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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학살 증언한 청년은 시체 더미 속 꼬마”

戰犯 카라지치에게 40년형 선고 권오곤 前 국제유고전범재판소 상임재판관

  • 이혜민 기자 | behappy@donga.com

“학살 증언한 청년은 시체 더미 속 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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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열사와 ‘평화궁전’

▼증언을 듣거나 현장 검증을 다녀오면 고통스러울 것 같습니다.

“법정에서 들은 걸 실생활에 안 가져오고, 실생활을 법정에 안 가져오도록 노력하죠. 판사들이 그래서 법복을 입는다고 해요.”

▼2005년 ICTY 재판관 재선 이후 재선 소식 을 못 들었습니다.

“ICTY가 2010년 말이면 끝날 것으로 예상했기에 유엔에서 2009년 ‘굳이 1년 일할 재판부를 꾸리기 위해 선거를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ICTY 소장이 먼저 이를 유엔에 건의했고, 유엔 안보리 결의를 통해 기존 재판관들의 임기가 연장됐지요. 그런데 카라지치, 믈라디치 같은 핵심 전범들이 2008년에 잡혀 오면서 할 일이 늘어나 매년 결의를 통해 ICTY가 1년씩 연장됐습니다.”

▼ICTY 재판관 재임 중에 헌법재판소, 대법원 재판관 후보자로 거론되기도 했는데요.



“곧 임기가 끝날 것이라고 생각해 후보직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2006년의 일인데, 사법연수원 2년차 때 ‘야간방위’를 병행한 것이 문제 돼 결국 안 된 걸로 압니다. 도리어 잘됐죠. 그 덕에 ICTY 재판관으로서 전범 판결을 끝마칠 수 있었으니까요.”

▼야간방위?

“대학 동기들이 대개 사법시험을 1, 2번 보고 붙었는데, 저는 3번 도전해 됐어요. 그래서 판사가 빨리 되고 싶었지요. 법무관을 3년 하는 것보다 사법연수원 있을 때 야간방위(오후 6시~오전 8시)로 1년 2개월 근무하는 게 나을 것 같았습니다. 공무원이 겸직할 경우 기관장의 허락을 받아야 해서, 저도 연수원장의 허락을 받고 복무를 해 법적인 문제는 없습니다. 하지만 잘못된 선택이었어요. 많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도 판사 생활을 잘 하셨을 것 같은데, 나라 밖으로 시선을 돌린 이유가….

“아이가 셋인데, 당시 첫째가 대학에 갈 때인 데다 둘째가 그림을 그린다고 하니까 경제적으로 부담되라고요. 그전부터 국제재판소 근무를 선망했고, 국내보다 대우가 나아 도전했어요(ICTY 재판관은 유엔 사무차장급 대우를 받는다). 마침 네델란드 여행을 한 판사 후배가 ‘헤이그 이준 열사 기념관에서 일하는 한국인 할머니의 소원이 ICTY가 들어선 평화궁전에 한국인이 진출하는 걸 보는 것’이라는 얘기를 전해줬습니다. 이준 열사가 만국평화회의에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가셨는데, 만국평화회의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평화궁전에 한국인이 없다니 마음이 쓰였어요.”

▼ICTY 재판관이 된 뒤 한 나라의 대통령까지 지낸 인물을 법정에 세웠더군요.

“2001년 3월 유엔 선거를 통해 선출돼 11월에 ICTY에 부임했는데, 밀로셰비치가 그해 7월에 잡혀왔습니다. 그래서 세기의 재판을 할 수 있었죠. 그전에 ICTY가 밀로셰비치를 기소했지만 현직 대통령이라 사실상 전쟁을 치르지 않으면 구속할 수 없었는데, 새 정부가 들어선 뒤 전직 대통령을 인도해준 거죠.”

▼1980년대에 청와대에서 근무한 경력도 있던데요.

“늑대 피하려다 호랑이에게 잡힌 겁니다. 군대 3년을 피하려다 청와대에서 3년 근무했죠.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국회를 해산하고 국가보위입법회의라는 입법기구를 만들었습니다. 국회의 입법 기능을 싹 없애고 그 기구가 부처의 법안을 받아 법을 만들기 위해서였죠. 하지만 부처 이기주의에 따라 법이 만들어질 수 있으니까 청와대에서 그런 걸 최종적으로 체크하는 태스크포스팀(상부조직-법제위원회, 하부조직-법제연구반)을 만들고 법조인들을 부른 겁니다. 당시 저는 주로 법원과 관련한 입법 작업을 했습니다.”

▼청와대 생활은 어땠습니까.

“굉장한 모순 속에서 살았습니다. 1979년 9월에 판사 임용됐는데 1981년 11월에 거기로 불려간 겁니다. 저는 지금도 판사를 외부에 파견하는 데 반대합니다. 판사로서의 독립성, 진실성을 해칠 수 있거든요. 청와대 있을 때 ‘나는 판사이면서 판사가 아니다. 그럼에도 판사로서 지킬 건 지키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3년을 채울 무렵 유학을 이유로 법원 복귀를 요청했고, 복귀 후 하버드대 로스쿨로 유학 갔습니다.”



전두환과 일본 전범

▼ICTY 전범 재판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과거사 청산 문제가 떠올랐습니다.

“일례로 광주민주화운동 무력진압은 국제형사법상 ‘인도(人道)에 반한 죄’에 해당하기에 전두환 등 관련자들을 (국내 처벌 이전에)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세울 수 있었습니다. 시위 진압 목적도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민간인에게 본때를 보인다는 목적도 있었기 때문에 ‘광범위한 공격이 있었다’고 볼 수 있으니까요. 관련자들이 국내 재판을 받았기 때문에 일사부재리 원칙에 따라 이제는 국제형사재판소에 세울 수 없습니다. 당시 우리가 견문이 부족했다고 할까.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국제법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처벌을 모면한 2차 대전 중 일본 전범들도 법정에 세울 수 있을까요.

“그동안 전범재판은 전승국이 패전국에 전범재판을 강요하는 형식으로 운영됐습니다. 한편으로는 유엔 안보리가 재판소를 만드는 방법도 있죠. ICTY도 그렇게 만들어졌고요. 하지만 후자는 유엔 상임이사국 5개국 중 한 나라라도 반대하면 결의되지 않습니다. 가령 일본 전범재판소를 만들려고 해도 미국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불가능합니다. 국제사회에서 누군가를 처벌한다는 건 선택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힘 있는 나라에 밉보이는 나라를 재판하는 건데, 그럼에도 처벌하지 않은 것보다는 나으니까 국제 사회로서는 발전이라고 봅니다. 다행히 국제형사재판소(ICC)라는 상설 재판소가 생긴 뒤에는 가입 국가 내에서 인권침해가 발생하면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줄 수 없게 하는 근거가 마련됐습니다.”

▼국제 전범 재판을 더 할 의향은 없습니까.

“지금까지의 경험을 살려 강의를 하거나, 책을 쓰거나, 로펌에서 활용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갈 때만 해도 한국인이 아무도 없었지만 한국 대법원과 ICTY에 연구관 펠로(fellow)를 건의한 뒤 7년 동안 매년 1명의 재판관이 ICTY에 왔고, 그들이 현재 국제법연구모임 SHILA(Seoul, Hague, International Law Academy)도 꾸려가고 있습니다. 국제 재판소 현직에 계속 있고 싶지는 않아요. 이젠 후배들에게 기회를 줘야죠.” 





신동아 2016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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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민 기자 | behapp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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