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김충립 前 수경사 보안반장 육필수기 ‘음모와 암투’

‘청와대 부통령님’께 받들어 총!

오만한 ‘경호실 권력’과 정치군인들

  • 김충립 | 前 수경사 보안반장 kimchoonglib@naver.com

‘청와대 부통령님’께 받들어 총!

1/4
  • ● 차지철, 친위대 구축하며 2인자 행세
  • ● 황영시 군단장, 부하 전두환 와야 회식 시작
  • ● 대대장 월북사건으로 보안사 위태…全, 권력 핵심에
  • ● 車, 10·26 일주일 전 김재규 ‘안일한 대응’ 면박
  • ● 삶 포기한 김재규, 변호인 만나고 “민주화 영웅” 주장
‘청와대 부통령님’께 받들어 총!

1976년 박정희 대통령이 차지철 경호실장(오른쪽 끝) 전두환 작전차장보(오른쪽 두 번째) 등 경호팀과 기념촬영을 했다. [동아일보]

‘윤필용 장군 쿠데타 음모사건’ (1973년 3월)의 최대 수혜자는 전두환 장군이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얘기다. 윤필용 사건 이후 청와대 권력지형에 변화가 왔고, 그것이 전두환에게 이어졌다. 전두환은 1976년 3월 제1공수여단장을 마치고 바로 차지철 경호실장에게 발탁돼 경호실 작전차장보에 임명된 후, 1977년 소장으로 진급하고 1978년 1월 제1사단장에 부임한다. 그리고 1년 2개월 만인 1979년 3월 국군보안사령관으로 발탁된다. 이어 10·26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중심으로 한 ‘음모와 암투’의 중심에 선다.

윤필용 사건 당시 청와대 핵심 권력자들은 대통령비서실장 김정렴, 경호실장 박종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 보안사령관 강창성 장군 등이었다. 사건 이후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 후임에는 진종채 장군, 강창성 보안사령관 후임에는 김종환 장군이 보직됐다. 그해 12월에는 김대중(DJ) 납치 사건으로 이후락 중정부장이 해임되고, 검사 출신 신직수 부장이 임명됐다. 다음 해인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행사에서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에게 피격돼 서거하면서 박종규는 물러나고 5·16 혁명에 가담한 공수부대 출신 차지철 의원이 경호실장에 보직된다. 1975년은 윤필용·손영길 장군 등이 안양교도소에서 형집행정지로 출감하는 등 조용하게 흘러갔다.

그러나 1976년 신직수 중정부장이 해임되고, 후임에 김재규 부장이 보직되자 청와대 주변 정보·보안 분야 권력자들 중 대통령을 수시로 면담하고 보고할 수 있는 ‘문고리 권력’ 서열이 바뀌게 된다. 당시 일반적으로 알려진 문고리 권력은 1위 비서실장, 2위 중앙정보부장, 3위 경호실장, 4위 보안사령관 순이었다. 그런데 1974년 차지철이 경호실장이 되면서 이런 구도가 바뀌고, 서열 3위 경호실장이 1위로 올라섰다.



 一人之下 萬人之上

이런 변화는 청와대 공식 행사에서 확연하게 드러났다. 1위 김정렴은 대통령의 오른쪽 상위 자리를 차지철에게 내주고, 자신은 2위 자리인 대통령 왼쪽 자리에 앉게 된다. 차량으로 수행할 경우 대통령 차량 바로 뒤를 경호실장 차량이 수행했다. 이런 ‘서열 변화’는 김정렴이 차지철에게 양보하는 가운데 오랜 시간에 걸쳐 자연스럽게 이뤄졌고, 김재규가 부임하기 전 서열 2위였던 신직수도 비교적 너그러운 마음으로 마찰 없이 무난하게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김재규는 달랐다. 1976년 신직수 후임으로 중정부장에 임명된 김재규는 박 대통령과 자신이 육사 2기 동기생이자 동향(경북 선산)이라는 각별한 관계를 내세워 차지철과 충성경쟁을 시작했다. 김정렴 비서실장이 서열 1위를 지켜야 하고, 자신은 공식 서열 2위라고 주장하면서 차지철이 서열을 무시하고 대통령과의 면담을 통제하려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갈등은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차지철은 조선시대의 영의정을 자처했다. 청와대 내에서 대통령 다음 ‘2인자’로서 권력을 장악하고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이루려 했다. 김재규도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을 꿈꿨다. 차지철 못지않은 권력욕과 명예욕으로 들끓었다. 둘의 마찰음은 세월이 흐를수록 격화한다.

김재규의 ‘2인자 욕망’은 그가 1971년 윤필용 장군 제거를 위한 감청사건(신동아 2월호 140~153쪽 참조)을 일으켰을 때부터 드러났다. 그는 자신보다 앞서가는 윤필용 장군을 제거하려다 발각돼 보안사령관직에서 해임되고 3군단장으로 좌천된 후 권력에서 밀려나는 쓰라림을 맛봤다. 박 대통령에 대한 분노와 반감을 가슴에 품었다. 그러나 중정부장이 되고 나서는 박 대통령이 명실 공히 자타가 인정하는 2인자 자리에 자신을 재기용했다고 확신했다. 그러니 여덟 살 어린 차지철에게 밀리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신경전이 지속되던 중, 1978년 비서실장에 중정부장 출신 김계원이 들어서자 김재규의 입지는 차지철에 비해 더 좁아지게 된다. 비서실장으로서 김계원의 권위는 김정렴 때보다 더 약해졌다. 4선(選)의 국회의원과 3개 상임위원장 경력을 가진 차지철의 정치 분야 정보보고는 김재규의 정보보다 더 정확한 고급 정보였다. 가장 중요한 정치 정보보고 업무를 차지철에게 빼앗길 형편이었다.

필자는 1976년 건설부 장관이던 김재규가 중정부장에 임명되는 것을 보고, 만약 1973년 윤필용 장군 모함 사건이 없었더라면 윤필용·손영길 장군과 권익현·정동철 대령 등 인재들이 제거되지 않았을 것이고, 윤필용 제거 음모를 시도한 김재규도 중정부장 자리에 기용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불행하고 치욕적인 10·26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도 충격과 슬픔 속에 비슷한 생각을 했다.



죽음의 지옥훈련

‘청와대 부통령님’께 받들어 총!

1976년 김재규 당시 건설부 장관(왼쪽에서 두 번째)이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오른쪽) 과 함께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를 듣고 있다. [동아일보]

전두환과 차지철의 인연은 1951년 육사 입학시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두환은 초등학교를 거쳐 5년제 대구공고를 졸업한 뒤, 6·25전쟁이 발발하자 1951년 9월 육사 입학시험에 응시했다. 1차 합격자 명단에는 없었지만 예비후보로 합격하고 1955년에 육사 11기로 임관했다. 차지철은 서울 용산고를 졸업하고 육사에 응시했지만 불합격하자 간부 후보생 과정을 거쳐 1953년 장교로 임관한다. 따라서 차지철은 전두환보다 2년 앞서 장교로 임관돼 군에서는 선배이고 나이는 세 살 어렸다.

육사에 입학한 전두환 생도는 숙소에서 소등 후 등잔불을 밝히고 공부해도 성적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우수 생도가 하는 소대장 생도를 한 번도 해 보지 못했고, 군번이 낮아 열등의식을 갖고 있었다. 당시엔 학업 우수 생도에게 빠른 군번을 줬다. 임관 후에는 선두 주자가 되겠다는 포부를 지녔던 전두환은 1958년 육사 동기들, 그리고 13기 최세창과 함께 새로 창설하는 공수단에 지원한다. 이때 차지철 대위와 만나 인연을 맺게 된다.


1/4
김충립 | 前 수경사 보안반장 kimchoonglib@naver.com

관련기사

목록 닫기

‘청와대 부통령님’께 받들어 총!

댓글 창 닫기

2018/12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