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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와 미술관

소련이 사랑한 재벌 러시아 미술의 등대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 최정표 |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jpchoi@konkuk.ac.kr

소련이 사랑한 재벌 러시아 미술의 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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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 절반 넘게 기부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민간인의 기부와 기증은 미술관에 큰 힘이 됐다. 미술관을 위한 별도 재단이 만들어지고 독지가들의 기부도 줄을 이었다. 1977년에는 미술관이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를 맞았다. 러시아 최고의 미술품 수집가 조지 코스타키스가 자신의 중요 수집품을 모두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에 남긴 것. 사회주의 체제에서 작품을 수집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코스타키스는 아방가르드 작품을 집중적으로 수집해 기증했다.

1980년대 중반에는 늘어나는 소장품과 잦은 전시회, 넘쳐나는 관람객 등으로 인해 대대적인 공사를 거쳐 기존 건물은 새롭게 단장하고 부속 건물을 세웠다. 러시아 혁명이후 많은 미술관이 통폐합됐는데 이 과정에서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은 여러 미술관을 흡수했다. 명실 공히 러시아 미술품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러시아는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산업화가 급속도로 진전되면서 많은 재벌이 출현했다. 트레티야코프는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재벌이다. 그는 먼저 섬유 분야에서 막대한 부(富)를 쌓았다. 당시 섬유업은 ‘산업화의 꽃’이자 ‘황금알 낳는 거위’였다. 어느 나라나 산업화 초기에는 섬유업이 최첨단에서 산업을 이끄는 노릇을 한다. 한국도 광복 후 최고 재벌이 섬유업에서 나왔다. 트레티야코프는 섬유산업에서 엄청난 돈을 모은 뒤 은행, 유통업, 무역업, 부동산업에 진출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트레티야코프는 매우 특이한 재벌이었다. ‘자선사업의 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사회 곳곳에 많은 기부를 했다. 음악 등 각종 예술지원사업, 교육사업, 장애인 보호시설 등 그의 손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크림전쟁과 러시아-터키 전쟁에서 생겨난 유가족을 돕는 일에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는 재산의 절반 이상을 사회에 기부했다. 그야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이다. 부자를 백안시하는 사회주의 국가도 트레티야코프라는 이름을 지울 순 없었다. 러시아는 1977년 자신들이 발견한 새로운 별에 트레티야코프 형제의 이름을 붙였다. 러시아인들이 그를 얼마나 존경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톨스토이의 초상화

소련이 사랑한 재벌 러시아 미술의 등대

드미트리 레비츠키가 그린 예카테리나 여제 초상화.

트레티야코프는 가족에게 “돈이란 일상적인 용도 이상의 더 좋은 목적에 쓰여야 한다”고 가르쳤다. 사람이 아무리 호화스럽게 산다고 해도 의식주에 쓰는 돈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특히 부자는 자기 재산의 극히 일부만 의식주에 쓴다. 따라서 이를 넘어선 아름다운 어떤 것에 더 큰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차떼기’ ‘밭떼기’ 하듯 작품을 대량으로 구매할 정도로 미술품 수집에 ‘중독’된 사람이었다. 22세이던 1854년부터 미술관을 세울 꿈을 안고 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당대 어느 정도 명성이 있는 러시아 작가라고 하면 그 작가의 작품을 반드시 수집했다. 시리즈 작품은 해당 시리즈 전부를 사 모았다. 예술가를 돕는 일에도 매우 열심이었다. 많은 예술가와 친구로 지내며 그들의 금전적 지원 요청을 거절한 적이 없다. 화가를 돕기 위해서라도 그림을 샀다. 그의 수집품은 주로 회화였다. 조각은 극소수였다.

트레티야코프는 특히 초상화를 좋아했는데, 이와 관련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그는 톨스토이의 초상화를 제작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톨스토이가 말을 듣지 않았다. 아마도 자유분방한 톨스토이는 화가 앞에서 오랫동안 포즈를 취해야 하는 것이 싫었을지 모른다. 트레티야코프는 많은 사람을 동원해 무려 4년이나 설득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마침내 이반 크람스코이라는 유명 화가가 나섰다. 그는 톨스토이에게 “살아 있을 때 초상화를 그려놓지 않으면 죽은 후에 누군가가 당신을 상상으로 그릴 것이다. 그는 당신이 생존해 있을 때 선배 화가들이 그려놓지 않은 것을 매우 안타까워할 것이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톨스토이는 결국 자신의 초상화를 두 점 그리도록 했다. 하나는 트레티야코프에게 주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갖기 위해서였다.

트레티야코프는 자신의 초상화 또한 남겼다. 1876년 크람스코이는 트레티야코프의 집에 머물며 트레티야코프 부부의 초상화를 그렸다. 1883년 러시아 국민화가 일리야 레핀도 트레티야코프의 초상화를 그렸다.

트레티야코프는 처음에 자신의 집에 미술관을 열었다. 그러다 수집품이 계속 늘어나자 집 확장을 거듭했고, 1881년부터는 일반인에게도 개방했다. 그의 자택 미술관은 매우 인기가 좋아 한 해에 3만 명이나 찾아왔다. 그런데 그로부터 10년 후 많은 그림이 도난당하는 일이 발생하자 미술관은 잠시 문을 닫는다.

1892년에는 동생이 수집한 서유럽 작품까지 기증받아 자택 미술관은 러시아 최고의 미술관으로 등극한다. 그의 동생 세르게이 트레티야코프도 미술품 수집가로 명성이 높았다. 동생은 형과 다르게 하기 위해 주로 유럽 작품을 수집했다. 이해에 트레티야코프는 자택과 함께 모든 수집품을 모스크바 시에 기증했다. 모스크바 시는 1893년 이 미술관을 시립미술관으로 만들어 공식 개관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이다.



러시아판 측천무후

미술관이 소장한 예카테리나 여제의 초상화는 꼭 짚어봐야 한다. 그림의 의미보다 러시아 역사에서 차지하는 예카테리나의 비중과 특수성 때문이다. 초상화의 제목은 ‘정의의 여신 신전에 선 입법자 예카테리나 여제(Catherine the Great As a Legislator in the Temple of the Goddess of Justice)’.

그림은 매우 위엄 있는 중년 여인의 전신 초상화다. 화려하게 차려입고 황제의 풍모를 마음껏 뽐낸다. 드미트리 레비츠키라는 우크라이나 태생의 러시아 화가가 1783년에 그렸다. 그녀의 나이 54세, 황제가 된 지 21년 됐을 때다. 나이로는 원숙의 경지이고 권력으로는 절정기일 때다. 레비츠키는 당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초상화가로 여제의 후원까지 받았다. 그러나 경제적 지원은 빈약해 말년에는 빈곤한 생활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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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표 |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jpchoi@konk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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