 망중한을 즐길 것 같다. 김현겸(55) 팬스타그룹 회장에게선 묘한 바다 냄새가 난다.
팬스타그룹은 부산-오사카 등 한일 노선에서 외항정기화물 운송과 여객 운송에 주력하고 있다. 10개 계열사가 복합운송업과 통관업 면허, 물류창고업, 하역업 등 바다 관련 일을 하는 종합해양그룹이다. 그는 대형 선박 4척에 직원 520여 명(인수 중인 회사 직원 포함)을 태우고, 매년 1500억~2000억 원가량의 매출액을 향해 운항하는 글로벌 카페리선사 선장이다.  
“부산 앞바다를 보고 자라다 보니 바다에서 일하고 싶었어요. 대양을 항해하는 멋진 마도로스가 되려고 부산 해양대에 진학하려다가 시력 기준에 미달해 지원을 못했죠.”
그는 1981년 성균관대 토목공학과에 진학했다. 중동 건설 붐이 불던 시기, 돈이라도 왕창 벌어 입신양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음은 늘 바다를 향했다고 한다.
▼ 그럼 졸업 후 해운회사에 취직했나요.
“아뇨. 우리 때는 지하서클 활동이 활발했어요. 노동운동을 ‘세게’ 했죠. 입사지원서도 제대로 못 냈어요(웃음). 누나가 유자 농사를 지어서 졸업 후 서울에서 유자 장사를 시작했는데, 주로 ‘난다랑’ ‘준’ 같은 고급 다방을 공략했어요. 고급 유자여서 좀 비쌌거든요. 그때 ‘난다랑’은 현재의 스타벅스 같은 고급 프랜차이즈 커피숍이었죠.”



선박 없는 선박회사

▼ 실적은 좋았습니까.
“제법 많이 팔았습니다. 뻔질나게 드나들었더니 판로가 뚫렸어요. 명동의 커피숍에서 어떤 분이 ‘유자 팔려면 사장이 아니라 주방장을 찾아야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소주 값 들고 ‘명동 주방장 모임’에 가서 머리 숙이고 살갑게 굴었죠. 이후 영업 매출이 팍팍 오르더군요(웃음).”
2년여 간 유자 장사로 재미를 제법 봤지만, 그래도 마음은 항상 바다로 향했다. 결국 형 친구의 선박회사에 입사했다. 그는 6남매의 막내다.
“선박회사여서 취직했는데, 아, 그런데 배가 없는 선박회사였어요. 입사 1주일 뒤에 알았죠.”
▼ 선박회사에 배가 없다니요?
“‘배가 어디 있냐’고 물으니, ‘부산항에 떠 있는 배가 전부 우리 배’라고 하더군요. 알아보니 무선박운송인(NVOCC) 회사였습니다. 회사를 그만두려다가, 그때 범양상선에서 이직(移職)해 온 선배가 ‘넌 사업가 기질이 있으니 열심히 하면 사장이 될 수 있다’고 격려해줘 까짓것 부딪혀보자 했어요. 그 당시만 해도 NVOCC는 거의 없었어요.”
NVOCC는 운송수단을 지니지 않은 채, 화주(貨主)에 대해서 자기의 요율로 운송계약을 체결하고, 선박회사에  하도급해 운송하는 해상운송인을 말한다. 선박회사의 화물 싣는 공간을 100원에 샀다면 화주에게 120원에 그 공간을 판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어느 날….
“평소 자주 들르는 ‘아시바’(비계, 건물 외벽에 계단을 설치해서 공사 인부들이 다닐 수 있게 하는 건축자재) 제조 회사에 갔는데, 직원들 시선이 싸늘하더군요.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우리 사장이 이 회사 공장장을 빼내 전라도 어디에서 공장을 짓고 있다는 겁니다. 선박회사가 ‘아시바’ 공장을 짓는 것도 의아했지만, 더 중요한 게 있었습니다. 당시 업계에선 거래처 제품가격과 주요 바이어, 운송 스펙 등 기업 기밀을 다 알아도 그것을 지켜주는 게 일종의 불문율이었는데, 그걸 깬 거죠. 회사 가서 바로 따졌죠.”
▼ 그래서요?
“‘신동아’도 매월 ‘공정성장’을 강조하잖아요? 저도 공정하게 성장해야 한다고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올바른 직장에서 올바른 직장생활을 하려고 입사했는데, 이건 완전 불공정하지 않냐’ 따졌더니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고 하더라고요. 뭐, 나올 수밖에요. 저를 따라 퇴사한 직원도 꽤 있었고요.   그 사장은 급하게 공장을 짓다보니 안전사고가 나 사람도 죽고, 1년 뒤 결국 부도가 나더군요. 그때 ‘돈에도 눈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남한테 피해 주면서 탐욕스럽게 돈을 벌면 끝이 안 좋아요. 인과응보(因果應報)거든요. 조금 손해 보는 게 낫지….”



탐욕은 화를 낳는다

그는 전 직장 선배 등과 의기투합해 회사를 차렸다. 딱 1년만 해보고, 안 되면 각자도생(各自圖生)하자고 결의했다. 1990년, 28세 때 팬스타엔터프라이즈(주)를 설립한다.
“당시 무역회사가 1만 개가 넘었는데, 이전 직장에서 거래한 200여 회사는 영업 대상에서  제외했습니다. 전 직장에 대한 ‘도의’라는 게 있으니까요. 9800여 회사를 하나씩 찾아다녔죠. 한달에 컨테이너 100개만 따오자, 1년에 1200개만 배에 실으면 승산이 있다고 봤습니다.”    
도전은 좋은 결실을 낳았다. 마침 무역협회의 국제무역연수원(현재의 무역아카데미) 동기가 롯데상사의 수입화물을 담당했는데, 당시 롯데월드 놀이기구를 교체해야 한다고 업무협조를 구했다. 미국 파트너사와 협약을 체결하고, 엄청난 규모의 화물을 실어 날랐다. ‘일을 잘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대기업 거래처도 늘었다. 1998년 외환위기 때에도 회사는 더 성장했다. 그의 표현대로 ‘돈은 좀 벌던 시기’였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엔 ‘배 없는 사람의 서러움’도 커졌다. 결국 그는 2000년 조양상선의 자회사 동영해운 인수에 나섰다.
“우리는 배가 없어 조양상선의 배를 이용했어요. 조양상선의 제일 큰 고객이었습니다. 그런데 국내 8대 선사는 일종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데, 우리가 들어가려 하니 이들 선사가 반대해 무산됐어요. 화물선 대신 승객도 싣는 카페리로 눈을 돌렸죠.”
김 회장은 2002년 한일 월드컵을 명분으로 어렵게 정부를 설득해 부산~오사카 카페리 운영 면허를 땄다. 승객 680여 명과 화물 220TEU(1TEU는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대)를 실을 수 있는 2만1688t급 카페리도 샀다. 건조한 지 4년 된 일본산 카페리를 사들여 ‘팬스타드림’호로 명명했다. 주변에선 세금 덜 내고 인건비가 싼 외국인 선원을 쓰려면 제3국에 선박 등록을 하라고 했지만, 그는 대한민국에 등록했다. 자신의 ‘드림’을 실현해준 배인 만큼 당당히 대한민국 태극기를 달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태극기 휘날리며 ‘일본의 지중해’로 불리는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를 지날 때의 뭉클함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주마가편(走馬加鞭). 2004년 팬스타드림호가 쉬는 토요일을 이용해 부산 연안을 둘러보며 선상에서 1박을 하는 주말 크루즈를 국내에 처음 선보였고, 한일 월드컵 이후 여행객과 화물이 늘면서 2007년에는 카페리 ‘팬스타써니’호(2만6847t)를, 이듬해에는 남해안과 일본 관광지를 기항하는 ‘팬스타허니’호(1만4036t)를 들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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