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호

조선의 아버지들

예법보다 건강 강조 과거시험 ‘첨삭지도’

‘학문적 자유인’ 박세당의 극진한 아들 사랑

  • 백승종 |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chonmyongdo@naver.com

    입력2016-05-24 14:5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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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숨보다 예법(禮法)을 중시하던 성리학의 시대였지만, 박세당이 우선시한 건 자식이었다. 성현(聖賢)의 가르침과 예절도 그의 지극한 아들 사랑엔 미치지 못한 듯하다.
    박세당(朴世堂·1629~1703)은 17세기의 학계를 뒤흔든 풍운아였다. 논란에 휩싸인 그의 저술은 훗날 ‘서계집(西溪集)’(16권 8책)으로 정리됐다. 그중에서도 특히 ‘사변록(思辨錄)’은 논자들의 뜨거운 관심거리였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엔 왜란과 호란의 후유증이 심했다. 그리하여 박세당은 현실 타개책을 심각히 고민했고, 그 과정에서 ‘사변록’이 탄생했다. 책의 내용은 참신했다. ‘놀고먹는 양반을 없애자’ ‘사회개혁을 가로막는 고답적 학문은 더 이상 추구할 가치가 없다’ ‘주자(朱子)도 틀린 점이 많다’…. ‘사변록’의 저변엔 이런 주장이 깔려 있었다.

    박세당은 ‘학문적 우상’을 일체 부정했다. 학문적 금기도 거부했다. 당대 성리학자들이 송나라 주희(朱熹)를 신성시하는 분위기를 정면으로 돌파했다. 주희의 학설에 과감히 도전했고, 성리학자라면 누구나 비판하는 ‘노자’ ‘장자’와 ‘불경’도 진지한 학문적 검토 대상으로 삼았다. 결과적으로, ‘이단’의 학설로부터도 많은 가르침을 얻었다. 그야말로 학문적 자유를 실천한 선구자였다.



    “仁과 義 끊어야 慈孝 회복”

    17세기 한국 사회는 송시열(宋時烈·1607~1689)을 비롯한 정통 성리학자들의 세상이었다. 그들 노론은 성리학의 무오류를 고집하며 박세당의 진취적 학풍을 험하게 비판했다. 박세당과 그의 선배 윤휴(尹鑴·1617~1680) 등에게 그들은 ‘사문난적(斯文亂賊)’, 즉 유교의 가르침을 문란하게 만드는 죄인이라고 낙인을 찍었다.



    자연히 박세당의 삶엔 영욕이 교차했다. 그가 세상의 인정을 받을 때도 있긴 했다. 그러나 영예는 짧고, 고통은 길게 이어졌다. 사후까지 심한 모욕이 뒤따랐다.

    대학자 박세당. 아버지로서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서계집’ 제17권엔 세 아들에게 보낸 그의 편지가 여러 장이다. 특히 둘째 아들 박태보(朴泰輔·1654~1689)에게 보낸 편지가 많지만, 일일이 소개하기엔 지면이 허락지 않는다. 이 글에선 박세당이 자식들에게 보낸 몇 통의 편지를 함께 읽으며, 아버지의 애틋하고 깊은 정을 엿볼 뿐이다.

    ‘도덕경’ 제19장에 따르면 “인(仁)과 의(義)를 끊어야 사람마다 효성[孝]과 사랑[慈]을 회복할 수 있다.” 자연의 이치는 본래 어버이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식은 효성으로 보답하기 마련이다. 중국 고대엔 바로 이 ‘자효(慈孝)’를 인륜의 토대로 삼았다. 공자와 맹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유가들이 순(舜) 임금의 효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부모가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하는가 하는 문제는 사회적 관심사에서 제외됐다. 고소설 ‘심청전’만 해도 그렇듯, 딸의 목숨을 앗아간 아버지 심 봉사의 욕심은 심판의 대상이 아니었다. 유교 사회는 자식의 행동만 감시했다. ‘효성을 다하는가’만 문제 삼았지, 자식에 대한 부모의 무관심과 무책임 따위는 사회적 이슈가 되지 못했다.

    이러한 유교 사회엔 권위적이다 못해 폭력적인 가장이 많았다. ‘엄부(嚴父)’가 넘쳐났고, ‘자부(慈父)’는 드물었다. ‘도덕경’에서 “인(仁)과 의(義)를 끊어야”, 곧 유교를 물리칠 때 “효성[孝]과 사랑[慈]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그래서 일리가 있는 지적이었다.



    곡하지 말라, 책 읽지 말라

    도교에도 이해가 깊었던 박세당은 결코 엄한 아버지가 아니었다. 대다수 성리학자가 목숨보다 예법(禮法), 즉 크고 작은 예절을 중시하는 풍조가 만연하던 시대의 한복판에서 그는 예절보다 자식의 건강을 챙겼다. 자식의 목숨이 성현(聖賢)의 가르침보다 단연 우선이었다.

    ‘그런 생각쯤이야 누구나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의 지체 높은 양반들이 박세당처럼 생각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설사 속생각이 그러했더라도 글로 적어 여보란 듯 후세에 전한다는 건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1666년 박세당이 상중(喪中)의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자. 유교, 곧 ‘인의지학(仁義之學)’에 매이지 않는 그의 초연함이 뚜렷이 드러난다. 사랑이 넘치는 자애로운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태보(泰輔)는 두통으로 자주 고생하고, 너(큰아들, 박태유)는 또 목이 쉬는 실음증(失音症)과 숨이 가쁘고 헐떡거리는 데다 기침을 계속하는 천촉증(喘促症)에 시달린다 하니, 내 걱정이 끝도 없다. 실음증은 큰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천촉증은 상중인 네 건강을 몹시 걱정하게 하는 증세가 틀림없다. 무리하게 책을 읽지 마라. 그리고 네 원기가 부족하니, 아침저녁으로 소리 내어 울고 곡하는 것도 그만두어라.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곡하고 우는 데 달려 있지 않다. 너는 이 점을 꼭 명심하기 바란다.


    그 무렵 박세당은 아내 의령 남씨를 잃고 슬픔에 젖어 있었다. 아들들은 어머니의 묘소를 지키며 남은 효성을 다하고 있었다. 박세당은 아들들이 지나치게 상심한 나머지 건강을 잃어버린 것을 크게 염려했다. 조선시대엔 상장(喪葬)의 예절을 지나치게 엄격히 고집하다가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인종(재위 1544~1545)만 해도 부왕의 상중에 사망했다. 그런 사실을 모를 리 없었던 박세당은 아들들에게 무슨 변고라도 일어날까봐 걱정이 태산 같았다. ‘예법도 무시하라’ ‘독서도 중지하라’는 아버지의 따뜻한 음성이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숙명 같은 가난

    세상과 뜻이 맞았더라면 이 한 가지 걱정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박세당은 주류가 아니었다. 학문의 자유를 지향하는 그의 사상적 취향으로 보나, 그의 집안이 속한 소론의 처지로 보나 벼슬과는 한참 멀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전토가 없지 않았으나 전쟁의 참화를 겪은 지 오래지 않아 대체로 황폐했다. 게다가 그때는 기후마저 고르지 못해 소출이 적었다. 박세당은 자주 끼니를 염려하는 처지였다.


    생계가 곤란해서 매우 염려스럽다. 하지만 걱정해도 소용없는 일인 줄 알고 있다. 더는 아무 생각도 않으려 한다.


    박세당은 1666년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가난의 고통을 털어놓으며 체념한 것 같은 태도를 보였다. 후대의 실학자 이익이었다면 황무지에 콩이라도 열심히 심고 가꿔 두부도 만들어 먹고 콩죽이라도 끓여 끼니를 해결할 방도를 찾았을 것이다. 정약용 같으면 텃밭에 과실나무도 심고 원예작물이라도 가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박세당의 머리엔 그런 현실적 해결책이 좀체 떠오르지 않았다.

    박세당은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숙명으로 여겼다. 굶주린 배를 끌어안고서도 이른바 탐심(貪心)에 휘둘리지 않고 참아가는 것, 그 밖의 뾰족한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빈곤에 시달리던 조선시대의 허다한 유생들과 전혀 다름이 없었다. 1677년 10월 12일, 49세의 박세당은 큰아들 박태유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종이 돌아오는 편에 가져온 편지를 잘 받았다. 네가 (새어머니를) 시봉(侍奉)하며 잘 지내고 있는 줄 알게 되어 내 마음이 편해졌다. 그런데 생계의 곤란함은 너나 나나 마찬가지라서 몹시 걱정스럽고 걱정스럽구나. 이 세상의 이러한 근심거리가 과연 언제쯤이면 사라질까. 머나먼 상고시대, 평화롭게 살며 초가집 처마 밑에서 배를 두드리며 사시던 분들이야 우리처럼 쓸데없는 생각 때문에 마음을 어지럽히실 일이 없으셨으리라.


    가을걷이가 끝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그런데 벌써 식량이 다 떨어졌는지 박세당의 입에서 가난 타령이 흘러나왔다. 그 무렵 그는 당쟁을 피해, 조상이 물려준 약간의 전답이 있는 양주 석천동으로 옮겨 살았다. 한때 지방관으로 다시 부임해 흉년으로 고생하는 백성들을 구휼하기도 했지만, 그는 석천동에 머물 때가 많았다. 종을 데리고 손수 농사지어 식량을 마련하고, 학문을 연구하는 것으로 그는 만족했다. 가난은 그의 일생을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1682년 2월 12일에도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 춘궁기의 곤란을 호소했다.


    이곳의 아비는 그럭저럭 지내고는 있다. 양식은 장작을 팔아서 겨우 마련하고 있다마는 과연 오래 버틸 수 있을는지 모르겠구나.


    본래가 허세라곤 모르는 진솔한 사람, 박세당은 때로 장성한 아들들에게 자신의 경제적 무력감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고통을 말했다. 솔직한 한탄과 걱정이 더러는 최상의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그는 알았던 것일까.


    역사에서 삶의 지혜를

    엄밀한 의미로 박세당은 철학자요 윤리학자였다. 역사가나 정치가는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도 역사란 소중한 지혜의 보물창고였다. ‘누구나 역사가를 꿈꿀 필요는 없다. 그래도 역사적 지식은 누구에게든 삶의 중요한 밑천이다.’ 1666년 12월 9일, 큰아들에게 보낸 박세당의 편지에서 그런 생각의 자취가 발견된다.


    네가 역사책을 읽겠다고 했느냐. 이 부분이야말로 전부터 네게는 몹시 부족했던 것이다. 이제 네가 그쪽에 뜻을 둔다면 필경 크게 유익됨이 있을 것이다. 나로서는 정말 위안이 되고 위안이 되는 일이구나.

    그런데 말이다. 네가 역사책 읽는 법을 아느냐. 한꺼번에 죽 읽기만 하고 핵심적인 내용을 마음속에 간직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단다. 낮 동안에 읽은 내용을 그날 밤중이나 이튿날 아침에 조용히 앉아 곰곰이 되새겨보기를 바란다.

    또, 네가 읽으면서 흐뭇해한 대목, 역사 속 인물의 언행 가운데서 본받을 만한 점 또는 경계할 일을 찾아내어 가슴 깊이 간직하기를 바란다. 이런 방법으로 역사책을 읽는다면 금방 잊어버리지도 않게 되고 네 자신의 언행에 보탬이 적잖을 줄로 믿는다. 역사책을 읽을 때는 이런 점들을 잘 유념해야 하는 것이다.


    박세당은 진작부터 큰아들에게 역사책 읽는 법을 가르치고 싶었으나 참고 기다렸다. 아버지는 무엇이든 강요하지 않고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큰아들이 역사책을 읽겠노라, 스스로 의지를 세우자마자 기꺼이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박세당에게 역사 자체는 일관되게 진보 또는 퇴보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보기에 역사란, 인간의 간접경험을 확대시켜주는 것, 인생의 교훈을 주는 처세서 같은 것이었다.   



    벼슬은 생계수단

    박세당은 32세 되던 1660년(현종 1) 증광문과에 장원급제했다. 그 뒤 6, 7년간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에 종사했다. 1668년엔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격심한 당쟁만 아니었다면 일찌감치 벼슬길에서 물러날 이유가 없었다.

    자신은 현실 정치에서 고개를 돌렸지만, 아들들에겐 과거시험을 보라고 권유했다. 공자도 말했듯, 선비에겐 벼슬이 곧 생계를 유지하는 방법이었다. 그것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길이요,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 첩경이었다.

    그런데 과거에 합격하려면 글솜씨가 탁월해야 했다. 글씨도 전아(典雅)해야 했다. 박세당은 1675년, 둘째 아들 박태보에게 보낸 편지에서 독서와 글씨 연습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밤새 평안했느냐. 특별히 다른 일이 없으면, (선비는) 책 읽고 글씨 쓰기를 연습하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되느니라. 이 두 가지가 네게는 마치 농부가 호미와 쟁기를 쥐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스스로를 엄히 타일러 날마다 열심히 연습해야 한다. 만약 이를 중지하면 장차는 남의 도움을 비는 처지가 되고 말 것이다.


    글쓰기는 선비의 필수 교양일 뿐만 아니라, 생계의 수단이라고 본 것이다. 농부에게 호미와 쟁기가 생업을 영위하기 위한 필수 도구이듯, 선비에겐 글솜씨가 절대적이라고 봤다. 그래야만 과거에서 합격을 바랄 수 있었다. 자상한 박세당은 편지의 형식을 빌려 아들 박태보에게 작문 요령을 지도하기도 했다.
     

    과거시험 볼 날이 멀지 않았구나. 공부에 힘을 쏟아야 할 텐데 몸이 아프다니 어찌 마음대로 될 수 있을까 싶다. 그런데 글짓기를 할 때는 결코 생소하고 괴상한 문체를 쓰는 병통을 고집하지 말라. 문맥이 평이하고도 순조롭게 흘러가도록 힘써야 한다. 그러면 문체가 절로 아름다워질 것이다. 특히 글의 앞뒤[首尾]를 상세히 잘 따져서 귀결점이 있게 해야 맥락을 잃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글짓기의 요체다.

    네가 (전에) 작성한 시권(試券, 과거시험 답안)의 글씨도 문제구나. 아주 거칠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직도 서툰 점이 없지 않다. 글짓기를 하지 않을 때는 반드시 ‘화담비(花潭碑)’나 ‘조아비(曹娥碑)’를 보고 베껴라. 그 일에도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 글씨를 쓸 때는 크게만 쓰려고 하지 말고, 시권의 크기에 맞게 쓰는 연습을 하기 바란다. 과거에 익힌 글씨체는 일단 포기하는 것이 좋겠다. 글짓기에 있어서는 간략하게만 쓰려 하지 말고 (표현과 내용을) 풍부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아들의 논술선생

    젊은 시절 문과에 장원급제했고 학자로서 명망이 높았던 박세당, 그로서도 아들을 과연 어떻게 지도해야 과거시험 합격이 가능할지 고충이 많았던 모양이다. 궁리 끝에 아버지는 아들의 낙방한 시험 답안을 분석해가며 글짓기와 글씨를 훈수했다. 이를테면 ‘첨삭지도’의 노고를 아끼지 않는 논술선생 역할을 아버지가 자임한 셈이다.   

    그가 편지에서 언급한 ‘화담비’는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비석이다. 박민헌(朴民獻·1516~1586)이 짓고 조선 중기의 명필 한석봉(韓石峯), 곧 한호(韓濩·1543~1605)가 글씨를 쓴 비문이다. 또 ‘조아비’란 그 내용도 “절묘하고 훌륭한 글[絶妙好辭]”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중국의 저명한 명필 왕희지가 글씨를 썼대서 이름이 났다. 둘 다 일종의 서예 교본으로서 조선시대 선비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아버지의 정성스러운 지도는 헛되지 않았다. 큰아들과 둘째 아들은 모두 대소과에 급제했다. 장남 박태유는 1666년(현종 7) 진사시에 합격했다. 차남 박태보도 1675년(숙종 1) 생원시를 거쳐 이태 뒤인 1677년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1681년(숙종 7)엔 장남도 문과에 합격했다.

    두 형제는 소론의 기대주였다. 그러나 당쟁에 휘말려 차례로 화를 입었다. 박태유는 노론의 핵심인 김익훈과 정면충돌해 고난을 겪었다. 함경도 변방으로 좌천된 그는 곧 병으로 사직했다(1695년, 숙종 21).

    박태보의 운명은 더욱 비참했다. 1689년의 기사환국, 즉 남인이 장희빈의 아들(훗날의 경종)을 세자로 책봉하는 문제를 일으켜 재집권하자, 그는 인현왕후의 폐위를 강력히 반대했다. 박태보는 그 일로 심한 고문을 받았다. 박세당은 달려가 아들을 간호했으나 죽고 말았다. 아버지는 아들의 주검을 소거(素車, 상여)에 태워 시골로 돌아왔다. 그의 아픈 가슴을 뉘라서 위로할 수 있었겠는가.

    일찍이 어느 큰선비가 말했듯, 벼슬길이란 바다와도 같았다. 거친 풍랑이 일면 배가 뒤집히기 일쑤다. 부귀영화를 멀리한 박세당도 당쟁의 해일(海溢)에 휘말린 뒤 안전한 곳을 발견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결국 ‘사문난적’으로 내몰렸다. 

    백 승 종


    ● 1957년 전북 전주 출생
    ● 독일 튀빙겐대 철학박사
    ● 서강대 사학과 교수, 독일 튀빙겐대 한국 및 중국학과 교수, 독일 막스플랑크 역사연구소 초빙교수, 프랑스 국립고등사회과학원 초빙교수
    ● 現 한국기술교육대 대우교수
    ● 저서 : ‘백승종의 역설’ ‘마흔 역사를 알아야 할 시간’ ‘금서, 시대를 읽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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