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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아’ 보도로 본 전두환과 한국 현대사

“全 장군 평가는 좀 더 두고 본 다음에…”(1980년 6월호)

  • 이혜민 기자 | behappy@donga.com

“全 장군 평가는 좀 더 두고 본 다음에…”(1980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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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2월호는 ‘전두환 증언, 이것이 위증이다’로 2시간 10분에 걸친 전두환 전 대통령 국회 증언, 야당 측 의견 등을 종합해 분석했다. 또한 ‘최규하씨에게 보내는 공개장’(이수인 경남대 정치학과 교수)을 통해 “최규하는 12·12 쿠데타의 하극상 활극을 가장 정확하게 해설할 수 있는 당사자이자 현장 목격자, 광주판 인디언 토벌대의 활약 전모와 명령 책임자를 밝힐 수 있는 최후의 증인”이라며 “증언대에 나서라”고 촉구했다.   

1991년 2월호엔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 증언-전두환과 하나회 군맥’이 실렸다. 이 글은 1973년 윤필용 장군 사건의 수사책임자로서 말썽 많던 군 사조직 하나회의 전모를 최초로 밝힌 강창성 당시 육군보안사령관이 당시 수사 과정과 결과를 처음으로 털어놓은 본격 증언으로서 가치가 있었다.

이와 함께 〈특집〉 ‘긴급동의, 이것만은 다시 생각하자 ‘광주보상 왜 하필 국민모금인가’’(이종오 계명대학교 사회학 교수)가 실렸다. 1990년 12월 10일 강영훈 총리가 위원장으로 있던 광주보상지원위원회가 모금지원 담화문을 발표한 데 따른 비판이었다. 


‘광주항쟁 당시의 피해가 공권력의 남용 혹은 공권력을 사용한 범죄였다는 사실이 규명된다면 배상책임은 당시의 책임자들과 국가에 있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이를 일반 국민을 상대로 한 모금으로 충당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1991년 12월호는 ‘김용갑 전 총무처 장관 최초 본격 발언-전두환, 노태우 정권교체, 6·29 전후의 청와대’를 실었다. 김 전 총무처 장관이 1987년 6월 10일 시위 현장을 보고 나서 4·13 호헌조치(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이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거부하고, 모든 개헌 논의를 중단시킨 조치)의 철폐와 민의의 수용만이 난국 타개의 처방이란 결론을 내리고 직선제 수용 등을 대통령에게 건의하기로 결심한 배경이 담겼다.



이듬해 14대 대통령선거(1992년 12월 18일)에서 민주자유당 김영삼 후보가 민주당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YS의 대통령 취임 무렵인 1993년 2월호는 ‘이 광주의 절망을 어찌할 것인가’(문순태 소설가, 전남일보 주필)를 수록했다. 다음은 이 기고문의 한 대목.  



배상, 명예회복, 기념사업회

“全 장군 평가는 좀 더 두고 본 다음에…”(1980년 6월호)

1987년 9월 안기부의 제작 탄압에 맞서 농성을 벌이는 신동아 기자들. [동아일보]

‘호남 사람들이 DJ에게 몰표를 던진 것은, 그가 꼭 당선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랜 지역패권주의가 호남 소외를 낳았고, 세 차례의 대통령선거 때마다 스스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자신들의 한을 풀어줄 대리인에게 표를 몰아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993년 5월호는 ‘광주항쟁,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하라’(유남영 변호사) 기사로 법안 제정을 촉구했다. 유 변호사는 “YS 정부가 이를 어떻게 처리하는가는 5·6공 정권과의 차별성을 가름하는 척도가 될 것”이라며 “광주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입법은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사상자 등에 대한 배상과 명예회복, 기념사업회의 설립 등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93년 7월호는 ‘12·12 출동 하나회 군부 全명단’을 실었다. 12·12에 대해 황인성 총리는 ‘합헌’이라고 하고 김영삼 대통령은 ‘하극상에 의한 쿠데타적 사건’으로 규정하는 상황에서 하나회 군부의 명단·사진을 비롯해 12·12 반란체계도, 광주진압군 지휘체계도를 공개했다. 뒤이어 ‘80년 국보위의 언론장악 ‘대외비’ 계획-신군부는 10·26 직후부터 집권 꿈꿨다’를 통해 ‘12·12 주도세력들이 10·26 직후부터 당시 보안사 내에 언론대책반을 두고 언론 장악을 탐색한 실태’를 고발해 ‘12·12 주도세력들이 집권을 모색한 증표’를 제시했다.

아울러 7월호에는 〈단독입수 비밀자료〉 ‘유산된 노태우 측 ‘광주’ 해결 구상’이 실렸다. 이 보고서는 1987년 7월 20일 현대사회연구소가 작성해 상부에 보고한 것으로, 청와대와 안기부 측의 반발로 배포 즉시 회수, 폐기됐다. 광주 문제 해결이 역사적 당위라는 입장과 함께 대선(1987년 12월 16일)에서 노태우 후보의 짐을 덜자는 의도로 만들어진 것으로, 문서 공개를 통해 그 시기에 광주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시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1993년 10월호는 ‘전두환 합수부측 최초 본격 반론 “정승화 측이 반란군이다”’, 1994년 11월호는 앞의 기사에 대한 반론 격인 ‘정승화 인터뷰 “전두환, 10·26 때 직무유기했다”’를 수록했다. 정씨는 “저 사람들(신군부)도 그때는 내가 죄 없다는 걸 인정하고 별의별 좋은 소리를 다 하다가 엉뚱한 음모를 꾸미고 그것을 시행해놓고는 원점부터 잘못됐다고 허위 조작한 것이오”라고 밝히며 정면으로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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