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호

인물탐구

“스스로 수치심을 키웠다 그게 수치스러웠다”

그때 그 여자, 모니카 르윈스키

  • 안희경 | 재미 저널리스트 okforallbeings@gmail.com

    입력2016-06-08 15:5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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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트럼프, ‘힐러리 공격용’으로 르윈스키 거론
    • ‘세기의 창녀’ 낙인 후 사회심리학 몰두
    • 10년 은둔 끝내고 ‘대중 속으로’
    • “연민과 공감으로 모욕의 문화 바꿔내자”
    여름이다. 미 대륙의 대통령선거 열풍도 달아올랐다. 세계 최대의 군사력을 지닌 미국의 통수권을 주류 엘리트 여성 정치인이 차지할지, 아웃사이더 부동산 재벌이 거머쥘지를 놓고 지구촌의 관심 또한 뜨겁다. 힐러리 클린턴과 도널드 트럼프로 각축이 좁혀지자, 공격의 구도는 당내 경선후보를 넘어 두 대표주자의 싸움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역시나 한 여성의 이름이 수시로 거론된다. 힐러리 클린턴이 권력, 성공, 유명세를 덥썩 물 때마다 마치 하나로 연결된 낚시찌처럼 세상으로 나오는 인물이다. 모니카 르윈스키(Monica Samille Lewinsk).



    18년 전 기억 끄집어내기

    5월 6일 오리건 주 유세에서 트럼프가 그녀를 언급했다. “힐러리가 빌 클린턴과 추문을 만든 상대 여성들에게 어떻게 했는지 읽어봤습니까?” 이 질문에 수면 아래 잠자던 여러 개인의 이름이 거론됐다. 응답하는 대중이 더욱 노골적인 단어를 내뱉도록 유도하는 트럼프식의, 질문 아닌 질문이다.

    그동안 트럼프는 여성을 향해 막말을 일삼았다. CNN 조사에서는 여성 유권자의 73%가 그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한다는 설문 결과가 나왔다. 그런 그가 공격의 방향을 힐러리에게로 돌리며 여성 표심(票心)을 겨냥한 것이다. “만약 힐러리가 남성이었다면 5%의 지지도 얻지 못했을 것”이라며, 그녀가 겉모습만 여성일 뿐이라는 공격이다.



    트럼프는 가부장적, 청교도적 가치를 중시하는 보수 성향의 여성들이 힐러리에게서 등을 돌리도록 추문을 들췄다. 제대로 점화됐다. 정치, 경제, 외교적 현안들은 이성적으로 다가가야 하기 때문에 피로감을 주는 반면, 일상생활 속에서 벌어지는 가십들은 이성 이전에 감성에서 쉽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빌 클린턴과의 추문을 낳은 상대 여성’ 거론은 향후 4년의 정책 방향을 결정하는 논의의 장인 선거를, 단순한 감성적 표 대결 구도로 가져가기 위한 트럼트의 전략적 발언이다. 이미 공화당 내 경선을 인신공격 진흙탕으로 몰고가 대승가도를 달려온 트럼프다. 그는 대중의 마음이 활활 발화하는 지점을 잘 안다. 그만큼 르윈스키와 빌 클린턴의 오래 전 스캔들은 여전히 정치적 논란의 중심에 있다.

    1998년에 벌어진 당시 현직 대통령의 성(性) 스캔들이 아직까지도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인 것은 두 가지 방향에서 힐러리 클린턴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힐러리-르윈스키 함수

    하나는 빌 클린턴 행정부 당시 누렸던 경제호황을 그리워하는 기성세대에게 과거의 성과를 탈색시킬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힐러리에게 덧씌워진 ‘진실성’에 대한 물음이다. 공화당은 물론이고 민주당 지지자들에게도 ‘힐러리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감내하는 여성이다’라는 중첩된 네거티브 이미지가 있다. 많은 이가 힐러리를 ‘속내를 알기 어려운 마초적 여성’으로 느낀다. 힐러리는 똑똑하고 국정운영 능력이 월등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여성이 갖는 ‘보살핌’의 온기를 자신의 이미지로 끌어들이지 못한다.

    르윈스키의 이름은 거론되지만, 정작 불어닥친 돌풍 안에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다. 집단의 권력투쟁 속에 개인의 존엄은 무시된다. 영국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현대문명이 갖는 가장 큰 위험 요소를 ‘개인과 집단의 불화’로 본다. 세계화한 질서 속에서 경제 및 사회적 문제는 세계적으로 작동하는 힘에 의해 발생하지만, 책임은 철저히 개인에게 지워진다. 따라서 살아남으려면 각자도생(各自圖生)해야 한다는 진단이다.

    조선업계의 구조조정은 세계시장의 변동으로 촉발됐지만, 그로 인해 밀려난 자는 자신의 생계를 스스로 헤쳐나가야 한다. 값싼 노동력을 찾아 저임금 국가로 떠나버린 미국 공장에서 해고된 숙련노동자들은 시급 1달러라도 더 받기 위해 서비스직을 전전한다. 경제만이 아니다. 거대한 미디어가 지배하던 20세기 말, 인터넷 혁명이 일어나고 세계가 수평적으로 연결됐다. 개인이 콘텐츠를 생산하는 소셜 미디어 시대다. 이 와중에 사생활은 개인의 통제 너머로 밀려들어간다.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은밀한 순간마저 음모 속에서, 해킹 속에서, 혹은 조작된 여론 속에서 대중과 시장에 휘둘린다.

    르윈스키가 조롱받던 1990년대 후반은 기존 미디어가 인터넷에 진출하던 시기다. 광고 유치를 놓고 경쟁하는 매체들은 앞다퉈 선정적인 제목으로 독자를 유인했다. 24세 백악관 인턴 직원의 연애 상대가 대통령이다! 미디어의 파헤침은 집요했고, 정치적 공방은 대통령 탄핵으로 치달았다. 대중의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 스캔들은 미국은 물론 유럽, 아시아, 한국까지 기성세대의 ‘컴맹 탈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가장 큰 피해자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는 ‘사이버 왕따’ ‘사이버 폭력’이라는 사회적 개념이 회자되지만, 당시에는 그저 한 남성 권력자의 성적 취향, 상대 여성의 외모, 클린턴 부부의 이혼 여부만이 입방아에 오르내렸을 뿐이다. 여기에 개인이 당하는 정신적 피해는 거론되지 않았다. 르윈스키는 베레모, 그리고 빌 클린턴의 정액이 묻었다는 블루 드레스, 단 두 개의 이미지만으로 조각돼 ‘세기의 창녀’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신학자이자 페미니스트인 현경 유니온신학대 교수에게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르윈스키 사건에 대해 미국의 지식인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물어 봤다.

    “두 성인이 합의해서 맺은 관계다. 당시 미국은 프랑스와 달리 대통령의 직무수행 능력이 아니라 사생활로 탄핵 정국을 만들었다. 권력과 언론은 개인의 내밀한 이야기를 물고 늘어지며 뉴스와 법정을 포르노그래피 수준으로 몰고 갔다. 오히려 이것이 미국의 도덕적 가치를 망쳤다고 생각한다. 결혼을 포함해 모든 개인의 관계는 모양과 내용이 저마다 다르다. 나의 잣대로 상대를 비난할 수 없다. 하나의 잣대를 강요한다면 각기 다른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세상에 오히려 파괴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르윈스키 스캔들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그때 사회 초년생이던 르윈스키였다. 안타까운 일이다.”

    권력과 대중은 그녀에게 매우 모질었다. 르윈스키의 첫 직장은 백악관이다. 재원(才媛)인 만큼 사회적 성공에 대한 꿈으로 부푼 청춘이었다. 그녀는 사건 이후 지금까지 줄곧 세 가지를 분명하게 말한다. 첫째, 자신의 과오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수백 번 후회했다. 둘째, 서로 마음을 나눈 사랑이었지, 공화당 정치인들이 몰아간 것처럼 권력에 의한 강압은 없었다. 셋째, 집단의 힘 대결 속에서 자신과 가족은 깊은 어둠 속으로 고립됐다….

    그녀는 2004년 대중 앞에서 사죄와 해명의 시간을 갖고자 시도했다. HBO TV는 르윈스키의 의견을 반영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고 해서 그녀의 동의를 얻어냈다. 하지만 녹화 당일 예정된 질문은 바뀌었고, 어느덧 서른 살이 된 르윈스키는 또다시 상처를 입는다. 이후 10년간 자발적 은둔에 들어간다.



    24시간 딸 지킨 어머니

    르윈스키가 찾아간 곳은 영국 런던정경대. 그녀는 사회심리학 석사과정에 들어가 스스로 아물지 못하는 자신의 상처를 샅샅이 헤집었다. 자신과 사회를 관찰했다. 물론 처음부터 긴 시간 은둔할 생각은 아니었다. 공부를 마치고 구직에 나섰지만, 자신의 이름을 밝힐 때마다 대학과 연구소들은 난색을 표했다.

    그사이 2008년 대선도 있었다. 힐러리는 민주당 내 경선에 나섰고, 기자와 파파라치들은 르윈스키의 집 앞에 진을 쳤다. 공화당 진영에서는 연일 러브콜을 보내왔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만으로도 대권에 도전하는 힐러리에게 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래서 더욱 더 안으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모니카 르윈스키’는 대중의 기억과 관심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자신이 다시 일어설 곳 역시 대중 속이라고 그녀는 판단한다. 르윈스키는 2014년 불혹의 나이에 한 월간지에 글을 기고하며 세상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미디어의 집중을 받으며 나선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2016년 대선에 힐러리가 나설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그녀가 대통령이 되고 또 재임까지 한다면 또다시 10년을 은둔해야 할 것 같아서다. 르윈스키는 “수치심의 대가를 스스로 더 무겁게 짐 지우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웠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그녀는 인터넷 공간에서 사이버 폭력을 당하며 스러져가는 10대, 20대 청년들을 돕고 싶었다.

    르윈스키는 강연에 나설 때마다 2010년 자신의 어머니가 겪은 일을 얘기한다. 당시 럿거스대 신입생인 타일러 클레멘티라는 청년이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동성인 남자친구와 기숙사에서 데이트하는 모습이 룸메이트의 몰카에 담겨 온라인으로 퍼졌고, 온갖 조롱과 악플에 시달리다가 다리에서 투신한 것이다. 타일러는 18세였다.

    이 사건을 뉴스로 접한 르윈스키의 어머니는 울부짖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타일러의 부모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냐”며, 르윈스키조차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워했다고 한다. 그제야 르윈스키는 어머니가 다시 1998년으로 돌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처받은 이의 시간은 다른 궤도로 흐른다. 영원히 상처 속에 정지돼 있을 수도 있고, 같은 시간이 무수하게 반복 재생될 수 있다. 르윈스키는 1998년 사건 당시 하루 24시간 딸을 지키며 침대 머리맡을 떠나지 않은 어머니를 기억한다. 이제 그녀는 어머니가 놓지 않았던 그 애틋한 손길처럼 자신의 손을 사회를 향해 내밀고자 한다. 사이버 폭력으로 굴욕감에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이들에게 단 한 명의 간절한 응원이 생명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르윈스키는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며 사회심리학 전문가답게 사이버 폭력을 개선하는 데 설득력 있는 견해를 펼치고 있다.



    버려지는 것의 두려움

    최근 미국 10대의 자살 사건을 살펴보면 유독 ‘사이버 불링(cyber bullying)’에 의한 자살이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부모나 교사의 눈에 띄지 않는 공간에서 매우 다양한 형태로 청소년들을 고립시킨다는 것이 위협적이다. 단체 대화방에서의 집요한 따돌림, 사진을 조작해 조롱거리로 만들기, 허위사실 유포 등 사이버 폭력의 형태는 오프라인보다 더 광범위하다.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2014년 발표한 ‘한국 청소년 사이버 폭력 실태 조사’에 따르면 청소년의 27.7%가 “사이버 왕따를 당해봤다”고 답했다.

    뇌파실험을 통해 드러난 사실이 있다. 몸에 상처가 났을 때 작동하는 뇌 부위와 거절당하고 마음에 고통을 느낄 때 작동하는 뇌 부위가 같다는 것이다. 마음의 상처는 몸의 상처와 똑같이 그 수위에 따라 생명을 위협한다. 몸의 상처를 치료하듯, 몸에 입힌 상해에 처벌을 가하듯 정신적인 고통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

    더불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관계 속에 살아간다. 뇌과학자 마이클 가자니가에 따르면 우리가 하는 일상적 대화의 90% 이상이 타인에 대한 생각, 비판, 감정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인간은 ‘절대적으로’ 사회적 존재인 것이다.

    각자가 사는 세상은 결국 자신의 마음속이다. 그리고 마음은 관계에서 일어나는 감정으로 복작거린다. 그러하기에 사람은 타인의 시선과 비난에 나약할 수밖에 없다. 버려짐에 대한 두려움은 그중에서도 매우 치명적이다.

    진화심리학은 인간의 현재 감정 작동이 오래전 수렵생활 시기에 형성된 본능에 의해 지배된다고 설명한다. 먹잇감을 따라 함께 이동하며 나눠 먹던 수렵 시기에 집단에서 배척당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이런 마음(뇌)의 작동에 지배받는 현대인이기에 온라인이건 오프라인이건 집단적 따돌림은 위협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특정한 사람을 따돌리고 괴롭히는 폭력 문제를 개선하지 못하는 걸까. 영국의 공공보건학자 리처드 윌킨슨은 사회경제적 불평등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불평등이 심한 사회일수록 폭력과 왕따 발생률이 높다는 결론이다. 국가별로 진행된 조사에서도 소득불평등이 심한 영국과 미국은 북유럽 국가에 비해 현저히 높은 결과가 나왔다.



    말라버린 동정심에 간청

    작은 규모의 집단에서도 불평등 서열 구조가 있으면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 최근 미국립과학원에 올라온, 비행기 내 폭력에 관한 논문을 보자. 한 항공업체의 비행 기록 수백만 건을 분석한 결과 일등석이 있는 비행기 안에서 이코노미클래스 승객의 기내 폭력이 좌석등급이 나눠지지 않은 경우보다 4배 더 많이 발생한 것으로 집계됐다. 연구자들은 “비행기는 사회의 축소판이기 때문에 차별이 심할수록 사회불안이 증가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공공보건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은 불평등이 영향을 미치는 계층이 하위 취약층만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 폐해가 사회 전체로 스며들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문제를 풀어가는 시작점은, 르윈스키가 강조하는 ‘스스로와 타인에 대한 연민’이 아닐까 싶다. 집단의 힘 또한 개인의 변화에서 기회를 갖기 때문이다.

    르윈스키는 반복해서 말한다. “행동의 변화는 생각에서 시작됐고, 지금 우리가 누리는 평등한 자유 역시 작은 변화를 꿈꾸는 지속적인 행동에서 왔다”고. 그녀는 ‘모욕의 문화’를 바꿔내는 연민과 공감을 당부한다. 사이버 공간 속에서 더욱 위기를 맞고 있는 우리의 공감능력, 말라버린 동정심을 다시 일으키자는 간청이다. 그녀의 호소에 세상이 따뜻하게 응답하기를 기대해본다. 

    안  희  경


    대학에서 불어불문학,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했고, 불교방송 PD로 일했다. 2002년 도미 후 서구에 부는 성찰적 기운과 대안활동을 소개하는 글을 썼고, 2010년부터 세계 석학들을 인터뷰해 현대 문명이 처한 위기적 상황을 진단·보도해왔다. 저서로 제러드 다이아몬드, 제레미 리프킨, 노엄 촘스키, 지그문트 바우만 등 공존을 위한 세계 지성과의 인터뷰 ‘문명, 그 길을 묻다’, 현대미술 거장 8인과의 대담집 ‘여기 아티스트가 있다’, ‘하나의 생각이 세상을 바꾼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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