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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이순자, 30년 침묵을 깨다!

“광주 가서 돌 맞더라도 분 풀린다면…”

  • 배수강 기자 | bsk@donga.com, 이혜민 기자 | behappy@donga.com

전두환·이순자, 30년 침묵을 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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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 이름 다 적어와 기도”

전두환·이순자, 30년 침묵을 깨다!

대한불교천태종 운덕대종사와 전두환 전 대통령. [조영철 기자]

고명승 스님께서는 사명감을 갖고 대한민국의 여러 가지 문제를 풀려고 하십니다. 이 문제(동서화합, 남북통일)도 국민적 차원에서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운덕 “동서화합 문제는 5·18로 인해 전라도 분들과 얽혀 있는데, 그걸 제대로 풀려면, 전 대통령께서 확 풀면 쉽게 풀리는 건데….”

전두환 “그걸 내가 풀 수 있을까요?”

전 전 대통령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목을 빼면서 진짜 궁금하다는 듯 되물었다. 기자들이 건넨 명함을 담배 말듯 돌돌 말아 이마에 가져다 대고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운덕 “그럼요.”



전두환· 이순자  “아, 그래요?”

김충립 “이 문제를 풀려고 정호용, 고명승, 고(故) 이학봉 장군 등 5공 인사들을 만나왔는데 잘 안됐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대종사께서 뜻을 같이하셨고, 5·18 단체 관계자들과도 어제 광주에서 회합을 하고 올라왔습니다.”

김 목사는 5공 인사와 5·18 단체 관계자들이 인사하고 회의하는 사진을 보여주며 “전 전 대통령이 5·18에 대해 총체적으로 잘못을 시인하고 희생자와 가족들에게 유감을 표하면 5·18 단체 인사들이 5공 인사들과 화해할 수 있다는 뜻을 표명했다”고 전했다.

이순자 “저희 각하께서는 광주민주화운동 때 희생된 시민들, 그리고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명령에 의해 치안을 유지하러 갔다가 희생된 계엄군 모두 희생자라고 생각하세요. 우리가 불교 신자도 아니었는데, ‘정치 바람’으로 외국에 망명하느니 이 땅에서 죽겠다며 (1988년 11월) 백담사로 가서 2년 넘게 고생했잖아요. 그래도 일국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 백담사 가서 그냥 고생한 것으로 끝나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거기서 2년 넘게 기도를 했습니다.”

기자 “어떤 기도를 했습니까.”

이순자 “광주 망월동에 사람을 보내 5·18 희생자 이름을 다 적어왔고, 육군본부에 가서 희생된 장병 이름도 모두 찾아와 영가천도 기도를 드렸어요. 그렇게 기도를 했는데도 아직 원한이 덜 풀린 거 같아요. 그때 기도드리던 사진이 여기 제 회고록 (원고)에 나와 있는데…여기 있네요. 기도 발원문하고.”



“계속 보복이었지”

전두환·이순자, 30년 침묵을 깨다!

이순자 여사가 기자에게 건넨 회고록 일부와 5·18에 관한 심정을 밝힌 글.

이 여사는 A4 용지 2장을 기자에게 건넸다. ‘5·18 희생자들을 위한 백일기도를 드린다’는 당시 신문 기사와 함께 ‘1996년 8월 옥(獄) 밖에서 함께한 5·18 희생자를 위한 영가천도기도’라는 제목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이순자 “부처님은 모든 게 인연이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모든 게 업이 덜 끝나서 그렇다고 생각해요.”

이 여사는 목이 멘 듯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1노3김(노태우·김영삼·김대중·김종필)이 회동해서 ‘5공은 (백담사 생활) 그만하고 서울 와서 살라’고 해서 서울에 왔는데, 느닷없이, 새로 무슨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옛날 사건을 다시 재판해서 (전 전 대통령을) 교도소에 보내 2년 넘게 교도소 생활을 했거든요. 이건 따지고 보면 머리에다….”

‘1노3김 회동’은 1989년 12월 15일 4당 총재가 모여 보름 뒤 전 전 대통령을 광주청문회 증언대에 세워 특위 활동을 매듭짓기로 한 자리를 의미하는 듯하다.  

전두환 “계속 보복이었지, 보복”.

이순자 “머리에 포대기 씌워놓고 이 사람 저 사람 지나가면서 돌 던지고 발로 차고 때리고 하는 것보다 더한 형벌을 받았습니다. 사실 사람을 죽였다고 쳐도 ‘가혹한’ 형벌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럼에도 우리는 한 번도 변명 안했어요.”

기자 “전 전 대통령의 생각도 같습니까.”

이순자 “저는 각하의 대변인이 아니고, 각하하고 백담사도 가고 그러다 보니 ‘각하의 분신’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생각하는 거와 각하가 생각하는 거는 같아요.” 

기자 “왜 변명을 안 했습니까.”

이순자 “우리는 처음으로 권력에서 두 발로 걸어 나온 사람들이고, 우리가 받는 이것(고통)까지도 민주화로 가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묵묵히 받았습니다. 청와대 나오실 때 (전 전 대통령은) 58살이었어요. 은퇴하기 너무 이른 나이죠. 대통령이 임기 마치면 퇴임하고, 국민이 (대통령을) 바꾸고 싶으면 바꾸고 해야 민주화 아닌가요? 그걸 각하가 했잖아요. 58살에 (청와대에서) 나와 30년간 인생의 황금기에 당했어도, 우리는 그런 역할을 했다고 자부하기에 누구도 원망하지 않아요. 우리가 백담사에서 2년간 불경을 읽으면서, 각하가 교도소에 계실 때도 ‘얽힌 업을 각자 있는 곳에서 풀자’고 했어요. 백담사 2.5평, 독방 3.5평에서.”

전두환 “백담사는 형무소 같아서…조그만 방이 있거든요. 그만해요, 이건 업보야 업보.”

이순자 “각하 교도소 계시는 동안 저는 중앙승가대가 있는 개운사(서울 안암동 소재)에서 500여 명을 위한 100일 천도기도를 드리고 49재를 세 번 했습니다. 앞서 김천에 있는 수도암에서도, 중국의 지장보살 모셔놓은 절에서도 희생자 명단을 가지고서 기도드렸어요.

그래서 저는 영가(靈駕, 불교에서 말하는 영혼)들은 천도(薦度, 죽은 사람의 넋이 정토나 천상에 나도록 기원함)됐다는 마음의 확신이 오더라고요. 정말 마음을 다해 기도했어요.”

운덕대종사는 “잘하셨다”고 말한 뒤 고개를 한참 끄덕였다.



거꾸로 쓰는 일기장

기자 “건네주신 자료에 기도 사진과 기사가 있는데, 회고록의 일부인 것 같네요. 최근 전 전 대통령 회고록이 출간된다는 소식이 보도됐는데요. 회고록에 5·18 발포명령과 관련된 내용도 담겼습니까.” 

이순자 “한두 번도 아니고…엉터리(보도)가 많아. (회고록을) 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전두환 “내보낼 것도 없고, (5·18과 관련해서) 건드리지도 않았어. 그건 (누군가가) 띄우는 거야.”

이순자 “제 회고록은 거의 다 됐어요. (전 전 대통령이 우리 나이로) 86세인데, 이제는 두 노인네 건강 관리하면서 자손들한테 애 안 먹이고 살다 갈 일 생각할 나이인데, 이것(회고록)으로 우리가 정치나 명예회복을 할 생각은 전혀 없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명예에 대한 집착도 없고요. 한때를 책임졌던 사람으로서 저희 이름을 건 기록은 남길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준비한 겁니다.”

기자
“두 분의 회고록이 각각 출간됩니까. 어떤 내용이 담겼나요.

전두환 “이 양반(이순자 여사)이 먼저 하고 있고, 난 준비도 안 하고 있어.”

이순자 “대통령 부인으로서, 평범한 여자로서, 남편이 대통령 되는 바람에 겪은 이야기를 무겁지 않게 쓰고 있어요. (우리에 대한) 오해가 많은 것도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인 것 같아 국민과 청와대의 거리가 가까워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썼어요.”

기자 “회고록을 쓰기 위해 컴퓨터를 배우신 건가요.”

이순자 “처음에는 스프링 노트에 쓰다가 양이 많아지니까 컴퓨터로 해야겠더라고요. 제 회고록은 대필자 몇 번 만나 자료 보고 쓴 게 아니에요. ‘말 많고 탈 많은 시기’에 대한 이야기이고, 형식도 모르지만 ‘거꾸로 쓰는 일기책’처럼 썼어요. 그러니 명예회복 차원도 아니고요.”

전두환 “(이 여사를 가리키며) 컴퓨터 잘해. 난 하나도 못하고. 이 양반, 직접 쓰고 있어.”

기자 “5·18이나 최규하 전 대통령의 사임과 관련한 내용도 있습니까.”

이순자 “광주사태 책임이 있고 없고를 떠나, 각하는 광주사태 나고 3개월 후에 대통령이 되셨다는 그 업보 때문에 ‘광주사태 학살자’라는 누명을 쓰고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요즘은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부르죠).”

전두환 “사실 광주사태하고 나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이순자 “5·18 재판에서 ‘광주에서 발포 명령자는 없었다’고 분명하게 결과가 나와 그나마 학살자라는 누명은 벗었어요. (5·18 당시) 보안사령관은 대통령께 정보 조언은 할 수 있지만 작전에는 참여할 수 없는데도, 광주사태의 직접 책임을 이 양반한테 씌우려고 재판을 만들었지만 그건 얹을 수가 없었어요. 이 양반은 2년 동안 고생했지만 그 덕분에 누명은 벗었습니다.”(상자기사 참조)



“대통령 생각 전혀 없었다”

전두환·이순자, 30년 침묵을 깨다!

[조영철 기자]

전두환 “나는 원래 정치인이 아니고 군인이란 말이야. 군인으로서 그때 나라가 어렵고, 내가 대통령이 안 될 수가 없어서 한 건데, 내가 대통령이 하고 싶어서 된 건 아니오. 대통령 하고 싶으면 뭐 하러 군대 들어갔겠어요. (대통령 되려는) 계획이 전혀 요만큼도 없었어. 그렇기 때문에 약속한 대로 하고 딱 한 번(대통령 단임) 하고 나왔잖아. 사람들은 내가 계획을 다 세워서 한 줄 아는데, 내가 그렇게 머리 좋은 사람이었다면 (대통령 자리에서) 나오지도 않았겠지.” 

이순자 “저도 그래요. 1980년 1월 15일에 한국외국어대 영어학과 편입시험을 치렀어요. 학교에 한번 알아보세요. 이 양반이 대통령 하려 했다면 제가 왜 편입시험 치르려고 시험장에 앉아 있겠습니까. 그때 이 양반은 그런 생각이 없었거든요.”

한국외대에 이런 사실을 확인해달라고 요청하자 “입학한 학생들의 학적 자료는 남아 있는데, 응시생 자료는 현재 남아 있지 않아 확인할 수 없다”고 알려왔다.    

기자 “12·12 때는 집권 의지가 전혀 없었다는 겁니까.”

이순자 “그랬으니 그 이듬해 외대 편입시험을 치렀죠.”

전두환
“12·12가 뭐더라?”

이순자 “10·26사건 나고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새로 수사한 거요.”

전두환
“아, 그거. 정승화는 왜 잡아놨느냐. 우리가 볼 때, 젊은 장군들이 볼 때 (정승화가) 김재규를 앞세워 정권을 잡으려 했으니까. 김재규 머리로는 안돼. 큰일 나. 그래서 잡아넣었어.”

이순자 “그래서, 10·26 일어난 뒤에도 대통령을 살해한 김재규의 태도가 너무 거침없어서 ‘미국의 사주를 받아서 (10·26 사건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많았어요.”

전 전 대통령 부부의 이러한 ‘현대사 인식’은 노태우 전 대통령과 허화평 전 의원 등 5공 인사들의 그것과 궤를 같이한다. 5공 청문회와 12·12 및 5·18 사건 재판 과정과 인터뷰에서 5공 인사들은 “12·12는 10·26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불가피한 우발적 충돌이지 권력장악 의도는 없었다”고 주장한다. 10·26은 김재규, 정승화, 김계원(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의 합의로 일어났기 때문에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조사해야 했지만, 그가 계엄사령관에 임명되면서 부득이 충돌이 빚어졌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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