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호

한 글자로 본 중국 | 후베이성

제왕의 자본 兵者必爭의 땅

鄂 천하삼분 맹주

  • 글 · 사진 김용한 | 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입력2016-05-24 14:5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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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유명한 적벽대전이 벌어진 땅에 사는 것은 녹록지 않다. 가만있어도 난리가 벌어지는 탓이다. 그래서 후베이 사람들은 거친 세파를 통쾌하게 헤쳐 나가는 강호의 협객 같은 삶을 꿈꾼다. 이들은 의리를 버린 자를 ‘반수(反水)’라 일컫는다. 물을 거스르는 것처럼 본성에 어긋난 짓을 했다는 뜻이다.
    충칭(重慶)에서 출발한 장강삼협(長江三峽) 크루즈 여행의 종착점은 후베이의 이창(宜昌)이다. 유비가 육손에게 대패한 이릉대전이 일어난 땅에서 다시 장강을 따라 내려가니 징저우(荊州)가 나왔다. 삼국시대에 형주 강릉성(江陵城), 위·촉·오가 격전을 벌인 곳이다.

    징저우 곳곳에는 삼국시대를 그리는 흔적이 있다. 여관은 ‘삼국빈관(三國賓館)’이고, 공원은 ‘삼국공원(三國公園)’이며, 심지어 노래방 이름은 ‘동작대(銅雀臺)’였다. 물론 ‘삼국’이라고는 해도 민중의 사랑을 받는 것은 유비·관우·장비였다. 삼국공원 입구에선 유·관·장 삼형제의 석상이 나그네를 반겨주고, 형주성벽 위엔 관우의 청룡언월도가 징저우를 지키는 신물처럼 위풍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삼국시대 최대의 격전지인 후베이다웠다.



    초나라 본거지

    후베이(湖北)성의 약칭은 ‘땅 이름 악(鄂)’자다. 후베이 수상방어의 요충지인 우창(武昌)에 옛날 악(鄂)나라가 있었던 것에서 유래한 약칭이다. 후베이란 중국 최대의 호수이던 동정호(洞庭湖) 북쪽에 있다는 뜻이다.

    후베이의 가장 큰 지리적 특징은 ‘중국의 배꼽’이라는 점이다. 후베이의 성도 우한(武漢)의 특징을 들어보자. “하나의 선(징광선, 京廣線)이 관통하고, 두 강(長江,漢水)이 교차해 흐르는 곳에 삼진(三鎮, 우창(武昌)·한커우(漢口)·한양(漢陽))이 정립해 있다. 오방 사람이 잡거하고 아홉 성으로 두루 통한다(五方雜處,九省通衢).”



    남북으로 베이징에서 광저우까지 달리는 징광선, 동서를 잇는 장강. 중국의 대동맥인 징광선과 장강이 만나는 곳이 바로 후베이다. 중국의 양대 철도인 징광선과 룽하이선(隴海線)이 만나는 허난성이 중국 교통의 중심이라면, 후베이는 중국 지리의 중심이다. 후베이는 허난, 산시(陝西), 충칭, 후난, 장시, 안후이와 접하며 수륙교통으로 장쑤, 광둥, 쓰촨도 쉽게 오갈 수 있다.

    특히 성도인 우한은 장강과 한수가 만나는 곳으로 우창, 한커우, 한양 등 세 항구가 합쳐진 도시다. 따라서 사방에서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든다. 치세에는 상인들이 오가고, 난세에는 군대가 충돌한다.

    후베이의 또 다른 약칭인 초(楚)가 이 지역의 정체성을 명확히 보여준다. 남방의 강국 초나라의 주요 영역이 바로 후베이다. 중원의 화하족은 황하를, 남방의 초인(楚人)은 장강을 젖줄로 삼았다. 일찍부터 국가를 정비한 화하족에게 남방의 오랑캐들은 남만(南蠻)에 불과했다. 그러나 춘추시대에 접어들면서 형만(荊蠻)은 초나라를 세우고 경제·사회·문화적으로 빠르게 발전한다.

    초나라는 당시의 선진국인 주나라의 인정을 받고 싶어 했지만, 주나라는 초를 오랑캐로 여겨 상종하려들지 않았다. 초의 지도자는 주 왕실에 작위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하자 당차게 말한다. “좋다. 올려주지 않는다면 내가 스스로 올리겠다. 우리는 만이(蠻夷)다. 그러니 주나라 왕실의 시호를 따르지 않는다.” 바로 이 사람이 강한(江漢, 장강·한수)의 맹주 초 무왕이다. 남의 인정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 초의 자긍심이 드러난다.



    一鳴驚人 一飛沖天

    춘추시대에 주 왕실은 쇠약해지긴 했으나 여전히 권위가 살아 있었다. 따라서 제환공(齊桓公)과 진문공(晉文公)은 춘추시대를 주름잡은 패자(覇者)인 동시에 여전히 주 왕실을 섬기는 일개 귀족이며 신하였다. 그러나 황하가 아닌 장강을 무대로 등장한 신진 강국 초·오·월은 모두 독자적으로 왕을 칭했다. 초장왕, 오왕 부차, 월왕 구천은 주나라의 통제를 받지 않는 독립국의 수장이 됐다. 주 왕실은 오랑캐를 무시하다가 오랑캐에게 무시당하며 권위가 땅에 떨어졌으니 자업자득이랄까. 이후 주 왕실의 권위가 살아 있던 춘추시대는 끝나고, 오로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약육강식의 전국시대가 열렸다.

    “한번 울면 사람을 놀라게 할 것이요, 한번 날면 하늘을 뚫을 것이다(一鳴驚人,一飛沖天).” 그 유명한 초장왕의 호언장담대로 초나라의 약진은 눈부셨다. 대동맥 장강을 중심으로 실핏줄처럼 무수히 퍼져나간 강과 호수는 풍부한 쌀 생산의 원천이다. 또한 후베이에는 청동기시대의 핵심 전략자원인 구리가 풍부했다. 구리는 당시 매우 값진 귀금속이라 주 왕실은 거대한 청동기물인 구정(九鼎)을 만들어 권위의 상징으로 삼았다. 그러나 풍부한 구리광맥을 장악한 초장왕은 구정을 두고 코웃음을 쳤다.

    “구정이 과연 얼마나 큽니까. 그 정도는 우리 초나라 군대의 부러진 창날만 모아도 만들 수 있습니다.”

    초장왕은 오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선진국 주나라에 꿀리지 않고, 초의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한껏 과시하며 신흥 강국의 활력과 자신감을 보여줬다. 그러나 초장왕은 그저 혈기만 왕성한 ‘막무가내 군주’는 아니었다. 그는 용맹하고 호방하면서도 치밀하고 사려 깊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전차를 타고 앞장설 정도로 뛰어난 전사이면서도 “무(武)란 ‘창(戈)을 멈춘다(止)’는 뜻”이라며 무력 사용에 신중을 기했다.

    초는 장강 일대를 급속히 장악해간다. 초에 맞설 만한 세력이 적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초가 점령지의 자율권을 보장하고 대규모 관개시설을 설치해 점령 전보다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준 것이 원인인 듯하다.

    남방의 맹주 초는 천하무적의 진(秦)에도 힘겨운 상대였다. 초 공략은 진의 천하통일 중 최대의 고비였다. 진시황은 백전노장 왕전에게 초를 정벌하려면 몇 만의 군사가 필요한지 물었다. 왕전은 강국 조(趙)나라를 10만 군사로 멸망시킨 명장이었지만, 초나라 정벌을 위해서는 60만 명이 필요하다고 했다.


    삼국시대 화약고

    진시황은 왕전이 늙어 무능해진 것으로 생각하고 장군 이신에게 20만 대군을 주어 초를 정벌케 했다. 하지만 초의 명장 항연이 그간 패배를 모르고 연승하던 진의 20만 대군을 격파한다. 이에 진시황 역시 초나라가 최강의 호적수임을 절감하며 왕전에게 60만 대군을 준다. 60만 대군을 거느린 명장 왕전도 1년이나 지구전을 펼친 끝에야 항연을 물리칠 수 있었다. 초를 멸망시킨 진은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어져 노도(怒濤) 같은 기세로 천하통일을 완성한다.

    그러나 초의 군대는 꺾였지만 정신은 꺾이지 않았다. 초의 저잣거리에는 괴이한 노래가 나돌았다. “초나라에 단 세 집만 남아도 반드시 진나라를 멸망시킬 것이다(楚雖三戶,亡秦必楚).” 과연 그 말대로 훗날 항연의 손자 항우는 진나라를 멸망시키지만, 성공의 열쇠는 실패의 문 역시 여는 것일까. 근본을 잊지 않아 성공한 항우는 근본을 잊지 못해 실패한다. 물의 나라 초에 뿌리를 둔 항우는 강남을 못 잊어 관중·중원(산시·허난) 일대를 소홀히 하다가 한의 유방에게 천하를 넘겨준다.

    한나라 때 후베이와 후난을 포괄한 지역이 그 유명한 형주(荊州), 즉 징저우다. 그러나 아직 후난은 후베이에 비해 개발이 덜 됐고 현지 이민족의 세력이 만만찮아서, 보통 형주라고 하면 후베이의 양양성, 강릉성 등을 중심으로 생각했고 후난만을 지칭할 때는 남형주라 불렀다.

    한의 치세가 저물고 군웅할거의 시대가 되자 형주는 지극히 중요해진다. 동오의 대도독 주유는 말한다. “형주는 천하의 중심에 있는 요새입니다. 그곳을 차지해야만 중원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노숙 역시 거들었다. “형초(荊楚) 땅은 밖으로는 장강과 한수를 두르고 안으로는 험준한 산과 구릉이 있으며, 견고한 성이 있고 기름진 평야는 만리나 되고, 관리와 백성은 풍부합니다. 이곳을 차지한다면 제왕의 자본이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제갈량은 융중대(隆中對)에서 형주가 천하삼분지계의 핵심임을 역설했다. “형주는 북쪽으로 한수와 면수를 두어 남해에 이르기까지 다 이로운 땅이요, 동쪽으로 오회 땅과 닿고 서쪽으로 파촉 땅과 통하니, 이곳이야말로 군사를 거느리고 천하를 경영할 만한 곳입니다.”

    형주의 중요성을 설파한 제갈량은 미묘하게 한마디를 덧붙인다. “그러나 참다운 주인이 아니면 지킬 수 없는 곳입니다.” 모든 이가 이 땅을 차지하려 다투기 때문이다. 삼국시대 3대 대전 중 2개가 바로 후베이에서 일어났다. 그 유명한 적벽대전과 이릉대전이다. 형주를 차지하기 위해 위의 조조·조인·방덕·서황, 촉의 유비·관우·제갈량, 오의 주유·여몽·육손 등 당대 최고의 명장과 지략가들이 불꽃 튀는 쟁탈전을 벌였다.

    조자룡이 백만대군을 헤치고 유선을 구하고, 장비가 조조의 백만대군을 떨게 한 장판파 역시 형주 땅이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총 120회 중 무려 72회에 등장하는 형주는 삼국시대의 화약고였다.

    기주(허베이)의 원소를 물리치고 중원의 패자가 된 조조는 숙적 유비와 손권을 제거하기 위해 형주로 진격한다. 유표의 아들 유종은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조조에게 얌전히 형주를 바친다. 단숨에 천하통일을 완수하려던 조조의 군대는 장강에서 유비-손권 연합군에 패한다. 거대한 불길이 조조의 대군을 불태워 장강의 절벽을 붉게 물들인 적벽대전이었다.



    “皇子를 형주 장관으로”

    승전 후 형주를 차지한 유비는 곧 촉을 얻고 한중왕이 되어 제갈량의 융중대를 실현하는 듯했다. 그러나 어제 촉과 연합해 위를 친 오는 이제 위와 연합해 촉을 쳤다. 유비는 여몽의 기습으로 관우와 형주를 동시에 잃는다. 유비는 관우의 복수와 형주의 탈환을 위해 전 국력을 기울여 출진했지만, 육손은 이릉대전으로 유비의 칠백리 영채를 불살라버린다.

    결과적으로 위·촉·오는 형주를 삼분하지만, 세 나라의 국력은 형주 점유율에도 반영됐다. 위와 오의 영향력이 가장 컸고 촉은 실질적으로 형주를 잃었다. 애초에 제갈량은 촉을 보급기지로 삼고 형주에서 군사를 움직이려 했다. 형주는 사통팔달의 땅이라 어디로든 치고 빠질 수 있어 신출귀몰한 병력 운용이 가능한 데다, 북으로 조금만 가면 수도 낙양을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형주를 잃자 첩첩산중인 촉에서 나갈 길은 기껏해야 세 갈래에 불과했다. 따라서 위는 침공 지점을 예측해 방어를 튼튼히 할 수 있었다. 형주를 잃음과 동시에 이미 천하삼분지계는 망가진 꼴이었다.

    후베이의 전략적 중요성은 이후 역사에서도 줄곧 드러난다. 5호 16국 시대 장강을 장악한 송나라의 왕 유유는 “형주는 장강 중류지대의 요충지다. 황자를 차례대로 형주 장관으로 임명하라”는 유서를 남겼다. 형주는 황실이 필수적으로 숙지해야 할 땅이라는 의미다.

    훗날 당나라를 이은 송나라는 국방력은 약했지만 도시와 상업의 발달이 두드러졌다. 장강 한복판에 있는 수상교통의 요지 후베이 역시 도시혁명과 상업혁명의 혜택을 입었다. 강기는 “우창의 10만 호, 석양에 낮게 드리워진 자줏빛 연기여”라며 우창의 번영을 노래했다.

    부유하되 약한 남송을 삼키기 위해 원나라가 움직였다. 조조가 장강의 물길을 따라 손권을 정벌하려던 것과 마찬가지로, 원나라의 쿠빌라이가 쇠약한 남송을 정복할 때 제일 먼저 공략한  곳 역시 후베이의 양양성이다. 쿠빌라이가 남송의 보루 후베이를 차지하자 ‘장강 중류를 장악해 하류를 제압한다’는 전략이 수월하게 달성됐다. 손쉽게 임안(저장성 항저우)까지 진격한 쿠빌라이는 남송을 멸하고 중국을 재통일한다.

    청대(清代)에 제2차 상업혁명이 일어나자 전국 각지의 상품들이 제국 전역을 오갔다. 자연스레 후베이는 각 지역의 온갖 산물이 모여드는 곳이 됐다. 후난·푸젠의 차, 안후이의 소금, 쓰촨의 약초, 산시의 목재, 동북지방의 수수·삼, 서북지방의 가죽·담배, 동남지방의 설탕·해산물·아열대 식품들이 장강 중류의 항구 한커우를 교차했다. 상업이 번성하던 항구도시 한커우에서 학문은 크게 대접받지 못했다. 19세기 한커우에는 ‘훈장’이라는 간판을 걸면 학생은 오지만 거지는 오지 않아 일거양득이라는 농담이 있었다. 훈장은 가난해서 거지가 구걸하러 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장지동의 洋務운동

    “십리에 걸쳐 돛이 늘어서 있고 수만 가게의 등불로 불야성”을 이루며 상업도시로 발전하던 우한은 청말 장지동을 만나 공업도시로 거듭난다. 장지동은 “중국의 학문을 근본으로 삼고, 서양의 학문을 활용한다(中體西用)”고 주장한 양무파(洋務派)였다. 증국번, 이홍장 등과 함께 양무운동을 이끈 장지동은 호광총독을 20년이나 맡으며 239명의 외국인을 포함해 600명이 넘는 막료를 채용했다. 장지동은 다양한 배경과 지식을 가진 신진 인재들을 활용해 후베이에 철도를 깔고 독일식 군대를 육성했으며 탄광을 개발하고 공장을 세워 ‘우한의 아버지’라 불렸다. 특히 우한에 설립한 한양철광은 중국 철강 생산의 거점이 돼 ‘동방의 시카고’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도배를 새로 한다고 썩은 집을 고칠 수는 없다. 양무운동은 중국 근대화의 기틀을 마련하기는 했지만, 청을 되살릴 수는 없었다. 청일전쟁 패배 후 이는 더욱 명확해졌다. 이제 남은 길은 청을 엎고 새 국가를 만드는 것뿐이었다.

    쑨원은 1895년 10월 광저우 무장봉기를 시작으로 고향 광둥성에서 10번이나 봉기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러나 “정성 들여 심은 나무에선 꽃이 피지 않고 무심코 꽂은 버들가지가 자라 그늘을 드리운다”던가. 전혀 예상치 못하고 의도하지도 않은 후베이 우창에서 1911년 10월 10일 무장봉기가 성공한다.

    사건의 전말은 코미디처럼 황당하다. 10월 9일 혁명파 인사들이 폭탄 제조실험을 하다 실수로 폭발사고를 일으켰다. 관군은 혁명파의 거점을 수색해 혁명파의 명단을 비롯한 서류와 무기, 자금을 압수하고, 즉시 혁명파 3명의 목을 베어 성문에 걸었다. 곧 대대적인 혁명파 색출·처형이 있을 거라는 소문이 퍼졌다.

    사실 군대 내부에 혁명파 인사가 그리 많은 것도 아니었고 더욱이 장교급 중에서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문제는 혁명파들이 만든 명단에 누구 이름이 올라갔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혁명파가 일면식 있는 사람들 이름까지 죄다 적었을 수도 있다.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던 군인들은 ‘죽지 않기 위해’ 봉기를 일으켰다. 제대로 된 지휘관도 없고 2000명의 봉기군 중 혁명파는 절반이나 될까 말까 한 오합지졸의 반란이었다.



    ‘의도치 않은 혁명’ 진원지

    다행히도 당시 호광총독 루이청은 청말의 전형적인 팔기자제(八旗子弟, 사치스럽고 방탕한 청말 기득집단)였다. 한때 말을 타고 천하를 호령하던 팔기군의 후손은 무사안일에 젖어 말도 탈 줄 모르는 겁쟁이가 됐다. 루이청은 포성이 울리자마자 잽싸게 총독부 담장에 개구멍을 뚫고 줄행랑을 쳤다. 역사가 장밍은 ‘신해혁명’에서 루이청이 당시 귀족 중에서는 그나마 유능한 인재였기에 도망이라도 쳤지, 다른 이였다면 그저 방안에서 얼어붙어 얌전히 사로잡히고 말았을 것이라고 비꼬았다.

    혁명군이 얼떨결에 접수한 우한은 보물창고였다. 상공업의 중심지로서 막대한 재부를 축적해온 후베이성의 재정예금은 은 4000만 냥에 달했다. 일찍이 장지동이 독일식 군대를 육성하고 우한을 중국 최대의 군수공장으로 만들었기에 무기도 어마어마했다. 수만 정의 소총, 산포, 야포, 요새포 등 비축 무기는 몇 개 사단을 완벽히 무장시키고도 남았다.

    민심은 불안 반, 희망 반으로 일을 지켜봤다. 분위기 탓이었을까. 언론은 혁명파의 역량을 과대평가했다. 신문들은 우한의 혁명군이 3만 명이 넘으며 병사들 모두 수년간 신식 군사훈련을 받은 엘리트라고 보도했다. 유언비어는 신화가 됐다.

    당시 청의 최정예 병력인 북양군은 진압 준비를 철저히 한다고 보름 넘게 미적거렸다. 그동안 천하의 중심 후베이에서 일어난 봉기는 동심원을 그리듯 전 중국에 퍼져나갔다. 후베이의 인접지역이 동요하자 인접지역의 인접지역이 또다시 동요했다. 허난성의 진압부대는 총 한 방 안 쏴보고 혁명군에 투항 의사를 전했고, 후난·장시를 필두로 내륙 18개 성 중 14개 성이 청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했다. 그토록 굳건했던 청 제국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쑨원은 고향인 광둥성에서 혁명을 일으켜보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해외도피를 해야 했다. 그러나 쑨원의 의도대로 광둥성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한들 과연 우창 봉기만큼 파급효과를 일으킬 수 있었을까. 광둥성은 풍요롭긴 해도 동남부 변방인 데다 남령산맥으로 타 지역과 격리돼 있다. 일찍이 광둥성에서 벌어진 아편전쟁도 굴욕적 패배이긴 했지만, 변방의 일이라 민심이 그리 크게 동요하지도 않았다. 난징을 점령한 태평천국운동이 오히려 청 조정에 심각한 타격을 줬다.

    쑨원 등 혁명파들이 이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다만 후베이 경우는 워낙 중심이라 일단 반란이 일어나면 즉시 사방에서 진압하러 올 것이기에 혁명이 일어난들 지킬 수 없다고 봤다. 그러나 세상 일이란 의도대로 되지도 않고, 의도를 항상 뛰어넘음을 신해혁명에서도 볼 수 있다. 또한 우창 봉기에서도 후베이의 지리적 특성은 다시 한 번 빛을 발했다.


    머리 아홉 달린 새

    ‘중국 지리의 중심’이라는 말은 근사하게 들린다. 그러나 민초의 처지에서 병자필쟁지지(兵者必爭之地)요 용무지지(用武之地)인 땅에서 사는 것은 결코 녹록지 않다. 어제는 위나라, 오늘은 촉나라, 내일은 오나라 군대가 들어오고, 시시각각 정세가 변한다. 후베이의 소설가 팡팡(方方)은 ‘사무치는 사랑’에서 삶의 고충을 토로한다. “세상은 이렇게 크고 어지럽고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 누구라도 결국 코끼리를 만지는 장님이 아닌가.” 오늘 당장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는 후베이의 삶은 “어디서 와서 또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철로와 같은 운명이다.

    이런 곳에서 살아남으려면 눈치가 빠르고 임기응변에 능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살아남으려는 의지와 투쟁심이 필요하다. 사마천은 “대체로 형초(荊楚) 지역 사람들은 날쌔고 용맹스럽고 가볍고 사나워서 난을 일으키기를 좋아했다는 것은 예부터 기록된 바”라고 말했지만, 실상 형초 사람들이 난리를 일으키기 좋아한다기보다 정작 자신들은 가만히 있어도 난리가 나고, 일단 난리가 나면 잽싸게 대처할 줄 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후베이인의 과감함과 눈치, 호전성은 중국에서 정평이 나 있다. 그래서 “하늘에는 구두조(九頭鳥), 땅에는 후베이의 늙은이”라는 말이 있다. 머리가 아홉 개나 달린 새처럼 눈치가 빠르고 교활하다는 말이다.

    후베이인은 거친 세상을 살다보니 “사람이 너무 착하면 다른 사람에게 속고 말이 온순하면 사람이 올라타게 마련(人善被人欺,馬善被人騎)”이라는 것을 배웠다. 따라서 매사에 기선을 제압하고 이기려든다. 그래선지 입이 매우 거칠다. 툭하면 “갈보자식(婊子養的)”이라고 욕하는 우한 사람을 보고 역사가 이중톈은 재치 있게 놀린다.

    “우한이 무슨 기생 집합소도 아니건만 왜 그렇게 ‘창녀’가 많단 말인가. 정말 기이한 일이다. (…) 우한 사람들이 무엇인들 무서워하겠는가. 그들은 자기 엄마라도 욕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실제로 이런 욕은 후베이 출신 작가의 소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등장인물이 친구에게 “요즘 어떤 창녀랑 붙어먹기에 통 안 보이냐?”라고 인사하면, 친구는 이렇게 맞받아친다. “이 어르신께서 네 엄마랑 놀아주느라 바빴다.”

    이런 곳에서 욕을 안 하고 말이 없으면 후베이인은 오히려 이상하게 본다. 팡팡의 소설 ‘풍경’에서 한 가족의 일곱째 형은 매우 과묵한 성격이었다. 문화대혁명의 하방(下放)운동 때문에 그가 후베이의 시골에 내려가서 말없이 일만 하자 동네에서 희한한 평판을 얻게 된다. “마을 사람들이 처음에는 일곱째 형이 대단히 성실한 젊은이라고 하더니, 나중에는 정말 음흉한 사람이라고 수군거렸다. 짖지 않는 개가 사납다는 것은 세상 사람 모두가 아는 교훈이라는 것이다.”



    강호 협객 꿈꾼 民草들

    그러나 이토록 매사에 긴장하고 사는 삶은 얼마나 피곤한가. 살얼음판을 걷듯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세 번 돌아보는 마음(一步三回頭)’으로 살아도 현실은 여전히 힘겹고 팍팍하다. 후베이 소설가 츠리(池莉)의 ‘번뇌 인생’에서 한 사람이 출근길에 말한다. “어떤 젊은 시인이 시 한 수를 썼는데, 단 한 글자입니다. 기발해요! 들어보세요. 제목은 ‘생활(生活)’, 내용은 ‘그물(網)’. 이 세상에 그물 속에서 생활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살아서는 땅강아지나 개미 같고, 죽어서는 먼지와 같은” 삶을 견디기 위해, 후베이인은 어떤 탈출구를 찾았을까. 일단 고개를 들면 아름다운 자연이 펼쳐져 있다. 장강은 푸른 물결이 넘실대고, 사방에는 호수가 있다. 신선이 사는 듯한 선눙자(神農架)와 우당산(武當山), 장강의 협곡 싼샤(三峽)는 어떠한가.

    힘겨운 삶과 아름다운 자연은 도가(道家)의 양대 원천이 됐다. 삶의 번뇌를 모두 벗어던지고 자연과 일체가 되는 삶을 꿈꿨다. 노자란 인물은 실존 여부가 불확실하나, 후베이는 노자를 초나라 사람으로 여긴다. 장자는 안후이 출신이기는 하나, 당시 안후이는 초나라 영역이었다. 즉 노장(老莊) 사상은 강남의 초나라에 뿌리를 둔다.

    그래서 후베이에는 노자를 빗댄 말이 많다. 거드름 피우는 친구에게는 “노자가 사람으로 만들어주니 아예 노자랑 놀려고 한다”고 꼬집고, 천방지축인 친구에게는 “제멋대로 살려면 노자나 찾아가 보시지”라고 하며, 싸울 때는 “노자가 죽어도 난 절대 양보 못해!”라고 외친다.

    그러나 상상 속에서도 속세를 완전히 초월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은원(恩怨)의 번뇌를 끊지 못하는 평범한 민초들은 억울한 일도 고마운 일도 톡톡히 되갚아주고 싶었다. 속세의 법률 따위는 따르지 않되 속세를 완전히 떠나지는 않고, 속세와 자연 사이를 마음대로 오가며 노니는 존재. 칼 한 자루를 품고 거친 세파를 헤쳐가며 은혜도 원한도 통쾌하게 열 배로 되갚아주는 존재. 민초들은 강호의 협객을 꿈꿨다.

    후베이인은 실제의 삶에서도 강호의 규칙을 따른다. 중국인들은 의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후베이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베이징에서는 관청에 있는 사람의 말을 듣고, 광둥에서는 돈 있는 사람의 말을 들으며, 후베이에서는 친구가 많은 사람의 말을 들으면 된다.” 각별한 친구(梗朋友)를 팔아먹는 사람은 물을 거스르는 것처럼 본성에도 어긋나고 지극히 어리석다 하여 ‘반수(反水)’라고 한다.

    물론 강호의 규칙이 꼭 좋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강호는 힘이 지배하는 사회다. 따라서 용기와 힘이 있는 사람이 두목(草頭王)이다. 상하이의 만원 버스 승객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공간을 찾아내 서로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하지만, 우한의 만원 버스 승객들은 기선제압하듯 몸싸움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중국인들은 이런 평가도 내린다. “우한인은 같이 걸어가면 절대로 남보다 앞서서 걷지 않는다. 예의를 차리려는 게 아니라 앞서서 걸으면 위험과 책임이 따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생활 속에 파고든 강호의 조심성이다.



    2개의 디트로이트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후베이는 매우 역동적인 땅이다. 일찍이 연해 지역에 개혁·개방의 수혜가 집중됐을 때, 후베이는 내륙 지역 중에서 가장 빨리 경제가 발전했다. 장강을 따라 난징, 상하이와 연결되고, 철로를 따라 베이징, 광저우와 연결되는 지리적 이점 덕분이다. 후베이는 장강의 수로를 활용하는 연강교통대동맥(沿江運輸大通道)의 중심이며, 장강중류도시군의 중심이다.

    2015년 중국 국무원은 장강 중류의 후베이 우한, 후난 창사, 장시 난창 세 도시를 삼각벨트형 특대형 도시권으로 개발한다고 발표했다. 옛날 초나라의 중심이던 과거를 재현하려는 것일까. 삼각 벨트의 맹주가 되려는 듯, 우한이 가장 적극적으로 대규모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우한 시내의 공사판만 7000개가 넘는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도시 개발에 적극적이던 우한은 2012년 상반기 기준 정부 채무액이 2000억 위안(약 35조 원)이 넘어 ‘중국 최고의 부채 도시’로 꼽힌 바 있다.

    그러나 우한의 질주는 여전히 거침없다. 지난해 우한은 향후 5년간 2조 위안을 도시 개발에 퍼부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는 영국이 20년간 전국 인프라 건설에 투자할 3750억 파운드(약 624조 원)의 절반이 넘는 액수다.

    ‘중국의 디트로이트’를 꿈꾸는 우한이 ‘자동차의 도시’인 디트로이트가 될 지, ‘파산도시’ 디트로이트가 될지, 초나라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후베이가 과감한 투자의 성공 사례가 될지, 과잉투자의 실패 사례가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김 용 한



    ● 1976년 서울 출생
    ● 연세대 물리학과, 카이스트 Techno-MBA 전공
    ● 前 하이닉스반도체, 국방기술품질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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