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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 보도로 본 전두환과 한국 현대사

“全 장군 평가는 좀 더 두고 본 다음에…”(1980년 6월호)

  • 이혜민 기자 | behappy@donga.com

“全 장군 평가는 좀 더 두고 본 다음에…”(1980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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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월호는 〈특집〉 ‘새 대통령 선출 이후-‘광주사태’는 진상부터 규명해야’(한상진 서울대 사회학 교수)를 통해 “광주사태 진상 규명이 차기 대통령의 최우선 과제”라고 주장한다. 당시는 제6공화국 출범을 앞둔 시기로, 이때부터 제5공화국 분석 기사가 본격적으로 실렸다. ‘제5공화국 권력의 뿌리 하나회’ 기사는 ‘제5공화국 정권을 창출한 주도 세력은 대부분 박 대통령의 총애를 받은 하나회 멤버였다. 하나회를 통해 다져진 정규 육사 출신 장교들의 결속이 12·12 사태의 명운을 가름했다’고 평가하며 하나회의 존재를 드러냈다.

1988년 3월호에 실린 ‘쟁점! 무엇이 ‘광주’의 진상인가’는 민주화합추진위원회 증언, 공수대원 수기, 국방부 발표, 광주사태 문서 등을 총동원한, 진상 규명을 위한 질문서다. 이로써 “정권탈취 위해 고의 유발한 것” “결코 유언비어만은 아니다!” “암장, 화장 의혹도 있다” “적어도 150여 명 피살” 등의 증언을 이끌어냈다.

1988년 5월호엔 광주민주화운동 무장시민군의 수기 ‘광주시민은 왜 총을 들었나’(광주 시민군 박남선)가 실렸다. 시민군 작전상황실에 모인 사람들의 ‘조직도’를 비롯해 진압군의 교도소 인근 무차별 난사, 시민전사 수백 명에 관한 ‘설명’이 수록돼 당시 정황을 새로이 알렸다.



신군부 ‘광주 공작설’

“全 장군 평가는 좀 더 두고 본 다음에…”(1980년 6월호)
1988년 6월호는 ‘전두환 정권의 정경 유착 비리’와 ‘전두환의 두 동서 김상구 홍순두와의 세도’로 ‘도처에 산재한 절대 권력의 7년 부패 현상’의 진상을 추적했다. 아울러 ‘태풍의 눈 ‘전두환 문제’, 그리고 광주’(한상범 동국대 헌법학 교수)를 통해 “공직자의 과거 행적에 대한 규명은 민주화와 국가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1988년 7월호엔 ‘노태우 정부의 시험대, 전두환 조사와 광주문제’(조영래 변호사)가 실렸다. 조 변호사는 “광주사태, 전씨 비리 어물어물 넘길 수 없다”면서 “노 정권은 낡은 탯줄을 단호히 끊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1988년 8월호엔 ‘국회 광주문제 공방 쟁점중계-광주 발포책임자는 누구인가’가 실렸다. 기자는 ‘7월 5일 13대 국회 본회의에서 광주 사단장 출신의 정웅 국회의원이 ‘광주사태’를 ‘집권을 노린 군부의 음모’로 규정짓고 ‘12·12 사태 주동자들(장내 소란…), 다시 말해 군부독재자들과 이 땅에 기필코 민주화를(장내 소란…) 꽃피우겠다는 광주 애국시민들이 자신의 생명을 버리며 끝까지 맞서 투쟁한 사실이 바로 광주민중항쟁이라면서 이 행위는 명백히 의거였음을 천명하는 바이다’라고 주장한 것을 계기로 국회 쟁점-강경진압 지시자, 발포명령권자, 정웅 사단장 책임 문제, 광주진상 규명 문제를 정리했다.  

1988년 12월호는 ‘물거품 된 전두환 영구집권 시나리오 : 88년 정권교체를 위한 준비연구 전문’을 게재했다. 2000년까지 전두환의 계속 집권을 계획한 극비 문서의 내막을 추적했다.

1989년 1월호엔 ‘前 광주 505보안대 수사관의 폭로수기 “내가 정웅 장군을 체포 수사했다”’(허장환)가 실렸다. 5·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지구보안대 상사이던 허씨가 12월 6일 평민당사에서 양심 발언을 한 뒤 후폭풍이 거세졌다. 허씨의 폭로는 ‘당시 실세인 신군부 세력이 사태를 주도할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로 ‘광주 공작설’의 근거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1989년 2월호는 〈심층특집〉 ‘아직도 뜨거운 쟁점, 전두환 처리’로 전두환에 대한 법적 책임 추궁을 강조했다. 같은 호에 실린 ‘광주의 진상, 아직도 은폐되고 있다’는 “국회에 광주특위가 구성돼 문서검증 및 현장 확인을 하는 한편 청문회를 열어 관계자들을 소환·신문했으나 국민이 기대한 진상규명에는 접근조차 못한 채 숱한 의문만 부풀려 놨다”고 비판했다.



김대중, 김영삼 기고

1989년 7월호는 ‘전두환의 백담사 200일, 반격설의 진상’으로 ‘국회증언을 앞둔 전두환씨 캠프의 마지막 노림수’를 짚어봤다. 1989년 8월호 ‘증언거부 최규하의 항변’은 “서면증언을 하겠다”는 최 전 대통령과 “서면증언은 국민들의 알 권리와 공개정치원칙에 위배되므로 청문회에 출석해 증언해야 한다”는 국회의 대립을 조명했다.

1989년 12월호는 ‘12·12 10년, 兩金이 말하는 박정희, 전두환’ 기획을 통해 당시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의 글을 게재했다. ‘그러나 역사가 그들을 단죄할 것이다’(김대중) ‘민족정기를 위해 청산해야 할 시대’(김영삼)가 당시 기고문의 제목이다.

하지만 그해 12월 31일 청문회에 출석한 전두환 전 대통령이 5공 비리에 대한 직접 개입을 전면 부인하면서 5공비리특위는 막을 내렸다. 5공 비리 사건은 1988년 12월 10일 발족한 5공비리 특별수사부의 수사를 통해 전 전 대통령의 친·인척 10명과 장세동 전 안기부장, 이학봉 전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 등 47명을 구속, 29명을 불구속 입건하며 종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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