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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 우승 80주년 특별기획

총도, 칼도 없이 민족명예 위해 싸워보라!

마라톤 개척자 권태하의 ‘스포츠 독립운동’

  • 김희찬 | ‘아이들의 하늘’ 주비위원회 간사 gomappa10@gmail.com

총도, 칼도 없이 민족명예 위해 싸워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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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힘, 채찍, 지침”

“아~ 이놈이 샛길로 뛴단 말야. 샛길로 뛰면 800m는 덕을 보는 겁니다.”

권태하의 회고다. 권태하는 이를 일본인 코치에게 알려 시오아쿠가 ‘찍소리도 못하게’ 만들었다(손기정, 동아일보 1976년 1월 17일). 정상희는 일본 육상 본단을 맡고, 권태하는 미국 육상팀 마라톤 보조코치로 참가한 딘 크롬웰 등 LA올림픽 때 만난 세계 각국 선수들을 면밀히 관찰하며 정보를 수집했다. 이렇게 현지 코스와 경쟁자들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해가며 작전을 짰고, 그 결과 1936년 8월 9일, 손기정과 남승룡은 각각 1위(2시간 29분 19초 2)와 3위(2시간 31분 42초)라는 빛나는 성과를 이뤄냈다. 남승룡은 독일 현지에서 권태하, 정상희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최근 독일 뉴스를 전하기 전에 참 반가운 소식을 먼저 올리겠습니다. 그것은 우리 마라손 두 명에게 다시 없는 대선배 정상희, 권태하 선생이 이곳에 오신 것입니다. 두 선생이 우리 둘의 연습을 열심히 지도하여 주시니, 이 이상 더 우리의 맘을 강하게 하는 일이 또다시 없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힘이오, 채찍이오, 지침이외다.

남승룡의 말은 과장이 아니다. 권태하와 정상희가 7월 첫 일요일 베를린 선수촌을 방문했을 때 손기정과 남승룡은 숙소에 틀어박혀 풀 죽어 있었다. 두 선배는 그들을 데리고 나가 쇼핑을 시키고 중국 음식을 넉넉하게 먹였다”(손기정, 동아일보 1976년 1월 17일).

권태하는 1932년 5월 8일 열린 LA올림픽 마라톤 예선에서 2시간 35분 12초로 1위를 한다. 이틀 전 을지로에서 교통순사에게 이유 없이 구타당해 상한 몸으로 올린 성적이라 크게 화제가 됐다. 최종 예선을 사흘 앞두고 권태하가 동아일보 이길용 기자에게 편지를 보냈다.



“저는 그 후로 감기에 걸려 연습도 잘 못하고 형이 모처럼 부탁하신 원고도 한 장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의 심정은 참 무엇이라고 형언할 수가 없습니다. 불완전한 몸으로 경주에 참가하고 또 여행한 것이 도대체 무리이었든 것입니다. 금일 제대병원(帝大病院)에 가서 진찰한 결과 절대로 연습을 금한다는, 나에게는 ‘사형’에 가까운 선고를 받었습니다….”



‘박수 신기록’

총도, 칼도 없이 민족명예 위해 싸워보라!

1936년 베를린 올림픽 우승 후 트랙을 빠져나오는 손기정.

권태하는 이런 상황에서도 본선에서 2시간 36분 49초 6으로 1위를 했다. 그리고 2위, 3위를 한 김은배, 쓰다 선수와 함께 본선 출전이 확정됐다. 미국으로 가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던 중 권태하는 관부연락선에서 또 이유 없는 폭행을 당했다. 6월 23일 그가 쓴 편지에는 “아아! 영문도 모를 매를 실컷 맞고 또 잘못하얏다고 빌지 아니하면 아니 되는 자는, 권태하 한 사람뿐일까?” 두 번째 편지에서는 “오직 저곳 미국에서 1등하는 것으로써 이 외로움을 갚으리라”라고 적혀 있다.

“권태하 씨가 예선에서 1등을 했는데, 본선에서는 일본 선수를 우승시키기 위한 보조 역할만 하라는 거야. 가만 생각해보니 분해 죽겠단 말이야? 그래서 제 페이스를 잃고 뛰다가 경련이 나버려. 그래서 기어들어가. 9등을 했지.”

권태하의 6촌 동생 권태성 씨가 2003년 필자에게 들려준 얘기다. 비록 9위를 했지만, 동아일보는 권태하가 ‘박수 신기록’을 세웠다고 기록한다. 현장에 있었던 교민 이한식 씨는 이렇게 말했다.

“권군의 다 죽어가는 걸음걸이가 정문 안으로 들어온다. (…) 자기의 양각(兩脚)에 있던 힘이 전부 소모되어 경풍(輕風)에도 쓰러질 듯하다가 내종 삼십 척(약 10m)을 앞에 두고 자기 자신의 방향조차 바로 잡지 못하고 넘어지려 할 즈음 (…) 기다시피 하여, 그러고도 용기를 떨치고 서서히 결승선을 넘을 때에 9만 관중의 골육(骨肉)에서 우러나오는 박수는, 이번 올림픽 대회에 박수의 신기록이었다.”

‘삼십 척이 삼천리’ 같다던 그의 완주를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번 올림픽 마라손에 권태하 군. 졸도한 채로 기어서 꼴에 들어 왔다. 이른바 사이후이(死而後已, 죽은 뒤에야 일을 그만둔다)의 정신. 1착보다도 귀한 정신.”

권태하에 대한 첫 기사는 1924년 ‘정신병자 출가-휘문고보 생도가’이다. 당시 휘문고 2학년생 권태하는 작은형 권태은의 집에 머물렀다. 권태은은 1919년 ‘충주만세운동’과 관련된 인물. 그는 지난해 큰 인기를 끈 영화 ‘암살’의 실제 주인공이라는 류자명(柳子明·1894~1985)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계획했지만 사전 발각돼 대구형무소에 구속 수감됐다가 1920년 2월 집행유예로 석방됐다. 이 과정에서 조카를 면회 다니던 당숙 권중수 씨가 폐렴으로 사망한다.

류자명은 만세운동이 사전 발각되자 급히 서울로 피신한다. 이때 류자명을 정상희의 집안 어른인 정락윤에게 소개한 사람이 권태하의 큰형 권태영이다. 류자명과 권태영은 충주 교현초등학교 동기생이다.

큰형의 친구요, 작은형과 만세운동을 도모한 류자명 선생이 갑자기 사라졌고, 형을 면회 다니던 당숙의 죽음, 그로 인해 아들을 잃은 증조부 권병섭 씨의 강력한 집안 단속이 시작됐다. 이런 배경에서 18세 소년은 ‘정신병자’로 신고돼 신문에 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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