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호

밀착취재

현정은_‘엘리베이터’ 에 기대 ‘아산’ 지킬 처지, 최은영_10억 아끼려다 100억+α 토해낼 판, 이어룡_창업주 외친 ‘동업자 정신’ 무너져, 양귀애_대한전선과 결별… “자선활동만”

재벌 여회장님이 사는 법

  • 송홍근 기자 | carrot@donga.com, 강지남 기자 | layra@donga.com

    입력2016-06-01 16:47:1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서울 성북구 성북동 330번지는 울창한 숲이 장관을 이룬다. 산자락이 병풍처럼 감싸고 돈다. 1990년대 전후로 재계 거물들이 하나둘 성북동으로 모여들었다. 풍수지리의 5대 요소인 용혈사수향(龍穴砂水向)을 두루 갖췄다는 풍수사들의 평가가 있다.

    현정은(61) 현대그룹 회장과 최은영(54) 전 한진해운 회장(유수홀딩스 회장)의 집이 성북동 330번지에 있다. 도보로 6분 거리, 361m 떨어졌다. 두 회장은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아픔을 겪었으며, 겪고 있다.

    현 회장, 최 회장은 남편을 여읜 여성 경영인이다. 슬픔을 딛고 일어나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2009년 이전, 해운업이 잘나갈 때는 ‘여장부’로 불렸다. “해운업은 여성 경영인에게 알맞다”는 말도 회자됐다.



    남편 여읜 동병상련 女회장들

    이어룡(63) 대신증권 회장, 양귀애(69) 전 대한전선 명예회장도 남편이 작고한 후 회장직을 물려받았다. 두 사람 또한 회사가 잘나갈 때는 ‘부드러운 카리스마’ ‘섬세한 리더십’이라는 호평을 들었다.



    양 전 회장은 대한전선과 완전히 결별했다 “자선활동만 조용히 한다”는 전언이다. 남편이 키운 회사가 아들 손에 의해 팔려나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분식회계 사건에 연루되는 불명예도 안았다.

    이 회장의 대신증권은 한때 증권업계에서 ‘빅3’로 통했으나 지난해 말 기준 자기자본이 1조6800억 원으로 10대 증권사 중 끄트머리다. “실적 부진에 기인한 고통을 분담하기는커녕 오너 일가가 잇속만 챙긴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한다.

    이들 네 명의 여성 회장은 조선시대 어느 홀어미가 지은 시조에 공감할 만큼 생각이 복잡할 듯하다.

    ‘여자의 일생처럼 설운 건 없으오리/ 임 예니 이 시름이 다시금 외로울제/ 버들엔 꾀꼬리 울고 봄도 짙어가더라’(백화당 주인, 홀어미의 탄식)



    “호황 때 체질 개선 소홀”

    “2010년까지 매출 20조 원을 달성해 재계 10위권 안에 들겠다.”

    2008년만 해도 현정은 회장의 포부는 이렇듯 컸다. 그는 이화여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페어리디킨스대에서 인간개발 분야를 전공했다. 2003년 8월 갑자기 타계한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의 뒤를 이었다. 벌써 13년 간 경영인으로 활동한 터라 ‘왕회장(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며느리’ ‘정몽헌 전 회장 부인’보다 ‘현대그룹 회장’이라는 직함이 귀에 더 익숙하다.  

    현대그룹의 주력 계열사 현대상선의 운명은 채권단의 손으로 넘어갔다. 현대증권도 매각 작업이 진행 중이다. 현대그룹에서 ‘캐시 카우’ 역할을 할 회사는 현대엘리베이터만 남았다. 현대엘리베이터를 잘 경영하면서 정몽헌 전 회장의 유업(遺業) 격인 현대아산을 지켜내야 할 처지다.

    현대아산의 대북사업은 정주영→정몽헌을 적통(嫡統)으로 여기는 현대그룹의 상징과도 같다. 하지만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 이후 지금껏 대북사업은 막혀 있다. 남북관계 경색 탓에 돌파구를 찾기도 쉽지 않다. ‘현정은의 현대그룹’은 2000년대 중후반만 해도 언젠가 매물로 나올 현대건설(2011년 현대차그룹이 인수)과 하이닉스(2012년 SK그룹이 인수)를 인수해 옛 영화를 되찾으려 했으나 꿈을 이루지 못했다.

    현 회장에 대한 평가도 180도 달라졌다. “여성 특유의 감성”으로 “서번트(servant) 리더십을 적절히 구사한다”는 찬사는 “경험 없이 ‘회장’을 물려받은 초보 경영인의 실패”라는 비판으로 바뀌었다.

    현대그룹 쇠락의 근본 원인은 경기불황 탓에 해운업이 ‘죽으면서’ 주력 계열사인 현대상선 실적이 곤두박질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현 회장의 경영 능력이 사태를 더 악화시켰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호황기에 체질 개선 등의 노력을 게을리 했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2003~2008년 해운업 호황기에 대형 선박을 발주하는 등 미래를 대비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해운 경기가 악화하기 시작한 후에도 그룹연수원 신축, 남산 반얀트리호텔 인수, 현대건설 인수전에 참여하는 등 덩치를 키우는 일에 더 집중했다. 현대건설 인수 실패는 시숙(정몽구 현대차 회장)과의 다툼에서 패배한 것이기도 했다.  



    꽉 막힌 대북사업

    현대그룹 전직 임원은 이렇게 주장했다.

    “뿌리가 없는 외부 인사를 데려와 회사의 주요 결정을 맡긴 게 문제였다. 한번 믿은 사람에게만 일을 맡기는 방식이었다. 20~30년 현대그룹에서 녹을 먹는 사람들에겐 로열티가 있다. ‘우리 회사’라는 공감대를 지녔다. 그들의 목표는 당연히 ‘사장’에 오르는 것이다. 그런데 외부에서 고위 경영자를 영입하니 어떤 생각이 들겠나.

    정주영 회장의 ‘가신(家臣) 경영’ 방식의 단점도 적지 않겠지만, 장기적 안목으로 회사를 보는 것과 외부에서 온 2년짜리, 3년짜리 사장이 단기간에 뭔가를 보여주는 식의 경영을 하는 것은 천지차이다. 해운 경기의 앞날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고 비싼 가격에 장기 용선(傭船) 계약을 맺은 게 대표적 사례다. 경기 흐름에 민감한 해운업은 복합적인 경영 능력이 필요한 분야다.”

    이 회사의 또 다른 관계자는 “현 회장은 현대건설 인수전을 진두지휘한 하종선 전 부회장 등의 경우처럼 한번 사람을 믿으면 그 사람의 얘기만 듣는 측면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정몽구 회장의 ‘예측불허 인사’를 두고 말이 많았는데, 결국 그 같은 인사가 옳았다는 것을 성과가 입증하지 않았느냐”면서 “박근혜 대통령도 비슷한 비판을 듣지만, 디바이드 앤드 룰(divide and rule, 분할통치)에서 미흡한 부분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2010년 이후 현대상선의 대표를 맡은 이가 6명에 달한다. 현대그룹 측은 경영 실적이 부진해 문책했다고 밝히지만, 대표 재임 기간이 평균 1.5년에 불과하다는 건 눈여겨볼 대목이다.  

    현대그룹 내부에서 이른바 ‘실력자’라는 사람을 두고 구설이 불거진 적도 있다. 그룹에서 아무런 직함도 없는 황두연 아이에스엠지 대표가 현 회장과의 친분을 바탕으로 경영에 관여한다는 내용이었다. 현대그룹 측은 이 같은 지적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한다.

    금강산 관광 등 대북사업이 개점휴업 상태인 것은 북한의 도발과 극도로 경색된 남북관계 탓이지만 현 회장의 정무적 판단력이 미흡했다는 지적도 있다. 일례로 현 회장은 2009년 8월 10~17일 평양 방문 때 김정일을 만나 △금강산 관광의 조속한 재개 및 비로봉 관광 개시, 금강산 관광 편의와 안전 보장 △육로통행 및 체류 관련 제한 해제 △개성관광 재개 및 개성공단 활성화 △백두산 관광 개시 △추석 때 남북 이산가족 상봉 등 5개 항에 합의했다. 당시 청와대는 이 같은 합의 내용에 불쾌함을 드러냈다. 정부가 협의할 일을 일개 기업인이 합의하고 왔다는 것이었다. 정권과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인사를 현대아산 사장에 앉히는 등의 시도도 있었으나 대북사업의 돌파구를 마련하지는 못했다.  

    현 회장은 지난 3월 18일 현대상선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났다. 경영을 맡은 지 13년 만에 주력 계열사인 ‘상선’은 만신창이가 됐고 ‘증권’은 잃었다. ‘엘리베이터’에 기대어 선대 회장들의 유업인 ‘아산’을 지켜내야 할 처지가 된 것이다.  



    ‘여걸’에서 ‘먹튀’로

    최은영 유수홀딩스 회장은 한진해운 경영권을 잃었다. ‘여걸’이라는 평가는 온데간데없고 ‘먹튀’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10억 원 아끼려다 100억 원 +α를 토해내야 할 옹색한 처지이기도 하다.   

    금융위원회 자본시장조사단(이하 조사단)은 주가조작 등 증시 불공정거래 조사를 전담하는 조직이다. 금융위는 2013년 9월 조사단을 설립하면서 패스트트랙(fast track, 조기 이첩)을 도입했다. 금융 당국의 고발 조치를 생략하고 검찰이 조사단의 조사 자료를 토대로 곧바로 수사에 들어가는 제도다. 금융위에 따르면 패스트트랙 등의 도입으로 평균 223일 소요되던 사건처리 기간이 157일로 30%가량 단축됐다.

    따라서 최 회장에 대한 조사는 조사단과 검찰이 호흡을 맞춰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벌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사단은 조사에 착수한 지 2주 만인 5월 10일 검찰에 최 회장에 대한 수사를 의뢰했고, 이튿날 검찰은 최 회장의 사무실과 자택 등 7~8곳을 압수수색했다. 금융위 관계자는 “조사단이 이 사건보다 빨리 처리한 사건은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최 회장은 한진해운이 채권단 자율협약을 신청할 것이라는 내부 정보를 미리 알고 손실을 회피하려는 목적으로 본인과 자녀의 보유 주식 전량을 매각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자율협약 신청 발표는 4월 22일에 했는데, 최 회장과 그의 두 딸은 4월 6일부터 22일까지 9차례에 걸쳐 주식 66만9248주를 팔아 약 30억 원을 챙겼다.

    한진해운 주가는 자율협약 신청 발표 전 3100원을 웃돌았으나 발표 직후 급락해 2000원 아래로 떨어졌다. 발표 전에 미리 팔아 10억~15억 원의 손실을 막은 셈이다. 최 회장의 혐의가 사실로 밝혀진다면 그는 자본시장법(제443조 제1항)에 따라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회피한 손실액의 1배 이상 3배 이하의 벌금을 선고받을 수 있다. 한진해운이 청산 절차를 밟게 되면 이번에 매각한 주식대금 전액이 손실회피액으로 산정된다. 10억 원을 아끼려다 벌금 100억 원, 그리고 막대한 변호사 비용까지 물 수도 있다. 최 회장 측은 김앤장을 법률대리인으로 선임하고 착수금으로 10억 원 넘게 지불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숙에게서 독립하려다 ‘항복’

    최 회장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여러모로 닮았다. 결혼 후 전업주부로 살다가 남편 타계 후 거대 해운사의 경영 전선에 나섰다. 최 회장이 남편과 사별하고 한진해운 부회장에 취임한 2007년 당시 해운업은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국내 1, 2위 해운사를 ‘여회장’들이 이끌면서 “선박에 여자 이름을 붙이는 것에서 보듯, 해운업은 여자가 해야 잘된다”는 말까지 나왔다.

    최 회장은 2008년과 2009년 두 차례 기자간담회에 직접 나섰는데, 당시 그에 대한 언론의 평가는 ‘거침없고 솔직한 언사’ ‘쾌활하고 호방한 성격’ 등으로 요약된다. “아주버님(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나는 배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 내 지분을 빨리 사가라’고 말할 정도로 한진해운 경영권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있다”(2008년 2월), “남편이 병마와 싸우는 중에도 한시라도 걱정을 놓지 않았던 가업인 만큼 나도 인생을 걸고 도전하고 있다”(2009년 12월) 등의 발언에서 엿볼 수 있듯 그는 한진해운 독립과 경영에 대한 강한 의지를 공개적으로 피력하곤 했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로 2009년 이후 세계 해운업이 장기 불황에 접어들면서 두 해운사 여회장의 운명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운명은 특히 최 회장에게 가혹했다. 그는 2009년 한진해운홀딩스를 세우고 한진그룹으로부터의 독립을 도모했지만, 자금난을 견디지 못하고 2013년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에게 긴급 자금 지원을 요청한다. 그리고 이듬해 초 한진해운 경영권을 조 회장에게 넘기기로 한다. 당시 한진해운의 부채비율은 1400%, 당기순손실은 6800억 원에 달했다(2013년 12월말 기준).

    최 회장은 “전 세계 물류업체 중 항공과 해운을 동시에 하는 곳은 없다”며 한진그룹과의 분리 의지를 드러내곤 했다. 반면 조 회장은 “반도체는 못해도 육·해·공 운송만큼은 절대 물러설 수 없다”던 고(故) 조중훈 창업주의 소신을 받들어 육해공 종합물류 그룹을 추구해왔다. 최 회장 측을 잘 아는 한 인사는 “최 회장은 조 회장에게 도움을 요청하기가 죽기보다 싫었을 것”이라며 “그래도 해운업에 대한 의지가 강한 시숙에게 경영권을 넘기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판단한 것 같다”고 했다.



    오늘날 한진해운이 막다른 상황에 놓인 원인으로는 전문성 없는 오너 경영과 전문경영인의 실책이 지목된다. 현대상선의 추락 이유와 흡사하다.

    최 회장은 2009년 1월부터 씨티은행에서 20년 이상 근무한 금융전문가 김영민 전 한진해운 사장을 공동 대표이사로 선임했다. 그는 대한항공이 한진해운에 자금을 댄 시기인 2013년 11월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났다. 현재도 한진해운의 발목을 잡고 있는 용선료 문제는 상당수 김영민 대표이사 시절에 계약한 것들이다.

    조양호 회장은 한진해운 경영권을 넘겨받은 뒤 김 전 사장을 겨냥해 몇 차례 “지난 시간 엉터리 사장이 와서 망쳐놓은 것을 재정립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익명을 요구한 한진해운 관계자는 “10년 가까이 이어지는 해운업 장기 불황은 과거엔 없던 것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경영자가 왔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최근 몇 년 동안 한진해운 이사회에 관여한 인사는 “조 회장은 한진해운 이사회 이사로 있으면서 모든 논의를 자신이 좌지우지하려 했다”며 “2009년 한진해운홀딩스가 세워지기 전까지 이사회를 통해 한진해운 경영에 큰소리를 내던 그가 모든 책임을 김 전 사장에게 돌리려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김 전 사장은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회사가 어려운 상황인데 내가 왈가왈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말을 아꼈다.



    작지만 알찬 ‘자산’ 유지

    한진해운홀딩스는 한진해운을 한진그룹에 넘기고 유수홀딩스로 이름을 바꿨다. 최 회장과 한진해운홀딩스에 남은 것은 3자물류(제조·구매자 간 물류 연계)사업과 싸이버로지텍(해운 관련 시스템 개발업체), 유수로지스틱스(화물운송업), 유수SM(선박관리회사), 서울 여의도 한진해운 사옥 등이다. 10조 원 이상의 매출을 내던 거대 해운그룹에서 연간 5000억 원대 물류·서비스 기업으로 내려앉은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이들 회사가 작지만 알차기 때문이다. 여의도 사옥은 2013년 대한항공으로부터 자금을 빌리면서 담보로 잡혀 있었으나, 한진해운을 대한항공으로 넘기면서 담보가 해제됐다. 사옥의 장부가액은 2000억 원 안팎이고 매년 140억 원의 임대 수익이 나온다. 최근 유수홀딩스는 주차장으로 사용되던 이 사옥 부지에 지하 2층~지상 6층짜리 건물(총면적 3768㎡)을 세우고 외식사업을 개시했다.

    싸이버로지텍은 지난해 매출 1173억 원, 영업이익 522억 원으로 매출은 전년 대비 44%, 영업이익은 138% 급신장했다. 유수로지스틱스도 매출 3416억 원, 영업이익 32억 원의 흑자 기업이다. 유수SM도 지난해 한진해운을 비롯한 한진그룹 계열사와의 거래가 급격하게 줄었음에도 전년 대비 큰 변동 없이 매출 235억 원, 영업이익 32억 원을 냈다. 최 회장은 유수홀딩스 대표이사 회장으로 연간 11억~12억 원의 급여를 받는다.

    최 회장이 이번에 주식을 매도하면서 자본시장법을 위반한 ‘형사범’인지 여부를 밝혀내는 것은 검찰의 몫이다. 그러나 검찰 수사 결과가 어떻든 최 회장은 ‘오너’로서의 도덕적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손을 떼고 떠났더라도 부실 경영의 책임이 있는 오너가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앞두고 남은 주식을 모두 팔아버린 것은 결코 좋은 모양새가 아니다. 최 회장은 한진해운이 급격하게 위기에 빠진 2013~2014년 급여와 퇴직금으로 97억 원을 받아갔다.



    구조조정 희생양?

    최 회장 측은 “조수호 전 회장 사후 상속세 납부 때문에 빌린 돈을 갚을 목적으로 주식을 판 것”이라고 해명한다. 한때 최 회장을 보좌한 한진해운 전직 임원은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상속세 때문에 많은 대출이 있고, 최 회장이 급여를 받아 그것을 갚고 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금융계 안팎에서는 최 회장에 대한 신속한 수사 진행을 두고 “강도 높은 해운업 구조조정을 앞두고 최 회장을 희생양으로 삼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최 회장 일가가 그간 한진해운 주식을 꾸준하게 팔아왔고, 그 금액도 자본시장법 위반을 감수할 만큼 크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최 회장은 대출상환금 마련에 쓸 재원이 한진해운 주식밖에 없었을까. 외부로 드러난 그의 부동산으로는 서울 성북구 성북동 330번지 자택(대지면적 783㎡)과 양현재단(이사장 최은영) 사무실로 쓰이는 서울 종로구 가회동 한옥(대지면적 95.9㎡)이 있다. 등기부등본에 따르면 두 곳 모두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받은 바가 없다. 성북동 자택은 시세가 60억 원에 달한다.

    최 회장은 ‘고통을 분담하려는 의지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따가운 눈총도 받고 있다. 현정은 회장은 현대상선 정상화 과정에서 300억 원의 사재를 출연했다. 조양호 회장과 최 회장(전 한진해운 회장)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은 없다.

    조수호 전 회장은 타계 얼마 전 사재를 출연해 양현재단을 세웠다. 남편의 유지를 받든 최 회장이 이사장을 맡아 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매주 수요일은 여의도 대신 가회동 양현재단으로 출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기자가 찾아간 5월 4일 수요일, 최 회장은 재단에 나타나지 않았다. 양현재단 직원은 “요즘 그 일 때문에 이것저것 바쁘신 것으로 안다”고 했다.



    53년 ‘무노조 경영’ 무너져

    이어룡 대신증권 회장은 최은영 회장과 비교하면 양지에 서 있다. 이 회장과 최은영 회장은 경영 및 가족 문제 등에 대해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로 알려져 있다.

    이 회장은 충북 괴산에서 한학자의 딸로 태어나 상명여자사범대를 졸업했다. 현정은 회장과도 까운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은 서울과학종합대 최고경영자 과정에 함께 다니면서 수업시간마다 나란히 앉았다.  

    이 회장은 2004년 유명을 달리한 남편 양회문 전 대신증권 회장의 뒤를 이어 회장에 취임했다. 취임 후 임직원 월급을 10% 올리는 배포를 보이는 등 선이 굵으면서도 섬세한 경영을 한다는 평가를 들었다. 취임하자마자 영업점 100여 곳을 직접 돌며 근무 환경을 살핀 일화가 유명하다.

    대신증권은 2010년 창업주 양재봉 명예회장이 타개한 이후 며느리 이어룡 대신금융그룹 회장과 함께 이 회장의 아들 양홍석 사장이 이끌고 있다.

    한때 ‘빅3’로 통하던 대신증권의 자기자본은 지난해 말 기준 1조6800억 원으로 10대 증권사 가운데 하위다. 2012년부터는 ‘비상경영’을 해야 했다. 비상경영을 하면서 임원 연봉을 삭감하고 지점 통폐합과 인력 구조조정을 한 것이 효과를 봐 회사 경영은 회복세로 돌아섰다.

    이 회장은 회사가 어려운데도 ‘고액 연봉’을 받으면서 ‘고통 분담’에 나서지 않았다는 비판을 듣기도 한다. 이 회장의 보수는 2013년 6억8489만 원에서 2014년 20억1000만 원, 지난해엔 24억9000만 원으로 늘었다. 보수가 공개된 증권업계 경영자 중 상여금을 제외하고 급여만 따지면 이 회장이 1위다.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도 이 부분에서 자유롭지 않다. 회사가 적자인데도 높은 보수를 받아 입방아에 올랐다. 현 회장은 지난해 현대상선(9억6000만 원), 현대엘리베이터(27억2200만 원), 현대증권(8억5000만 원) 등에서 45억3200만 원의 보수를 받았다. 현대상선의 지난해 순손실은 6270억 원에 달한다. 지난해 현대상선 임직원 수가 2014년보다 359명(21.7%) 줄었으며 1인당 평균 금여액도 10%가량 낮아진 것과 대비된다.

    대신증권은 2014년 창사 이래 첫 희망퇴직을 단행했다. 300여 명의 직원이 회사를 떠나야 했다. 이 회장의 높은 급여는 창업주인 양 전 명예회장이 “항상 직원을 사랑하라”고 강조한 것과 대비되는 대목이다.

    대신증권은 노동조합이 없고 종업원 모두가 주주로 참여하는 경영 방식 때문에 ‘무노조의 상징’으로 평가받던 곳이다. 현재는 노사 갈등으로 바람 잘 날 없는 분위기다.

    직원들은 ”창업자가 부르짖던 동업자 관계는 와해된 지 오래”라며 “경영주가 주창하는 회사의 핵심 가치인 ‘신뢰와 상생’은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일”이라고 반발하면서 2014년 노조를 결성했다. 창업주인 양 전 명예회장이 ‘동업자 정신’을 경영철학으로 정할 만큼 노사관계가 좋았던 대신증권의 ‘53년 무노조 경영’이 이 회장 대(代)에서 무너진 것이다. 


    전문경영인의 실패

    양귀애 전 대한전선 명예회장은 2004년 3월 남편 설원량 대한전선 회장이 뇌출혈로 급작스럽게 타계하자 곧바로 대한전선 고문에 취임했다. 2008년에는 명예회장직에 올랐다. 현정은·이어룡·최은영 회장과의 차이점이라면, 양 전 회장의 경우 회사 경영의 전면에 나서진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전문경영인에게 경영권을 일임했다. 또한 2004년 당시 대학 4학년이던 장남 설윤석(35) 전 대한전선 사장을 회사로 불러들여 경영수업을 받게 했다.

    2011년 1월 양 전 회장은 설 전 사장을 부사장에서 부회장으로 초고속 승진시킨 뒤 이듬해 명예회장 자리에서 물러난다. 8년간 남편을 대신해 ‘왕좌’를 지킨 뒤 장성한 아들에게 왕좌를 인계하고 자신은 퇴진한 것이다. 당시 30세이던 설 전 사장은 ‘재계 최연소 부회장’으로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결과를 놓고 보면 전문경영인에게 경영을 맡긴 것은 좋은 선택으로 귀결되지 않았다.

    양 전 회장이 택한 전문경영인은 임종욱 전 대한전선 부회장. 그는 설원량 회장의 비서실장 출신으로 설 회장 사후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현금 부자’ 대한전선은 2000년대 들어 무주리조트와 쌍방울을 인수하는 등 공격적인 사업 다각화 전략을 구사하는데, 설 회장과 함께 이를 주도한 인물이 임 전 부회장이다. 그는 대표이사로 취임한 이후에도 인수합병(M&A)을 계속했고, 이로 인해 대한전선의 재무 건전성에 빨간불이 들어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7년 세계 금융위기가 터지자 대한전선이 보유한 자산의 가치는 급격히 하락했다.

    대한전선은 2010년 5월, 경영에 책임을 지고 두 달 전 대표이사에서 물러난 임 전 부회장을 검찰에 고발한다. 그는 수십억 원을 횡령하고 회사에 수백억 원의 손해를 끼친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남편이 키운 회사, 아들이 팔아

    양 전 회장의 삶을 되짚어보면, 그는 평생에 걸쳐 한국 재벌의 흥망성쇠를 겪어온 인물이다. 그가 설원량 회장과 결혼한 1969년만 해도 대한전선그룹은 가전사업과 대한제당을 보유한 굵직한 재벌가였다. 그러나 삼성전자가 가전사업에 뛰어든 이후 사세가 위축돼 결국 1983년 대우그룹에 가전사업 부문을 매각한다. 1988년 그의 남편 설원량 회장은 아버지 설경동 창업주의 유지를 받들어 대한제당을 그룹에서 분리해 동생 설원봉 회장에게 넘겨준다.

    양귀애 전 회장의 부친은 미주 대륙에 국산 신발을 최초로 수출한 양태진 국제그룹 창업주이고, ‘비운의 기업가’로 불리는 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이 오빠다. 잘 알려졌다시피 양정모 전 회장이 이끌던 국제그룹은 신군부 정권에 의해 공중분해되는 아픔을 겪었다. 1993년 헌법재판소는 국제그룹의 해체 결정이 헌법에 보장된 자유시장경제 원칙을 침해한 것이라고 판결했다. 양정모 전 회장은 그룹 재건을 위해 애쓰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2009년 타계했다.

    양귀애 전 회장은 시아버지가 일구고 남편이 평생을 바친 회사가 아들의 손에 의해 팔려나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대한전선은 2009년 이후 상황이 급속도로 나빠지다 지난해 9월 사모펀드 운용사 IMM PE로 넘어갔다. 설윤석 전 대한전선 사장이 대표이사를 사임하며 경영권 포기를 선언한 지 2년 만이다. 설원량 회장 사후 양 전 회장과 두 아들은 모두 32.46%의 대한전선 지분을 상속받았는데, 2015년 9월 남은 지분을 정리하고 대한전선을 완전히 떠났을 때 보유한 지분은 1.72%에 불과했다. 설 회장 사후 이들 유족은 상속세로 1355억 원을 자진 신고해 당시로선 국내 상속세 납부 사상 최고액을 기록했다. 이를 두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평가도 나왔다.

    하지만 양 전 회장 일가가 대한전선을 떠나는 과정이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여타 재벌가처럼 이들 일가도 오너 일가가 지분 전량을 소유한 회사를 두고 일감 몰아주기로 회사를 키운 바 있다. 대한시스템즈는 양 전 회장 일가가 지분을 100% 소유한 회사로, 대한전선이 생산한 전선을 납품받아 대리점에 파는 역할을 한다. 이 회사는 2009년에 매출의 99.9%를 대한전선과의 거래로 달성했다.



    분식회계 연루 ‘불명예’

    2014년 금융 당국은 대한전선의 수천억 규모의 분식회계를 적발했는데, 이때 연루된 회사가 대한시스템즈다. 금융 당국은 대한전선이 2011~2012년 완전자본잠식에 빠진 대한시스템즈가 채권 상환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전선을 공급하고, 회수가 불가능한 매출채권을 회수가 가능한 것처럼 꾸며 매출을 부풀리고 대손충당금을 과소계상해 당기순이익과 자기자본을 부풀렸다고 판단했다. 당시 양 전 회장은 명예회장으로, 설 전 사장은 부회장으로 대한전선을 이끌고 있었다. 대한시스템즈는 현재 법정관리에 들어간 상태다.

    2012년 명예회장 자리에서 물러난 이후 양 전 회장은 ‘조용한 자선사업가’로 활동하고 있다. 시아버지의 호를 딴 인송문화재단과 남편 이름을 딴 설원량문화재단의 이사장을 맡아 장학사업, 교육기관 지원사업 등을 벌인다. 서울대 음대 출신으로 대한전선 명예회장 시절 무주리조트에 지역민을 위한 음악회를 개최하는 등 ‘감성경영’을 브랜드로 내건 양 전 회장은 현재 설원량문화재단을 통해 예술에 재능을 가진 학생들도 후원한다.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홍라희 삼성미술관장 등 재계 명사들이 참여하는 한국메세나협회의 부회장으로도 이름을 올려놓았다.

    양 전 회장은 “근황을 듣고 싶다”는 기자의 요청에 “남들(현정은, 최은영 회장)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 때 무슨 말이든 한다는 것이 부담스럽다”며 측근을 통해 거절 의사를 전해왔다. 이 측근은 “재단의 이자 수입이 절반으로 줄어든 상태라 각종 자선사업의 규모나 내용은 내세울 만한 것이 없다”며 “양 전 회장이 재단 활동만 조용히, 성실하게 해나가고 있다고만 알아달라”고 당부했다.

    여성 대기업 회장들의 경영 실패를 여성이어서 그랬다고 몰아세우는 건 잘못이다. 체계적으로 경영 수업을 받지 못한 채 오너의 아내라는 이유로 회사를 떠맡은 게 난맥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른다.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