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호

부자와 미술관

‘집중과 선택’ 빛난 현대·컨템포러리 명문

올브라이트-녹스 미술관

  • 최정표 |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jpchoi@konkuk.ac.kr

    입력2016-05-18 16:2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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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 동부 여행의 필수 코스인 나이아가라 폭포를 방문한다면 그 길목에 있는 도시 버팔로에 들러보자. 이곳에는 뉴욕 미술관들 부럽지 않은 올브라이트-녹스 미술관이 있다. 현대 및 컨템포러리 작품에 전념하기 위해 로마시대 조각상을 경매에 내놓을 만큼 용기와 뚝심이 있는 미술관이다.
    뉴욕 주의 두 번째 도시 버팔로(Buffalo)는 미국과 캐나다 국경 부근에 있다. 뉴욕 시에서 자동차로 8시간은 달려야 한다. 비교하자면 부산에서 백두산까지의 거리다. 그런데 미국을 방문하는 한국인 관광객 대부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도시를 지나간다. 미국 동부 관광의 필수 코스인 나이아가라 폭포(Niagara Falls)로 가는 길목에 버팔로가 있기 때문이다.

    버팔로 시는 오대호 중 하나인 이리 호(Lake Erie)의 동쪽 끝에 자리하는데, 이리 호에서 나이아가라 강으로 떨어지는 대폭포가 바로 나이아가라 폭포다. 흘러내리는 물의 양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폭포다. 엄청난 양의 물이 끊임없이 쏟아져 내려 멀리서 봐도 물의 포말이 물안개처럼 하늘로 솟아오르고, 지축을 뒤흔드는 굉음이 귓전을 때린다. 강으로 흘러내린 물은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을 만들면서 또 다른 오대호인 온타리오 호(Lake Ontario)로 흘러들어간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1604년 처음으로 서양인들의 눈에 띄었으며, 오늘날 연간 300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아드는 명소가 됐다.

    나이아가라 폭포 옆 버팔로에 올브라이트-녹스 미술관(Albright-Knox Art Gallery)이 자리한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뉴욕 맨해튼의 미술관들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훌륭한 현대미술관이다.



    맨해튼이 부럽지 않다

    버팔로는 미국 전역에서 53번째로 꼽히는 도시다. 오대호와 가까운 데다 내륙으로는 운하를 끼고 있어 19세기엔 교통의 요충지였다. 19세기에 산업화가 급진전하면서 도시도 급성장했다. 미국의 여느 대도시와 마찬가지로 버팔로도 인구가 늘면서 주민들의 문화적 욕구가 커졌다. 이를 충족하기 위해 일찍부터 미술관을 만들었다. 역시 부자와 유지들이 이 일에 앞장섰다.



    올브라이트-녹스 미술관의 출발은 1862년에 세워진 버팔로 예술대학(Buffalo Fine Arts Academy,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공립 미술학교 중 하나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0년 버팔로의 재벌 존 올브라이트(John J·Albright, 1848~1931)가 이 학교에 부설 미술관을 짓자고 제안한다. 학교는 부설 미술관뿐만 아니라 1901년 버팔로에서 개최될 예정이던 ‘범아메리카 박람회(Pan-American Exposition)’의 미술 전시관으로도 사용할 수 있도록 새 건물을 짓기로 했다. 올브라이트는 이를 위해 거금 35만 달러를 내놓았다. 2016년 가치로 환산하면 1000만 달러(약 116억 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건축 과정에서 건설비가 계속 늘어나는 바람에 많은 우여곡절을 겪다가 건물은 박람회가 끝난 뒤인 1905년에야 준공됐다. 당대 최고의 건축가 그린(Green)이 설계했는데, 고대 그리스 사원 양식의 둥그런 대리석 건물로 웅대함을 뽐냈다. 커다란 대리석 기둥이 102개나 있는데, 워싱턴DC의 국회의사당 다음으로 미국에서 대리석 기둥이 많은 건물이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워싱턴 모뉴멘트에 사용된 메릴랜드산 흰 대리석이 5000t이나 쓰였다고 한다. 준공과 더불어 이 건물은 올브라이트 미술관(Albright Art Gallery)으로 명명됐다.

    미술관 준공식에선 CW 엘리엇 하버드대 총장이 기조연설을 했다. 그러나 올브라이트는 아예 나타나지도 않았다. 준공식 이후 어느 한적한 일요일을 택해 친구들과 함께 미술관을 둘러봤다는 게 손자의 증언이다. 그는 앞에 나서거나 스포트라이트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올브라이트 미술관은 1962년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녹스(Seymour H. Knox Jr.)라는 사업가를 중심으로 이 지역 유지들이 자금을 마련해 미술관을 증축했고, 이름도 올브라이트-녹스 미술관으로 바꿨다. 2012년에는 이사회에서 미래의 새로운 미술관을 지향하는 종합계획을 마련한다.

    올브라이트-녹스 미술관은 8000여 점의 작품을 소장했고 그중 200여 점을 상설 전시한다. 소장품 대부분은 인상파 이후 현대 작품과 컨템퍼러리 작품이다. 현대 작품은 인상파, 후기 인상파, 입체파, 초현실주의, 구성파(constructivism) 등이 주류를 이룬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 및 유럽의 컨템퍼러리 작품도 풍부하다. 일찍이 미국 추상표현주의 작품을 심도 있게 수집 소장해 추상표현주의 보고라는 평가를 받는다. 고르키(Arshile Gorky), 폴록(Jackson Pollock), 스틸(Clyfford Still) 등 추상표현주의 대표 작가의 작품을 많이 소장했다. 일찍부터 팝아트에도 관심을 가졌다. 덕분에 팝아트의 대가, 앤디 워홀(Andy Warhol)의 주요 작품도 만날 수 있다. 1988년에는 미술관 설립 125주년을 기념해 안젤름 키퍼(Anselm Kiefer)의 대형 작품 ‘The Milky Way’(1985~87)를 구입했다. 미술관 정원에는 다양한 조각 작품도 전시 중이다.



    美 추상표현주의 寶庫

    2007년까지는 미술관의 수익자산이 5800만 달러였고, 이를 바탕으로 매년 새 작품 구입으로 110만 달러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07년에는 기금 마련을 위해 소장 작품 200점을 매각했고, 그 수입이 보태지면서 이후 매년 500만 달러 상당의 새 작품을 구입하고 있다. 2013년에는 이사회 멤버이면서 버팔로의 예술 후원자 페기 피어슨 엘핀(Peggy Pierce Elfvin)으로부터 1100만 달러를 기부받았다. 이는 올브라이트-녹스 미술관 역사상 최다 액수의 기부다.

    미술관 설립의 최대 공로자인 올브라이트는 버지니아에서 태어나 펜실베이니아에서 자랐고 버팔로에서 사업을 크게 벌였다. 그의 조상은 미국 독립전쟁 때 군에 총기를 공급한 군납업자였다. 그의 아버지는 제철업과 석탄사업으로 부를 일궜고, 나중에는 미국 퍼스트내셔널뱅크(First National Bank) 회장을 지냈다.

    올브라이트는 아버지와 비슷하게 제철에 사용되는 석탄을 판매하는 것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미국은 산업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던 시기라 석탄 수요가 급팽창했다. 그가 살던 펜실베이니아 주는 석탄 주산지라 사업은 일약 번창했다. 나중에는 도로포장용 아스팔트 사업에도 진출해 크게 성공한다. 그는 많은 돈을 벌자 마흔 살에 은퇴해 가족과 함께 14개월 동안 유럽과 이집트 등을 여행한다. 그러나 노는 것도 지겨웠는지 다시 사업 현장으로 돌아와 전기, 철도 등 여러 업종에서 새 사업을 일으켜 성공시켰다. 이렇게 그는 버팔로 최고 재벌로 우뚝 섰다.

    올브라이트는 1887년 버팔로 예술대학의 이사로 선임된 후 1895년부터 2년간 이사장을 맡았다. 그리고 1910년까지 이사로 남았다. 이런 인연으로 이 대학의 부속 미술관을 짓는 일에 참여했고, 이 미술관이 오늘날의 올브라이트-녹스 미술관으로 발전했다.



    아르테미스 조각상 매각 쇼크

    올브라이트의 뒤를 이어 미술관을 중흥시킨 녹스는 버팔로의 명문가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 시모어 녹스 1세(Seymour Horace Knox I)는 100개가 넘는 점포를 운영한 버팔로의 대상인이었다. 녹스는 재벌가 상속자인 만큼 자선사업과 미술관 후원에 돈을 아낌없이 쓸 수 있었다. 그는 폴로 선수로 활약하며 자신의 팀을 미국 전체 우승팀으로 이끌었으며 유럽과 남아프리카로 원정경기를 다녀오기도 했다. 예일대를 졸업한 인텔리로, 문화사업 및 교육사업에 많은 공헌을 했다. 1926년부터 올브라이트 미술관의 이사로 참여했고, 평생 버팔로 모더니즘 운동의 선구자로 활동했다. 1962년 올브라이트 미술관을 증축하고, 증축된 미술관의 녹스관(Knox wing)에 160점가량의 작품을 기증했다.



    현대 추상화에 매료된 녹스는 이들 작품을 수집하는 데 열정을 쏟았다. 미국 추상표현주의 선구자인 잭슨 폴록을 유명 화가로 만드는 데는 그의 공로가 컸다고 알려진다. 그의 주장으로 미술관은 추상표현주의 대가 클리포드 스틸의 작품을 구입했는데, 이로써 스틸 작품을 최초로 소장한 미술관으로 기록된다. 또한 헨리 무어(Henry Moore)의 조각을 처음 구입한 미술관 중 하나이기도 하다. 1985년 앤디 워홀은 녹스의 초상화 ‘Portrait of Seymour H. Knox’를 만들기도 했다.

    녹스는 60년간 버팔로 예술대학을 열성적으로 키워왔으며, 1939년까지 학장을 지냈다. 1950~69년에는 버팔로 뉴욕주립대(State University of New York) 이사장을 맡아 이 대학을 명문 주립대학으로 키웠다.

    올브라이트-녹스 미술관은 2007년까지 로마시대의 아름다운 청동조각 작품 ‘Artemis and The Stag’를 소장했다. 고대 그리스의 여신 아르테미스의 조각상이다. 사냥하는 여신이 화살을 발사한 직후 독특하고 섬세한 자세를 묘사한 작품이다. 기원전 1세기~기원후 1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 유적지에서 1920년대에 발굴돼 몇 사람의 손을 거친 후 1953년에 이 미술관의 항구적인 소장품이 됐다. 가장 아름다운 고대 조각 작품 중 하나로 인정받는 작품이다.

    그런데 미술관 측은 2006년 이 작품을 매각하기로 결정한다. 비판이 비등하고 언론이 몰려들었다. 관장은 “미술관이 현대 및 컨템포러리 작품에 집중하려면 매각이 불가피하다”고 해명했다. 아무리 훌륭한 작품이더라도 그 미술관의 특성과 임무에 맞지 않으면 매각도 검토해볼 수 있다는 것이 관장의 의지였다. 그러자 ‘반대파’는 재정 사정이 또 어려워지면 다른 고대 및 고전 명품도 내다  팔 위험이 있다고 우려하고 나섰다. 우여곡절을 거친 후 이사회의 투표로 아르테미스 조각상의 매각이 최종 결정됐고, 다시 회원들의 투표를 거쳐 이 결정이 추인됐다.



    입체파 대표작 ‘Man in Hammock’

    이 작품은 2007년 6월 뉴욕 소더비 경매에 나왔다. 예상 가격은 500만~700만 달러. 그런데 뜻밖에도 2860만 달러에 낙찰이 이뤄졌다. 당시까지 조각 작품으로서는 최고 금액이었다. 유럽의 한 컬렉터를 대신해 런던의 유명한 아트 딜러 쥐세프 이케나치가 구입했다. 올브라이트-녹스 미술관은 이 낙찰금으로 전문 분야를 한층 더 강화할 수 있었다. 익명의 컬렉터가 사간 아르테미스 조각상은 2008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나타났다. 여기서 6개월간 전시됐다.

    미술관은 제각기 전문성과 특성을 가진다. 해당 전문성에 맞지 않는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값진 것이더라도 팔아버릴 수 있다는 것이 실천된 사례다. 쉽지 않은 결정, 용기 있는 결정이라 하겠다. 이 경매 이후 자금 곤란을 겪는 다른 미술관들도 소장 작품 매각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작품을 매각하는 것이 타당한지, 매각한다면 무엇을 내놓아야 하는지  따져봐야 할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어쨌든 올브라이트-녹스 미술관의 용단(勇斷)은 여러 미술관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입체파(Cubism)는 20세기 초 현대미술을 상징한다. 입체파로 가장 높은 명성을 올린 화가는 피카소다. 그런데 입체파를 창시하고 이론적 기초를 세운 화가는 프랑스의 두 화가, 글레이즈(Albert Gleizes)와 메챙제(Jean Metzinger)다. 두 사람은 화가이자 문학가, 철학자였다. 1912년 함께 쓴 ‘입체파(Du “Cubisme”)’는 입체파 이론을 정립한 저술로 가치를 널리 인정받는다. ‘입체파 선언문(Cubist manifesto)’으로도 불리는 이 책의 출판 100주년을 맞아 2012년 프랑스 파리에서는 5개월에 걸쳐 큰 행사가 열렸고, 기념우표도 발행됐다. 글레이즈와 메챙제의 작품을 함께 전시한 첫 행사이기도 하다.

    올브라이트-녹스 미술관은 글레이즈가 입체파 양식으로 그린 메챙제의 초상화 ‘Man in Hammock’을 갖고 있다. 해먹에 앉아 있는 메챙제를 입체파 양식으로 그린 그림이다. 함께 책을 쓴 이듬해인 1913년에 그렸다. 입체파인 만큼 사람의 모습도 분명하지 않고 누구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입체파 그림이라는 것이 본래 그렇다. 이 작품은 미술사에서 매우 유의미한 그림이고, 이 미술관의 대표 소장품이기도 하다.

    글레이즈는 파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시를 즐겨 쓴, 생각이 많은 문학청년이었다. 4년간 군에 복무한 후 화가의 길을 걸었다. 글도 많이 썼는데, 특히 독일 종합예술학교 바우하우스에서 그의 글이 많이 읽혔다. 뉴욕에서도 4년을 머물며 미국에 유럽 현대미술을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메챙제는 군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나폴레옹 군대의 장군이었다. 메챙제는 학창 시절 공부를 곧잘 했고 그림에도 재능을 보였다. 고향 낭트에서 파리로 옮긴 뒤 본격적인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파리에서 젊은 화가들과 어울리면서 두각을 나타내다 1906년 글레이즈를 만나 입체파에 빠졌다.



    고갱 대표작 2점 소장

    올브라이트-녹스 미술관에서는 고갱(Paul Gauguin)의 두 작품 ‘The Yellow Christ’(1889)와 ‘Spirit of the Dead Watching’(1892)을 눈여겨봐야 한다. 둘 다 고갱의 특색이 두드러지는 그림이다.

    ‘The Yellow Christ’는 고갱이 고흐와 헤어진 후 1889년 가을 프랑스 서북부의 시골 도시 퐁타방(Pont-Aven)에서 그린 그림이다. 많은 화가가 이 마을에 머물며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그 화가들을 ‘퐁타방파’라고도 한다. 고갱은 1886년 처음 이 마을에 온 후 1888년 고흐가 있는 아를로 가기 전 다시 찾았고, 고흐와 헤어진 후 1889년 또다시 찾아들었다. 이 그림은 상징주의의 대표 작품 중 하나다. 수채화로 그린 똑같은 그림이 시카고 미술관(Art Institute of Chicago)에도 있다.

    고갱은 1891년 남태평양의 외딴섬 타히티로 옮겨간다. ‘Spirit of the Dead Watching’은 그 이듬해인 1892년 원주민 여인의 누드를 그린 작품이다. 엎드린 여인은 뭔가 모를 공포에 휩싸여 있다. 유령을 이미지화한 소녀, 소녀를 이미지화한 유령이라고 할 수 있다는 뜻에서 고갱이 이 같은 제목을 붙였다고 한다.

    그림 속 여인은 고갱의 현지처다. 고갱에 따르면 어느 날 밤늦게 집에 와보니 그녀가 발가벗은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침대에 엎드린 자세로 공포에 질려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고 한다. 그 모습이 그대로 그려져 있다. 그녀가 느끼는 공포는 침대 뒤의 늙은 여인으로 의인화했다.

    고갱은 프랑스의 후기 인상파 화가로 사후에야 그 진가를 인정받았다. 당시 유명한 미술상 볼라르(Ambroise Vollard)가 고갱 전시회를 열면서 사람들은 그의 진가를 알게 됐다. 볼라르는 고갱 생전에 한 번, 사후에 두 번 그의 전시회를 열었다. 고갱은 피카소와 마티스에게 특히 많은 영향을 끼쳤다. 고갱의 작품은 러시아의 유명한 컬렉터 세르게이 슈킨(Sergei Shchukin)이 많이 구입했고, 이 때문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과 모스크바의 푸시킨 미술관이 고갱 작품을 여러 점 소장했다.

    고갱은 파리 태생이다. 그러나 1850년 그가 두 살일 때 가족이 정치적 이유로 페루에 이주했다. 아버지는 페루로 가는 도중에 사망했고, 어머니가 고갱과 누이를 데리고 외가 식구와 함께 수도 리마에서 4년간 살았다. 유아기의 페루 생활은 훗날 그의 예술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고갱이 7세 때 가족은 다시 파리로 돌아왔고 이후 오를레앙으로 가서 아버지 쪽 가족과 죽 함께 살았다. 고갱은 곧 불어에 익숙해졌지만, 페루풍의 스페인어를 아주 좋아했다고 한다. 고갱은 타히티에서 2년을 지내다 파리로 돌아온다. 그리고 또 2년 후 타히티로 되돌아갔고 거기서 사망한다. 원인은 모르핀 과다 사용으로 알려진다. 이래저래 많은 일화를 남긴 화가다.



    최고가 갱신 중

    고갱은 요즘에도 새로운 일화를 낳고 있다. 2014년 이탈리아에서는 1970년 런던에서 도난당한 고갱의 그림 한 점이 발견됐다. 작품 가치가 무려 4000만 달러라고 하는데, 소유자는 자동차회사 피아트의 노동자였다. 그는 이 그림을 1975년 한 중고품 시장에서 50달러에 샀다고 한다. 그림과 관련한 이런 얘기들은 적지 않다. 그렇다고 요행을 바라고 그림을 사서는 안 될 일이다.

    고갱의 작품은 최근 미술 시장에서 최고가를 경신하는 중이다. 주요 컬렉터들이 그의 작품을 매우 선호하기 때문이다. 1892년작 ‘When Will You Marry?’는 지난해 3억 달러에 거래된 것으로 알려진다. 구매자는 중동의 ‘카타르 미술관’이라고 하는데 확인된 것은 아니다. 

    최 정 표


    ● 1953년 경남 하동 출생
    ● 미국 뉴욕주립대 박사(경제학)
    ● 공정거래위원회 비상임위원, 건국대 상경대학장
    ● 저서 : ‘경제민주화, 정치인에게 맡길 수 있을까’
       ‘재벌들의 특별한 외도’ ‘한국재벌사연구’ ‘공정거래정책 허와 실’
       ‘한국의 그림가격지수’ 등
    ● 現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경실련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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