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한 글자로 본 중국 | 구이저우성

天·地·人 다 가난해도 욕망은 넘쳐난다

貴 마오타이酒의 고향

  • 글 · 사진 김용한 | yonghankim789@gmail.com

天·地·人 다 가난해도 욕망은 넘쳐난다

1/3
  • 구이저우는 중국에서 가장 가난한 곳이다. 그래서 관광객들은 이곳 주민들이 ‘가난하지만 소박한 삶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는 속 편한 결론을 내리곤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열풍은 구이저우인에게 욕망을 선물했다. 도로도 나기 전에 너나없이 자동차를 사들이는 바람에 성도(省都) 구이양은 베이징 다음으로 자동차 구매 제한 도시가 됐다.
天·地·人 다 가난해도 욕망은 넘쳐난다

산을 개간해 자리 잡은 시장 천호 먀오족 마을. 구이저우에서 가장 큰 먀오족 마을로, 오늘날 구이저우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됐다.

쓰촨(四川)성 청두(成都)에서 구이저우(貴州)성 구이양(貴陽)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오후 5시에 출발, 다음 날 새벽 6시에 도착하는 밤기차였다. 저녁을 못 먹어 도시락 판매원이 지나가기를 기다렸지만 오지 않았다.
저녁 6시쯤 되자 승무원들이 도시락을 들고 지나다녔다. 한 여성 승무원에게 “도시락을 어디서 사요?”라고 묻자 뭔가 말을 했는데 중국어가 아닌 듯했다. 내가 멍하게 있으니 표준어로 말했다. “이건 승무원 도시락이에요.” 한 음절, 한 음절 힘주어 말하는 게 꼭 외국인이 구사하는 중국어처럼 들렸다. 가무잡잡한 피부와 뚜렷한 이목구비의 그녀는 구이저우 소수민족 출신일까. 구이양에 가는 사람은 구이저우 사람밖에 없다고 여겨 그곳 방언을 썼을까.



낙오자의 땅 ‘그레이저우’

天·地·人 다 가난해도 욕망은 넘쳐난다


구이저우성의 약칭은 ‘귀할 귀(貴)’자다. 그러나 이름과 달리 실제로는 아주 가난한 땅이다. 이곳에선 오히려 ‘모든 것이 귀하다’고 해야 할까. 구이저우엔 “하늘은 3일 맑은 날 없고, 땅은 3리 평탄한 곳이 없으며, 사람은 3푼 돈도 없다(天無三日晴,地無三里平,人無三分銀).” 천(天)·지(地)·인(人)이 모두 가난하다. 인구도, 면적도 보잘것없고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중국에서 가장 낮다. 오지를 좋아하는 서양 여행자들조차 흐린 날씨에 넌덜머리가 나는지 ‘구이저우(Guizhou)’ 대신 ‘그레이저우(Greyzhou, 잿빛의 주)’라고 한다.
광시(廣西)의 습한 공기가 구이저우의 아열대 고원에서 비와 구름으로 변해 이곳 날씨는 대체로 흐리다. 강수량은 많으나 땅속으로 사라지는 물이 많아 수리시설을 잘 갖추지 않으면 사용할 물이 풍족하지 않다. 무엇보다 평지가 3%밖에 안 된다. 농사짓기가 힘들다. 드넓게 펼쳐진 카르스트 지형은 자못 아름답지만 윈난(雲南)·광시의 명성에 밀려 관광객도 적다. 국경지대가 아니라 교역의 이점도 없다. 그래서 오랫동안 버려진 땅이었다. 소외된 땅은 소외된 이들의 안식처가 됐다. 한족에게 내몰린 이민족들, 주류에게 밀려난 낙오자들이 이 땅에 모였다.
구이저우는 중원의 당·송과 윈난의 남조·대리 사이에 끼인 땅으로 힘의 공백지대였다. 이 균형은 원나라가 등장하며 무너진다. 원나라는 남송과 대리를 정복하며 구이저우도 자연스럽게 흡수했다. 그러나 중앙집권세력이 있어 지배층만 교환하면 되는 윈난과 달리 구이저우엔 이렇다 할 중앙집권세력이 없었다. 정복하기는 쉬웠지만 관리하기는 까다로웠다. 원은 일단 지역 유지들에게 관직을 주고 중앙 조정으로 포섭하는 토사(土司) 제도를 실시한다.
원·명·청 700여 년에 걸쳐 구이저우는 중국에 소화된다. 토사 제도로 어느 정도 중앙집권화한 후 토착 세력인 토사를 중앙 조정에서 파견한 유관으로 바꿨다. 이를 개토귀류(改土歸流)라 한다. 친중국 토착세력을 통한 간접지배에서 직접통치로 전환한 것. 토사 지역과 중국 내지의 교류가 확대되면서 “한인(漢人)은 경계를 넘지 않고, 만인(蠻人)은 동굴 밖으로 나오지 않던” 지역에 한인이 대거 유입됐다. 개토귀류 전 구이저우에는 극소수의 한인만 있었으나, 교류가 확대되면서 결국 한인이 주류 거주민으로 변했다. 오늘날 3000만 구이저우 인구의 62%가 한족이다.



끈질긴 저항, 끝없는 반란

말은 간단해 보여도 통합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먼저 대규모의 주둔군이 배치됐다. 오늘날 구이저우에서 비교적 유명한 도시 중에는 군사도시로 출발한 곳이 많다. 후난과 윈난을 잇는 길목에 위치한 전위안(鎮遠), 칭옌구전(青岩古鎮), 안순(安順)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안순의 천룡둔보(天龍屯堡)는 명 태조 주원장이 파견한 30만 둔전병 가운데 현지에 눌러앉은 이들이 만든 마을이다. 툰바오인(屯堡人)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한족이기는 하지만, 600여 년이나 명나라의 말과 옷, 생활방식을 유지하는 바람에 현대 중국인과 큰 차이를 보인다. 그래서 툰바오인은 중국의 ‘57번째 민족’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강압적인 지배와 수탈에 항거하는 소수민족의 반란이 이어졌다. 큰 반란만 꼽아보자. 먀오족(苗族) 토사 양응룡의 반란은 임진왜란, 몽골족 보바이의 반란과 함께 명 만력제의 3대 전쟁(萬曆三大征)으로 꼽힌다. 건륭제가 갓 즉위한 1735년의 반란 진압 때 청 조정의 집계로 1만8000여 지방민이 학살되고, 1224개 마을이 불에 탔다. 1795년의 먀오족 대반란은 청의 상당한 전력을 소모시켰고, 연달아 일어난 백련교의 난 이후 청은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구이저우의 반란은 명·청 양대 제국의 쇠퇴기를 이끈 도화선이었다.
호락호락하지 않고 단결력이 높은 먀오족은 대중매체에서 곧잘 희화화된다. 영화 ‘쉬즈더원(非誠勿擾)’의 주인공 진분은 돈을 벌자 짝을 찾기 위해 연달아 인터넷 미팅을 한다. 그가 만나는 별의별 여자 중에서도 가장 희한하게 나오는 게 먀오족 여자다. 은장신구를 치렁치렁 단 전통의상을 입고 나와서 결혼하면 진분이 무조건 데릴사위로 자기 집에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집에 어떻게 가요?”
“일단 비행기로 쿤밍에 도착해서 버스로 24시간 거리인 몽자에 간 다음 다시 차를 바꿔 타고 병변까지 가요. 거기서 다시 하루 종일 경운기와 소가 끄는 수레를 타고 가면 집이에요.”
“혹시 살다가 사이가 안 좋아지면 이혼은 가능하겠죠?”
“오빠가 선생님 다리를 분질러놓고 말 거예요.”
코믹 영화라 악의 없이 만든 장면이겠지만, 먀오족이 낙후한 오지에 살고, 희한한 전통을 고집하며, 야만적이라는 전형적 이미지를 근거로 한 연출이다.
그러나 한족이 먀오족의 습속을 비웃는 건 부조리하다. 먀오족이 왜 오지에 살까. 한족에게 쫓겨났기 때문이다. 왜 은장신구를 주렁주렁 매달까. 한족이 침략할 때 쉽게 피난 가기 위해서다. 먀오족은 한족에게 밀려 계속 피난을 가야 했다. 피난 때마다 짐을 챙기기 힘들어 먀오족은 전 재산을 은장신구로 만들어 늘 걸치고 다녔다. 언제 어디서든 제 한 몸만 건사해서 피난 가면 되니까.

먀오족과 한족의 투쟁 역사는 장장 3000년에 달한다. 고대 신화에 따르면 중원의 황제(黃帝)는 동쪽의 치우(蚩尤)를 격파하고 천하의 패권을 차지한다. 중원의 한족이 동이(東夷) 세력을 몰아냈음을 의미한다. 치우가 죽으며 피를 단풍나무에 쏟아 매년 가을 단풍나무가 붉게 물들게 된 후 먀오족은 기나긴 이주의 역사를 시작한다. 동북쪽에서 정반대편인 서남쪽까지의 긴 여정, 황하와 장강을 건너고 숱한 산을 넘었다. 정착해서 살 만하면 한족들이 와서 다시 밀려나고, 또 이주해서 살 만하면 다시 밀려나는 삶이 반복됐다.



1/3
글 · 사진 김용한 | yonghankim789@gmail.com
목록 닫기

天·地·人 다 가난해도 욕망은 넘쳐난다

댓글 창 닫기

2018/11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