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호

“묻어두자, 기억하기도 싫다”

당시 수경사, 보안사 요원 인터뷰

  • 배수강 기자 | bsk@donga.com

    입력2016-02-15 10:2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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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충립 씨는 1971년 윤필용 감청사건은 1973년 이른바 ‘윤필용 사건’의 전초전이고, 1979년 10·26사태의 간접적 원인이 됐다고 분석한다. 이 사건으로 김재규 장군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원한을 품게 됐고, 이어 1973년 ‘윤필용 사건’으로 우수한 인재들이 군을 떠나면서 권력 주변에 공백이 생겼고, 그 자리를 김재규 비서실장이 차지하면서 박정희 시대가 막을 내리게 됐다는 것이다.
    군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보안사령관과 수경사령관 두 강자가 부딪친 1970년대 초반에는 보안사와 수경사의 위상이 엇비슷했고, 청와대 근위부대로 어느 쪽이 더 힘이 센지를 비교해보기 일쑤였다고 한다. 누군가 숙이지 않으면 힘겨루기가 진행되기 마련이었다. 윤필용 감청사건도 이 연장선에 있다. 1993년 9월 16일자 동아일보 5면 ‘군 어제와 오늘 보안사서 수경사령관 전화 도청 김재규 윤필용 감시 문제화’ 기사를 보면 당시의 급박한 상황이 김충립 씨의 묘사와 비슷하다.
    “(감청사건 발각) 사후에 이 사건을 연락받은 김형노 소령은 급히 헌병대로 갔다. 무엇보다도 녹음 테이프를 회수해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윤필용 수경사령관의 전화선에 도청장치를 붙여 녹음해온 테이프들. 그것을 들켰으니 정보활동능력을 재심사받아야 할 만한 실수였다. 뿐만 아니라 윤  수경사령관과 김재규 보안사령관의 파워게임에서 뇌관과도 같은 증거물이 될 게 틀림없었다. (…) 70년대 초는 그(김재규)가 박정희 권력에 대한 군부 내 도전세력을 감시하는 보안사령관으로 자리를 굳혔을 때였다. 그러다가 윤 사령관 도청사건이 터진 것이다. 힘겨루기도 무력동원이 아닌 바에야 머리싸움이다. 상대방에 꼬투리를 잡힌 쪽이 궁지로 몰리게 마련이다. 수경사 측에 도청물증을 잡힌 보안부대는 위기를 느꼈다. (…) 보안부대 장교들은 속으로 이런 무리수를 쓰는 보안사 본부가 야속했다.”



    45년 세월 흘러도 ‘스트레스’

    김충립 씨는 당시 감청작업을 수행한 현장 책임자로서 이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신동아’는 당시 두 강자의 힘겨루기 속에서 희생양이 된 보안사 김형노 소령과 어렵게 연락이 닿았지만 “그때 일은 묻어두자. 기억하고 싶지도 않고, 거기에 대해 얘기하고 싶지도 않다”는 답변을 들었다. 윤필용 수경사령관 비서실장 정봉화 소령은 연락이 닿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정 소령은 감청사건 이후인 1973년 ‘윤필용 사건’ 당시 김충립 씨가 직접 화곡동 자택에서 서빙고로 연행했다고 한다.  
    “당시 화곡동 자택에 차를 세워두고 정 소령을 기다렸다가 그를 앞자리 조수석에 앉혔다. 주변 사람들에게 정 소령이 연행당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다. 그는 상관(윤필용)을 깍듯이 모시는 참군인이었다. 윤필용 사건 자체가 모함이었으니 얼마나 억울할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다.”(김충립 씨)
    정봉화 씨는 윤필용 사건 이후 강제 예편됐고, 박태준 포스코 설립자가 작은 사업체를 마련해줘 지금까지 포항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형노 씨는 “현재 정봉화 씨는 교통사고와 수술 등으로 심신이 허약한 상태”라며 “감청사건을 다시 꺼내면 그에게 스트레스를 줄 수 있다”고 말했다.
    45년 전 감청사건은 지금까지도 수경사, 보안사 요원들에게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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