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호

‘퇴계처럼’무릎 꿇고 ‘선비처럼’同情하라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의 하룻밤, 이틀낮

  • 송홍근 기자 | carrot@donga.com

    입력2016-05-24 14:5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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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풍요와 윤택을 얻었으나 무한경쟁과 이기심만 남았습니다. 남을 밟고 내가 서는 사회는 불화가 가득하지요. 수련생들은 하나같이 ‘퇴계처럼’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겠다고 다짐합니다. 누가 더 천박한지 경쟁하는 세태에서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까요. 사람됨을 실현하고 타인을 배려하면서 모듬살이의 삶을 지향한 ‘선비처럼’ 살아야 해요.”
    5월 9일 도산서원(陶山書院)에서 내려다본 낙동강은 고즈넉했다. 신록 가득한 풍광이 펼쳐지니 심신이 느긋하다. 강 너머로 시사단(試士壇)이 서 있다. 시사단은 도산별과가 치러진 것을 기념하는 비각. 1792년 정조(1752~1800)는 퇴계 이황(李滉·1501~1570)의 학덕을 추모해 이곳에서 과거를 열고 인재를 골랐다.

    같은 날 오전 10시 45분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김종길(75) 선비문화수련원 원장이 선비의 삶을 익히려 이곳을 찾은 수련생들을 맞는다. 선비문화수련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들은 한국농어촌공사 경북지역본부 임직원. 김종길 원장은 퇴계의 제자인 학봉 김성일(1538~1593)의 15대 종손이다.     

    2002년부터 지난해까지 선비문화수련원을 찾은 수련생은 22만8000명. 지난해에만 7만3632명이 이곳에서 도리(道理)를 익혔다. “올해는 10만 명에게 유가(儒家)의 삶을 가르치겠다”는 게 김병일(71)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의 목표다. 서울대 사학과를 졸업한 후 30년 넘게 경제 관료로 봉직한 김병일 이사장은 통계청장, 조달청장, 기획예산처 장관을 지냈다.  

    김병일 이사장은 공직에서 물러난 후의 삶을 선비문화 선양(宣揚)에 바치고 있다. 퇴계를 존숭하면서 퇴계의 학문을 공부하고, 찾아온 이들에게 퇴계의 삶과 사상을 전한다. 퇴계의 사유가 담긴 시를 암송하면서 퇴계가 소요(逍遙)하던 숲길을 걷는다. “심신을 맑게 씻어주고 행복감에 젖어들게 하는 곳”이라면서 그는 웃었다.



    “선비의 삶이 그립다”

    ‘선비’는 순우리말이다. “선비가 도야(陶冶)하는 수양은 자신을 낮추고 타인을 높이며 나에게 엄격하고 남에게 관대한 박기후인(薄己厚人)의 정신을 근본으로 한다”고 김병일 이사장은 말한다. ‘선비 유(儒)’는 ‘사람 인(人)’과 ‘구할 수, 필요할 수(需)’가 합친 글자다. 사람(人)됨의 이치를 구하는(需) 존재면서 세상사람(人)이 필요(需)로 하는 이다.    

    혼돈한 시대, “선비의 삶이 그립다”는 이가 적지 않다. 선비문화수련원은 선비의 삶을 몸과 마음으로 익혀 실천하도록 돕는 곳이다. 2002년부터 안동 시내에서 커리큘럼을 진행하다가 2011년 퇴계 종택 뒷산 자락에 수련원을 세웠다. 연수생이 해마다 느는 터라 2수련원 건립에 나서 5월 말 준공했다. 선비의 삶을 익히려는 이가 왜 느는 걸까. 김병일 이사장의 설명은 이러하다.

    “일제가 선비정신이 대표하는 조선, 조선인, 조선 문화의 장점을 말살했어요. 식민사관에 입각해 잘못된 점만 부각했죠. 선비는 이상적 인격체를 가리킵니다. 독서, 공부를 통해 지력을 갖췄으며 자연을 거닐면서 마음을 가다듬었습니다. 검소, 청렴을 솔선하면서 의리, 범절에 따라 행동했죠.

    우리는 풍요와 윤택을 얻은 대신 도리를 잃었습니다. 행복은 부와 명예가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비롯하는 것이지요. 사회의 건강을 담보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보장하는 것 또한 물질이 아니라 정신입니다.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적은 것은 압축성장의 부작용 탓입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사람됨을 실현하고 타인을 배려하면서 공동체의 행복을 지향한 선비들의 삶과 정신에 현재의 위기를 해결할 해법이 담겼습니다.

    선비정신에 주목하는 이가 느는 것은 나만 잘살겠다고 발버둥치는 현실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따뜻한 공동체를 이뤄 살면서 선우후락(先憂後樂, 궂은일은 이웃보다 먼저 하고 즐거운 일은 나중에 한다)하던 때를 그리워하는 이가 늘어난 덕분인 것으로 보입니다.



    어른으로 산다는 것

    선비는 공동체에 오래도록 필요한 사람이 되고자 수련했습니다. 경쟁에서 이기려고 악을 쓰는 문화 탓에 불행한 사람이 늘어난 겁니다. 물질적 욕망의 횡행할수록 정신적 가치의 중요성이 커지거든요.”

    김 이사장은 “2008년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을 맡은 후 삶의 지향과 태도가 바뀌었다”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잘 살았노라 자부하는 삶이라면 청년에게 해주고 싶은 얘기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경제 관료로 승승장구했어요. 아내, 자식에게 큰소리치면서 살았죠. 하나하나 다 가르치려 했고요. 후회가 이만저만한 게 아닙니다. 가장이 잘될수록 아내와 자식이 힘들어지는 것은 잘못된 것이죠.

    ‘몸으로 가르치면 따라오고 말로 가르치면 대든다’고 했습니다. 조선 영조 때 정승을 지낸 이태좌(1660~1739) 선생의 말씀입니다. 어른 세대가 명심해야 할 가르침이라고 생각해요. 젊은이의 경험은 자신의 그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른은 행동으로 청년에게 본을 보여줘야 해요.

    부모가 자식을 대할 때도 같습니다.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가르쳐야 해요. 자식이나 아랫사람은 나무라고 가르치려 들기보다는 원하는 것을 어른이 먼저 실천할 때 자연히 따라오는 것입니다. 퇴계 선생은 삶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은 분으로 어머니를 꼽았습니다. 선생의 어머니는 글을 읽을 줄도 몰랐으나 인간의 도리와 관련해 본을 보여줬습니다.”  

    그는 한국이 겪는 온갖 정치·경제·사회·문화 난맥상을 해결하는 하나의 방안으로서 퇴계를 비롯한 선현이 가르친 선비정신이 절실하다고 여긴다. 퇴계의 일화를 소개한 ‘퇴계처럼’(2012)과 선비문화수련원에서 익히고 깨달은 바를 글로 옮긴 ‘선비처럼’(2015)을 책으로 엮어낸 까닭이다.   

    ‘선비정신’을 두 차례 읽은 후 한자 셋이 뇌리에 오랫동안 남았다. 서(恕), 충(忠), 경(敬)이 그것이다. 恕는 ‘남의 처지에 서서 동정(同情)하는 마음’이다. 같을 여(如)와 마음 심(心)이 합쳐진 글자인데, 공자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도 끼치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고 했다.



    정직하고 믿음 있는 유익한 벗은 나의 인격을 성숙시키고, 겉과 속이 다르고 말 잘하는 해로운 벗은 타락의 길로 이끕니다. 좋은 벗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겸손과 배려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김 이사장은 자신의 경우를 사례로 들었다.

    “공직을 떠나 이곳에 와서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선비의 삶을 공부하면서 지난날에 부끄러움과 후회가 밀려왔어요. ‘참선비가 이런 분들이었구나’ ‘퇴계 선생이 이래서 존경받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과거에는 가난했으되 ‘모듬살이’를 했습니다. 공동체가 살아 있었지요. 풍요와 윤택을 얻었으나 무한경쟁과 이기심만 남았습니다. 남을 밟고 내가 일어서는 사회는 불화가 가득하고 불행하지요. 지식 공부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돼요. 선비는 지식 습득보다 인격 수양을 먼저 했습니다.

    한국의 국민행복지수가 143개국 중 118위(2015년)예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자살률 1등에서 내려올 줄 모릅니다. 윗사람·아랫사람 간, 부서 간, 회사 간 갑질이 만연했지요. 자기희생, 인간 존중의 선비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선비정신 vs 물신주의 

    90분 동안 이어진 강의의 주제는 ‘행복’이었다. 퇴계의 삶과 정신, 일화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수련자 각자가 생각해보게 했다. 강의를 듣고 도산서원으로 이동하면서 ‘선비정신’과 ‘물신주의’를 비교한 대목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강의를 마치고 도산서원 앞 낙동강변을 함께 걸으면서 김 이사장은 이렇게 덧붙였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서구의 근대적 교육이념은 지식을 통해 남을 지배하는 권력을 주었을지언정 자기를 낮추며 남과 어울려 행복을 느끼는 지혜를 주지는 못했습니다. 오늘날 학교에서는 머리만 살찌우는 지식의 전수만 남았습니다. 나라가 반듯해지려면 학교 교육부터 바로잡아야 해요.

    선비는 교육과 실천을 통해 개인적 이익 추구에 골몰하느라 공동체의 안녕과 질서를 어그러뜨리는 사람을 깨우쳐주는 존재입니다. 겸손, 배려, 헌신은 오랫동안 향기를 피우기에 1만 리를 갑니다. 이러한 향기가 시대를 아름답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달걀로 바위 치기일지언정 선비정신을 알리는 일에 더욱 매진하려 합니다.”



    “말 막 하면 안 됩니다” 

    한국농어촌공사 임직원들이 도산서원에 도착한 때는 오후 2시 30분이다. 뜰에 모란이 격조 있게 펴 있다. 출사 나온 사진가들이 카메라에 모란을 담으려 셔터를 누르는 소리가 경쾌하다.

    모란 옆에는 매화나무를 심어놓았다. 퇴계는 매화를 특히 아꼈다. 매화를 소재로 쓴 시만 107다. 도산매(陶山梅)는 퇴계가 도산서원에 매화를 직접 심은 것에서 유래한다. 도산매 100여 그루가 뜰에 심어져 있다.

    퇴계가 숙식한 도산서당을 둘러보면서 수련생들이 탄성을 내지른다. 퇴계가 예순한 살 때 지은 도산서당은 방 한 칸, 마루 한 칸, 부엌이 전부다. 퇴계는 “집이 장황하고 고대(高大)하게 됐다”며 그것마저 부끄러워했다. 엄격하게 절제된 도산서당의 모습에서 선비들의 정신이 읽힌다.    



    사람은 이렇게 산다

    수련생들은 도산서원·도산서당을 탐방하면서 선비의 삶에 대한 설명을 들은 후 두루마기로 갈아입고 퇴계를 모신 상덕사에서 알묘례(謁廟禮)를 치른 후 퇴계 종택으로 이동했다. 오후 3시 50분, 16대 종손 이근필 옹이 퇴계 종택에서 수련생들을 공손한 태도로 맞는다.

    이근필 옹은 안동이 낳은 청백리의 일화, “욕심 부리지 말라”는 내용이 담긴 덕담 등을 50분 넘게 무릎 꿇고 앉아서 들려줬다. 퇴계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었다. ‘염슬위좌’ 하는 것이 습관이 돼 편한 데다 허리를 꼿꼿하게 해 건강에도 좋다고 한다. 퇴계 종손의 말씀 중 한 대목만 소개한다.

    “똑똑하다고 말을 막 하면 안 됩니다. 속이 답답하다고 말을 막 하면 속이 더 답답해집니다.”

    퇴계 종택을 나와 선비문화수련원 쪽으로 걸어가면서 김병일 이사장이 오전에 한 말이 떠올랐다.

    “백번 말을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게 더 많은 것을 익힐 수 있습니다. 퇴계 종손을 직접 뵈면 느끼는 게 많을 거예요. 예나 지금이나 가치 기준은 같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존중받기를 원해요. 종택을 찾은 이들은 어린아이이건 어른이건 종손을 공경합니다. 낮춤으로써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셈이지요. 박기후인(薄己厚人)이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낮추고 남을 크게 배려하며 받드는 사람이 선비지요.”

    1박 2일 과정으로 ‘선비 스테이’를 하는 수련생들은 저녁식사를 한 후 ‘퇴계 명상길’을 산책한다. 퇴계가 걷던 그 길에서 사색과 성찰의 시간을 갖는다. 늦은 밤에는 선비정신 실천 토의를 한다. 수신·제가·치국(사회생활)을 어떻게 할지 협의하는 것이다.

    이튿날 오전 7~8시에는 퇴계의 건강관리법-활인심방(活人心方)을 익힌다. 조식을 한 후 오전 9시부터 오후 12시 20분까지 ‘선비의 삶, 그 현장’이라는 제목의 현장 답사에 나선다. 오후 1시 20분부터 시작하는 선비정신 실천 발표를 끝으로 예비 선비로서의 자격을 얻는다.

    “지난해 7만3000명이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을 다녀갔습니다. 올해 목표가 10만 명인데, 4월 말 현재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배 넘는 수련생이 찾아왔어요. 수련생이 빠른 속도로 느는 까닭은 수련을 마치고 돌아간 분들이 얻은 게 많다고 판단한 덕분인 것 같습니다.

    밥을 잘 먹는다고 얼굴색이 좋아지는 게 아닙니다. 마음이 평화로워야 안색이 밝아지지요. 누가 더 천박해지는지 경쟁하는 세태에서 선현의 향기를 맡으면서 수신(修身)부터 시작하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선비 체험을 마친 수련생들은 하나같이 ‘퇴계처럼’ 낮춤과 섬김을 실천하며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낙동강 상류 강기슭 초목에 돋은 새 잎의 푸른빛이 눈부시다. 안동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 ‘아, 사람이 이렇게 사는 거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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