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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와 미술관

동부엔 MoMA 서부엔 MOCA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

  • 최정표 |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jpchoi@konkuk.ac.kr

동부엔 MoMA 서부엔 MO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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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 문화 퇴색하며 자금난

게펜 미술관은 그랜드 애비뉴 미술관을 건축하는 동안 1983년 가을부터 임시 전시장으로 사용되다가 정식 전시관으로 편입됐다. 리틀도쿄 입구에 자리한 이 미술관은 1940년대에 창고로 쓰던 건물로, MOCA가 1년에 1달러의 임차료를 내고 LA시로부터 빌려 사용하고 있다. 1996년 데이비드 게펜 재단(David Geffen Foundation)으로부터 500만 달러를 기부받은 것을 기념해 이름을 게펜 미술관으로 바꿨다. MOCA의 3개 미술관 중 규모가 가장 커 대규모 현대 작품을 전시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신인 작가의 최근작을 주로 전시한다. 퍼시픽 디자인센터는 2000년 개관했으며 디자인과 건축에 중점을 둔다.  
MOCA는 정부 지원을 거의 받지 않는 민간 미술관이다. 연간 2000만 달러의 예산이 소요되는데, 그중 80%가량을 기부금으로 충당한다. 미술관 이사들도 후원금을 낸다. 이사는 취임과 동시에 15만~25만 달러를 내고, 매년 7만5000달러의 회비를 낸다. 이사라는 명예에 대한 보답인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기부 문화는 점점 퇴색해가고 있다.
MOCA는 현재 자금난에 봉착해 있다. 정기적인 수입원이 없는 데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미술관이 소유한 주식 가치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미술관 측은 캘리포니아 주법(州法)에 위반되는 것을 알면서도 경영난 때문에 5000만 달러의 수익자산 중 4400만 달러를 써버렸다. 그리고 매년 300만 달러씩 적자가 나고 있다.
미술관은 최대 2400만 달러에 달하던 연간 예산을 2011년부터 1600만 달러로 축소해 긴축 운영을 시작했고, MOCA 설립을 주도한 LA 재벌 중 한 명인 브로드가 4500만 달러를 내놓아 운영난을 버텨내고 있다. 지난해 5월에는 유명 작가들이 MOCA를 돕기 위해 자기 작품을 소더비 경매에 내놓아 2250만 달러를 마련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러 개혁 작업에도 불구하고 미술관의 장래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최근에는 로스앤젤레스카운티 미술관(LACMA)과의 합병 얘기까지 나온다. 자본의 땅, 미국에서도 미술관 운영은 이렇듯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인기가 그리 많지 않은 최첨단 미술 작품만 다루는 현대미술관의 사정은 더 나쁠 수 있다.



‘낙서’와 ‘예술’

동시대 작품은 난해하다는 것이 주요 특징 중 하나다. 기상천외한 작품이 많다 보니 왜 이런 것이 그림이고 예술인지 받아들이기 곤란할 정도다. 아마 세월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우리는 이런 작품에 대한 검증과 평가를 재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세계 미술사의 걸작으로 인정받는 인상파 작품들도 당시에는 이단아로 취급받았으니까.
MOCA가 소장한 바스키아(Jean Michel Basquiat)의 ‘여섯 명의 공범(Six Crimee)’도 ‘낙서’라고 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이 그림은 LA의 영화제작자이자 현대미술품 컬렉터 스콧 스피겔이 1991년 MOCA에 기증한 여러 작품 중 하나다.
이 그림은 세 쪽의 패널이 연결돼 있다. 각 패널에 두 사람의 머리가 그려져 있다. 각 머리에 눈을 크게 그려 넣었는데, 작가와 친구들을 나타낸다고 한다. 바탕에는 옅은 초록색이 칠해졌고, 머리 아래에는 문자와 숫자가 적혔다. 여러 형태의 선들도 있다. 매우 어지럽지만 독특한 느낌을 준다. 그동안 아무도 이런 게 그림이라고 생각하지도, 그리지도 않았다. 이것을 그림으로 고안한 것이 바스키아의 독창성이다. 이러한 독창성이 바스키아를 유명 화가로 만들었다.
바스키아는 매우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아이티, 어머니는 푸에르토리코 출신으로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그는 거리를 방황하며 자랐다. 하지만 그는 조숙한 천재 흑인소년이었다. 열한 살 때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일찍부터 예술가적 소양을 보여 어머니가 아들의 재능을 키워주려고 많이 노력했다고 한다.
8세 때 길에서 놀다가 차에 치여 크게 다쳤고, 그해 부모가 이혼했다. 아버지와 살다가 푸에르토리코로 건너가 2년 살았고,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서는 가출해 공원 벤치에서 잠자다가 경찰에 잡혀가기도 했다. 고등학생 때 학교를 그만둬 아버지에게서 쫓겨났고, 길거리에서 티셔츠 등을 팔며 간신히 살아나갔다.
그는 열여섯 살 때부터 맨해튼 남쪽 지역에서 건물 벽에 스프레이로 낙서를 했다. 그것으로 새로운 예술 영역을 열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바스키아는 케이블TV 등에 출연하면서 점차 유명 인사가 돼갔다. 20세 때 독립영화에 출연했고, 앤디 워홀과도 친분을 쌓았다. 점차 뉴욕을 넘어 LA와 유럽에도 알려지면서 26세 때 뉴욕타임스 매거진에 소개되어 일약 유명 화가로 등극했다.
하지만 이후 마약에 빠져들었고, 대인관계도 나빠지다가 1987년 앤디 워홀이 사망한 뒤로는 더욱 고립된 처지가 됐다. 그리고 이듬해 28세의 나이에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마약 과용으로 숨지고 말았다.
4년 후 1992년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바스키아 회고전이 개최됐다. 이 전시는 이후 2년여에 걸쳐 미국 전역으로 이어졌다. 2005년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열린 그의 전시도 LA, 휴스턴 등으로 옮겨가며 2006년까지 계속됐다. 이제 바스키아 작품은 미술시장의 블루칩으로 떠올랐다. 2002년 이전까지는 그의 최고 작품 가격이 330만 달러였지만, 현재 최고가는 1460만 달러나 된다.
MOCA가 소장한 신표현주의(Neo expressionist) 작가 줄리안 슈나벨(Julian Schnabel)의 ‘Corine Near Armenia’라는 작품도 감상해볼 만하다. 여자를 그린 것은 틀림없지만, 그림을 전체적으로 해석하기가 쉽지 않다. 슈나벨은 바스키아와 더불어 미국 신표현주의를 주도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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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이 찍은 바스키아 사진(위)과 1984년 앤디 워홀과 함께 포즈를 취한 24세의 바스키아. 맨 오른쪽은 이탈리아 화가 프란체스코 클레멘테.

신표현주의 선두주자

슈나벨도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텍사스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고, 텍사스의 휴스턴 대학을 졸업했다. 그가 미술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28세인 1979년에 연 첫 개인전에서다. 이듬해에는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가했고, 1980년대 중반에는 미국 신표현주의 운동의 선두주자로 나섰다. 바스키아와도 친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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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이자 영화감독 줄리안 슈나벨. 뉴시스

슈나벨은 영화감독(filmmaker)이기도 하다. 사실 화가보다는 영화감독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바스키아가 죽은 지 7년이 지난 1996년 ‘바스키아’라는 제목의 전기 영화를 만들었다.
슈나벨의 작품은 전 세계 유명 미술관이 많이 소장하고 있다. MOCA뿐만 아니라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MoMA, 휘트니 미술관, 런던의 테이트 모던, 파리의 퐁피두 미술관 등에서 슈나벨 작품을 볼 수 있다.  
오늘날의 컨템퍼러리 미술 작품은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나면 고전 작품이 될 것이다. 그때쯤 MOCA는 어떤 위상을 가진 미술관이 돼 있을까. 지금의 자금난을 극복하고 미국 서부를 대표하는 전통 미술관이 될 수 있을지, MOCA의 앞날이 궁금하다.






동부엔 MoMA 서부엔 MOCA
최 정 표
●1953년 경남 하동 출생
● 미국 뉴욕주립대 박사(경제학)
● 공정거래위원회 비상임위원, 건국대 상경대학장
● 저서 : ‘경제민주화, 정치인에게 맡길 수 있을까’ ‘재벌들의 특별한 외도’ ‘한국재벌사연구’ ‘공정거래정책 허와 실’ ‘한국의 그림가격지수’ 등
● 現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경실련 공동대표




신동아 2016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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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표 |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jpchoi@konk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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