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호

명사 에세이

몸과 시간을 다루는 게임

  • 김미경 | 강사

    입력2016-02-15 10:3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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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애는 아무 생각이 없어요.” 10대 자녀를 둔 엄마들이 모이면 꼭 하는 얘기다. 중학생이나 된 녀석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꿈도 없고, 친구들과 게임에 빠져 있거나 잠만 잔다는 거다. 나도 사춘기 아이들을 키우면서 내 자식들의 뇌 구조가 궁금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나름대로 다 생각이 있다. 그러니까 친구들하고 붙어 있으면 밤새도록 떠들 수 있는 거다. 다만 엄마만큼 ‘빨리’ 생각하지 못할 뿐이다.
    정말 아무 생각 없어 보이던 내 큰딸도 고2 때부터 대학 걱정을 하더니 고3이 되자 전공과 직업을 연결시키며 제 인생을 그려갔다. 선진국에서는 그게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 과정이 10년 앞으로 당겨진다. 초등학생이 되면 부모 주도로 입시 공부가 시작되고 중학생이 되면 목표로 삼는 대학과 전공이 정해진다. 엄마들은 ‘우리 애가 이 정도는 가야 한다’는 커트라인을 세우고 거기에 맞는 계획과 스케줄을 짠다.
    가장 끔찍한 일은 아이들이 생각할 권리마저 뺏는 것이다. “너처럼 아무 생각 없는 애가 뭘 하겠니. 됐고, 이제 생각은 엄마가 할 테니까 넌 공부나 해!” 그때부터 아이들은 엄마가 정한 목표와 계획대로 움직인다. 부모는 실패 가능성을 최소화하며 최고의 효과를 낼 방법을 찾아내고 이를 실행하는 데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필요 없어 보이는 부분은 단축하고 성취와 관련된 부분을 집중 공략한다.
    나무 한 그루가 자라는 데도 사계절이 필요하듯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 나이 때 꼭 느껴야 할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 자부심과 후회의 경험들이 있다. 부모가 개입하면 아이는 그런 것을 온전히 느낄 기회를 잃는다. 스스로 육체를 써서 만드는 자연스러운 성취감도, 그 나이 때 겪어야 할 실패와 후회도 못 해보고 지나간다. 결과적으로 아이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건 ‘부당한 실패’뿐이다. 자신의 의지나 능력과 상관없이 부모가 정해준 높은 목표를 넘는 데 실패하는 것이다.
    부당한 실패는 몇 번을 해도 내 것이 될 수 없다. 무기력함과 억울함만 쌓인다. 성공했다 해도 온전히 내 힘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불안하고 힘들다. 20세만 되도 자신이 해낸 일 중에 진짜 내 것은 30%밖에 안 된다는 걸, 그 걸로는 못 먹고산다는 걸 안다. 그래서 10대 때 끝냈어야 할 방황을 서른이 넘어서 시작한다.
    반면 온전히 자신의 의지대로 즐겁게 시작한 일은 실패조차 값비싼 수업이 된다. 나는 그걸 막내아이를 보면서 수없이 확인한다. 5세 때부터 주방을 드나들며 요리에 관심을 보이던 막내는 12세인 지금 혼자서 과자와 케이크를 척척 구워낸다. 지난해부터 블로그에 올라온 레시피를 보고 무작정 따라 하더니 요즘은 제법 그럴싸하게 만든다.



    부당한 실패, 즐거운 실패

    그 정도 실력을 갖추기까지 얼마나 많이 실패했는지 모른다. 얼마 전에도 집에 생크림이 떨어지자 계란흰자로 거품을 내 생크림 대신 빵에 올렸다. 결과는 대실패. 맛은 둘째치고 흰자 거품이 꺼지면서 빵이 다 젖어버렸다. 그런데 그걸 본 막내의 말이 너무 웃겼다. “이렇게 될 것 같았는데 정말 이렇게 됐네. 생크림 대신 흰자를 쓰면 안 된다는 걸 확실히 알았으니 됐어. 오늘도 많이 배웠다!”
    실패에 기가 죽기는커녕 너무도 ‘쿨하게’ 정리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도대체 저런 기와 깡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막내는 프로들이 만든 제과점 케이크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다. “저거, 저렇게 만들면 안되는데…나라면 저렇게 안 해.” 그러고는 집에 가자마자 비슷한 케이크를 만들어낸다. 그때의 의기양양한 표정은 세계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파티셰 저리 가라다.
    그렇게 아이는 자신의 실패학교에서 배워가고 있다. 실패에서 성공으로 가는 모든 길목을 하나도 안 놓치고 지나간다. 몇 달 전 막내가 진지한 표정으로 진로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케이크를 전문적으로 배우기 위해 제빵학교에 가고 싶다는 것이다. 고민 끝에 나는 이렇게 말해줬다.
    “자, 제빵학교에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 너보다 30세 많은 사람이 나올 거야. 그 사람은 자기가 오랫동안 실패해서 알아낸 성공 레시피로 가르칠 거고, 너는 그대로 움직여야 돼. 그걸로 매일 평가받고, 못하면 야단맞을 거야. 그래도 괜찮겠어?”
    “그건 좀 그렇네, 나는 나만의 케이크를 만들고 싶은데.”
    “그래. 이미 넌 빵을 부풀리는 법도, 과자를 바삭하게 굽는 법도 혼자 알아냈잖아. 그렇게 너의 실패에서 배워 실력을 충분히 키운 뒤에 가도 늦지 않아. 그때는 배우러 가는 게 아니고 내가 알고 있는 게 맞나, 나는 어느 수준일까를 확인하러 가는 거지. 대신 집에서 얼마든지 연습해. 엄마가 밀가루랑 우유는 팍팍 지원해줄게.”
    아이는 엄마의 말뜻을 다 알아들었다. 꿈이 단단하게 크려면 기와 깡이 10년쯤 클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정규교육에서는 정해진 틀에 맞춰야 하니 기와 깡이 온전히 클 수 없다. 모든 직종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특히 내 몸 하나 믿고 가야 하는 전문직에선 그게 정말 중요하다. 실패학교에서 배워야 바닥부터 쌓아올린 자신감과 실력은 물론 확실한 차별화가 가능하다. 요즘 뜨는 셰프들이나 디자이너 같은 전문직 중에 비(非)제도권 출신이 오히려 독보적인 위치에 오른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학교는 실패학교다. 시험도, 야단치는 선생도, 정해진 시간표도 없는 학교. 그렇게 매일 자신의 실패학교에서 주눅 들지 않고 행복하게 기와 깡을 키워가는 막내의 10년 후가, 나는 정말 기대된다.



    2가지 기초자산

    모든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두 가지 기초자산을 받고 태어났다. 몸과 시간. 이 두 가지 가장 단순한 것으로 승부를 낼 수 있다면 인생에 그 어떤 복잡한 게 들어와도 이겨낼 수 있다. 그러나 사회가 발전할수록 우리는 이 두 가지와 멀리 떨어져 산다. 몸을 덜 쓰고 시간을 단축하는 일이 ‘고급진’ 것으로 대접받고, 거기에 돈을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꿈은 몸과 시간을 철저하게 다룰 줄 모르면 이길 수 없는 게임이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남의 육체에 깨알같이 저장된 실력과 경험까지 살 수 없다. 두 가지 심플한 재료만으로 승부를 보는 법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자신감도 생긴다.
    부모는 아이에게 가장 정직한 두 가지 재료, 몸과 시간만으로 뭔가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 몸과 시간을 다룰 줄 알면 자신을 지키는 힘도 커진다. 그걸 안 써본 사람은 쓸 줄 몰라서 자신을 지키는 힘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인위적인 힘이 가해질수록 더 빨리 숙성되고 빛날 거라고 믿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일은 생명을 키우는 일이다. 생명은 자연스럽게, 순리대로 성장할 때 가장 강하고 아름답다.





    김 미 경

    ●    1965년 충북 증평 출생
    ●    연세대 작곡과 졸업
    ●    現 더블유인사이츠 대표, 김미경의 이클래스 대표
    ●    저서 : ‘꿈이 있는 아내는 늙지 않는다’ ‘언니의 독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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