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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에 길을 묻다 / 마지막회

하룻밤 술자리에도 영원한 ‘내 편’은 없다

외교는 ‘자주적 예술’이다 下

  • 김영수 | 사학자, 중국 史記 전문가

하룻밤 술자리에도 영원한 ‘내 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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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 외교에서 영원한 내 편은 없다.
  • 그래서 약자의 외교는 예술적 경지에 올라야 한다.
  • 스스로 주인이 돼 주도해야 한다.
  • 항우와 유방의 운명을 뒤바꾼 세기의 술자리 ‘홍문연(鴻門宴)’이 주는 교훈이다.
하룻밤 술자리에도 영원한 ‘내 편’은 없다

영화 ‘초한지-천하대전’은 오로지 홍문연만을 축으로 초한쟁패를 흥미롭게 다뤘다. 이렇듯 역사적 팩트는 무한한 상상력을 부추긴다.

세기의 술자리 ‘홍문연’의 주역은 항우와 유방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주객임엔 틀림없지만 주역은 아니었다. 1차적으로 이 술자리 전체를 연출한 사람은 항우의 최측근 범증이다. 유방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를 얻은 이상 놓칠 수 없는 일이었다. 항우도 범증의 계획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결정적 순간에 항우는 머뭇거렸고, 범증은 직접 항장에게 손을 쓰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뜻밖의 암초가 나타났으니 항우의 숙부 항백이었다. 유방의 참모 장량과 인연이 있던 항백은 이 음모를 유방 진영에 고자질했고, 항장의 검무(劍舞)에 맞서 유방을 보호하는 수호천사 노릇까지 자청했다. 위기를 느낀 장량도 번쾌를 불러들여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그 틈에 유방을 빼돌려 사지를 벗어났다.



홍문연의 X맨

홍문연의 전 과정을 꼼꼼히 살피면 이 술자리를 중국사의 명장면이자 세기의 드라마로 뒤바꾼 사람은 다름 아닌 항백임을 알 수 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X맨’ 그 자체였다.

홍문연과 관련해 유방 진영의 주역은 1차적으로 항백과 개인적 친분을 맺은 장량이지만, 술자리를 극적으로 마무리한 주역은 번쾌였다. 번쾌는 항우에 당당히 맞서 논리적으로 유방을 변호하고, 유방에게 서둘러 자리에서 빠져나가도록 재촉함으로써 결정적 역할을 했다.

여기서 좀 더 생각해볼 대목은 항백의 이적행위다. 항백은 그 중차대한 시점에서 어떻게 대놓고 항우와 범증을 ‘배반’할 수 있었을까. 2013년 개봉한 영화 ‘초한지-천하대전’에선 마치 항백이 천하 백성의 평화를 위해 이적행위를 한 것처럼 묘사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영화적 상상력에 불과할뿐더러 설득력도 떨어진다. 패권을 두고 사생결단을 벌이는 양 진영의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으로서 항백의 위상은 결코 만만치 않다. 그런 그가 유방을 죽이려는 항우에 맞서 그가 보는 앞에서 유방의 목숨을 지키려 칼을 뽑은 사실은 이적 행위이자 항명이다. 이는 죽음을 면키 어려운 행위이지만 항백은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항우의 반응과 태도도 의문이다. 범증의 각본대로 움직였다면 천하대권의 주인은 일찌감치 자신으로 낙착됐을 것이고, ‘초한쟁패’니 ‘패왕별희’니 하는 드라마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항우는 유방을 변호하는 항백의 말에 마음이 흔들렸고, 유방의 변명에 대해선 자신에게 사람을 보내 유방이 관중의 왕이 되려 한다고 알린 유방의 좌사마 조무상을 핑계 대며 얼버무렸다. 또한 항장의 검무에 맞춰 유방을 죽이라는 신호를 보내달라는 범증의 눈짓을 3번이나 무시했다. 이어 번쾌의 항의에 맥없이 술만 권했고, 유방이 줄행랑을 치며 남긴 선물인 벽옥을 고이 받음으로써 거창하게 시작된 연회를 싱겁게 끝내고 말았다.

홍문연은 이렇게 유방의 기사회생으로 마무리됐고, 이후 천하는 초한쟁패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유방으로서는 정말 다 죽었다가 살아난 셈이다. 사지인 줄 알면서도 갈 수밖에 없었던 술자리를 단 한 사람의 희생도 없이 빠져나왔으니 말이다. 유방은 승리할 확률이 ‘제로’에 가까운 항우와의 전투를 피했을 뿐 아니라 사지에서 살아나왔다. 그뿐만 아니라 함양성에 먼저 입성해 진나라 백성의 인심까지 얻었으니 이런 남는 장사가 어디 있겠는가.



조직보다 의리

하룻밤 술자리에도 영원한 ‘내 편’은 없다

홍문연의 검무 장면을 조각한 조형물. 가운데가 항우다.

홍문연은 항우의 처절한 실패작이었다. 아니, 그보다는 연출가 범증의 실패작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범증은 항우와 멀어졌고 결국 항우를 떠났다. 범증을 잃은 항우는 급전직하 주도권을 잃은 것은 물론 천하의 패권마저 유방에게 넘겨줘야 했다. 이런 점에서 홍문연은 천하대권의 향방을 바꾼 결정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어쨌거나 유방을 사지에서 구한 주인공은 항우 진영의 항백이다. 따라서 항백의 이해 못할 행위를 먼저 분석하고, 이어 기타 인물들의 당시 행위를  따져본 다음 이 세기의 장면을 마무리할 필요가 있겠다.

홍문연은 항우가 유방을 살려줬기에 패한 것이 아니라 뒤이어 벌어질 일련의 실패, 그 실마리를 확인할 수 있는 자리란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역사의 명장면은 결말보다는 그 결말의 한 자락을 슬며시 들여다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는 이런 장면이 아닐까.

항백은 유방을 제거하려는 범증과 항우의 계획을 유방 측에 고자질했고, 홍문연에선 유방을 찌르려는 항장의 검무에 맞서 유방을 보호했다. 항백의 유방 사랑은 이걸로 끝이 아니다. 그 뒤 유방의 가족이 항우에게 포로로 잡히고, 항우가 유방의 아버지 태공을 끓는 물에 삶아 죽이겠다며 유방을 협박할 때도 태공을 죽이지 말 것을 권했다. 대체 항백은 왜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유방을 보호했을까.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항백은 유방이 아니라 장량을 보호한 것이다. 항백은 과거 살인자 신분으로 수배당했을 때 장량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 항백에겐 이런 사사로운 은원(恩怨)관계가 조직의 이익보다 중요했다. 이것이 이른바 지은필보(知恩必報)의 ‘협의(俠義)’정신이라는 것이다. 전국시대를 풍미한 유협(遊俠)들의 의리와 정신적 유산이 항백은 물론 당시 사람들에게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항우가 항백의 건의에 흔들린 것이나, 일을 그르치고도 항백을 문책하지 않은 건 그런 전통적 의식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어린애’의 ‘婦人之心’

하지만 협의정신의 유풍이 항우의 결단을 가로막았다고 해서 항우의 모든 행위가 납득되는 건 아니다. 대세를 중시해야 하는 리더로서 항우의 판단과 결정은 항백의 그것과는 엄연히 달라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항우는 유방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항우의 행동엔 유방을 인정하지 않고 깔보는 오만한 심리가 작용했다. 그래서 유방의 사죄를 그냥 받아들였다. ‘네까짓 것이 그러면 그렇지’ 하고는 그냥 넘어간 것이다. 그러면서 조무상을 핑계 댄 것은 그 절정이다.

항우의 이런 오만함엔 그의 기질이 함께 작동했다. 훗날 한신은 유방 앞에서 항우를 평가하며 항우의 마음 씀씀이를 ‘부인지심(婦人之心)’이라고 표현했다. 사람을 아끼고 존중하는 것 같지만, 실은 ‘여자의 마음’ 같아서 중요한 순간에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는 의미다.  

항우의 이런 우유부단함을 놓고 그의 최측근인 범증이 항우를 ‘어린애’로 표현한 점도 눈길을 끈다. 그러면서 범증은 유방을 ‘패공(沛公)’이라고 높여 불렀다. 범증은 둘의 운명을 ‘어린애’와 ‘패공’이란 호칭의 차이로 예견한 셈이다. 범증이 이보다 앞서 함양성 입성 이후 유방의 태도에 대해 정확하고 예리한 분석을 내놓으면서 유방을 제거하라고 한 것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전세가 역전될 수 있음을 통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항우는 노회한 범증의 분석을 수용하지 못했다. 항백의 권유를 물리치지 못한 이면엔 범증의 수를 읽지 못한 항우의 자질 부족과 소심함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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