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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자로 본 중국 산시성

長安의 봄이여 秦의 영광이여

陕 - 중국을 세상에 알리다

  • 글 · 사진 김용한 | yonghankim789@gmail.com

長安의 봄이여 秦의 영광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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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일을 ‘장안의 화제’라 한다. 여기서 ‘장안’은 산시성 시안의 옛 이름이다. 산시성은 중국 초기 통일왕조 주, 진, 한, 당나라가 근거지로 삼은 땅이다. 당나라 때 시안은 외국의 인재도 흔쾌히 등용하며 개방과 자유로움의 정신을 구현했다. 오늘날 옛 영광을 다시 찾으려는 시안은 ‘산시 속도, 시안 효율’을 내세우며 달린다.
長安의 봄이여 秦의 영광이여

자은사 대안탑에서 내려다본 시안.

‘주·진·한·당(周秦漢唐)’

큰 글자 몇 개가 셴양(咸陽) 국제공항에서 시안(西安)으로 가는 도로변에 위풍당당한 비석처럼 줄지어 서 있다. 셴양에서 시안으로 가는 길은 곧 진(秦)의 수도 함양에서 당(唐)의 수도 장안으로 가는 길이다. 중국 초기 통일왕조는 모두 이 땅을 근거로 삼았다. 중화의 인문학을 태동시킨 주나라, 최초의 통일제국 진나라, 대통합을 통해 한족 문화를 만든 한나라, 세계로 열린 대제국 당나라. 마오쩌둥 역시 이 땅을 근거지 삼아 끝내 장제스를 물리치고 신중국을 세웠다. 산시성은 혁신의 바람을 일으키며 천하를 제패한 땅이다.



商周革命=人文革命

長安의 봄이여 秦의 영광이여
산시(陝西)성의 약칭은 ‘땅 이름 섬(陕, 번체는 陝)’자다. ‘陜’자는 ‘언덕과 언덕(阜/阝) 사이에 끼어(夾) 있는 골짜기가 좁다’는 뜻으로 ‘좁다/골짜기 협’으로 쓰기도 한다. 지도를 살펴보면 그 뜻대로 산시성이 골짜기 사이에 끼인 분지임을 알 수 있다.

산시(陝西)는 허난성 산현(陕县)의 서쪽으로, 여기서부터 지형이 크게 달라진다. 허난성이 황토평원이라면 산시성은 황토고원이다. 산시의 동쪽으로는 진진대협곡(秦晉大峽谷), 남쪽으로는 북중국과 남중국을 가르는 진령산맥이 펼쳐진다. 그 사이에 놓인 관중평원(關中平原)은 3만9000㎢(한국의 약 39%)의 면적에 황하 최대의 지류인 위수(渭水)가 흘러 농사가 잘된다.

유목민족인 북적(北狄)과 서융(西戎)으로부터는 중요 전략자원인 말을 얻을 수 있다. 동쪽의 함곡관만 막으면 산시는 철벽의 요새다. 약할 때는 굳게 방어하고 관중에서 착실히 힘을 키우다가, 강할 때는 불시에 밖으로 치고 나왔다. 산시에서 팽팽하게 압축된 공기는 함곡관 밖으로 빠져나가자마자 태풍이 되어 중원을 삼키고 대륙을 휩쓸었다. 주·진·한·당은 산시에서 일어나 천하를 호령했다. 18로 제후군에게 몰린 동탁이 재기한 곳도, 8개국 연합군을 피해 서태후가 달아난 곳도 산시다.

산시의 중원 공략사를 살펴보자. 중원의 상나라는 강한 국력과 높은 문화 수준을 갖췄지만 시대의 한계 역시 컸다.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노예를 확보했고, 상제(上帝)를 기쁘게 하기 위해 숱한 사람을 제물로 바쳤다. 그 결과 주위를 온통 적으로 만들었다. 주나라는 주변 세력을 규합하고 목야대전 한 판의 싸움으로 강대한 상나라를 물리친다.

주는 ‘덕이 있는 자만이 하늘의 보살핌을 받는다’는 천명(天命) 사상을 내세우고 무력 지배보다는 덕치와 교화를 중요시했다. 상은 우연히 불에 갈라지는 흔적으로 길흉을 점치는 갑골점(甲骨占)을 애용했고 사람을 죽여서까지 하늘을 기쁘게 하려 했지만, 주는 64가지 상황 속에서 최선의 길을 찾는 주역(周易)을 썼고, “조상을 믿지 말고 스스로의 덕을 닦으라”는 노래를 시경에 남겼다. 이 같은 합리성, 인본주의, 덕치교화의 사상은 공자의 유가에 의해 더욱 발전한다. 이처럼 상주혁명(商周革命)은 단순한 왕조교체를 넘어선 인문혁명이었다.



秦, ‘근간’을 세우다

그러나 무왕·주공 등 사려 깊은 창립멤버가 세상을 뜨자, 못난 후손들은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원정전쟁으로 국력을 낭비했다. 중원이 약해지자 변방이 나래를 폈다. 산시·간수 일대의 융(戎)은 이름 그대로 ‘갑옷(甲)과 창(戈)’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전사였다. 유왕 때 융족이 주의 수도 호경(오늘의 시안)을 함락해 주가 낙양으로 천도하자, 서주(西周) 시대가 끝나고 동주(東周) 시대가 시작됐다. 동주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지방정권이 난립한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했으니, 당시를 그린 소설이 바로 ‘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다.

융족이라고 다 같은 융족은 아니다. 주에 협력적이던 융족 일파는 목축 전문가로 인정받아 지역 정권인 진을 세웠다. 주가 망할 때 진의 지도자는 왕실을 호위한 공로로 진나라 최초의 제후인 진양공(秦襄公)으로 봉해져 융족으로부터 주의 서쪽을 지키는 울타리가 됐다. 일찍부터 찬란한 발전을 이룬 중원은 진을 오랑캐로 여겨 ‘진융(秦戎)’이라 불렀다.

그러나 진나라는 역설적으로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과감하게 혁신할 수 있었고, 중원에서 잉여 취급받던 인재들을 재상으로 삼았다. 25명의 진나라 재상 중 외국 출신이 17명, 평민 출신이 9명이었다. 상앙의 변법개혁, 장의의 연횡책, 범저의 원교근공(遠交近攻)에 진시황의 웅대한 비전과 추진력이 더해져 전국칠웅 중 가장 낙후국이던 진은 6국을 멸망시키고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한다.

진의 천하통일은 중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다. 황하 중류에 국한된 중국은 진부터 비로소 광활한 대륙 전역에 세력이 미쳤다. 엄청난 변화를 가혹하게 밀어붙인 탓에 진 자체는 오래가지 못했지만, 이때 진이 창조한 질서는 중국 역대 왕조의 근간이 됐다. 사마천은 말한다. “배운 자들은 자기들이 보고 들은 것에만 얽매여 진의 통치기간이 짧은 것만 보고 진을 조롱할 줄만 알았지 진지하게 그 처음과 끝을 살피지도 않으니, 이야말로 귀로 음식을 먹으려는 격이다.”

잔인했지만 근면성실한 군주 진시황이 죽자마자 진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왕후장상에 씨가 있더냐”라고 외친 진승·오광의 뒤를 항우·유방이 이어 진은 멸망한다. 패권을 차지한 항우는 함양을 버리고 고향인 강남과 가까운 팽성(장쑤성 쉬저우)을 근거지로 택했다. 신하 한생은 철벽 요새인 데다 관중평원에서 인력과 자원을 풍부하게 조달할 수 있는 산시를 근거지로 택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항우는 “성공하더라도 고향에 돌아가지 않으면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걷는 것과 같다(錦衣夜行)”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한생은 사리분별을 못하는 항우를 “모자 쓴 원숭이”라고 비웃다가 끓는 물솥에 삶겨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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