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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언 우리에게 새만금은 무엇인가

자유와 평화 정신 품고 국제도시로 우뚝

동북아의 배꼽’ 새만금

  • 김화성 | 언론인·여행작가 marsstella@naver.com

자유와 평화 정신 품고 국제도시로 우뚝

자유와 평화 정신 품고  국제도시로 우뚝

‘새만금의 뿌리’ 모악산은 금산사와 청룡사를 품었다. [동아일보]

● ‘바다 위의 만리장성’ 새만금. 33.9㎞의 황금 막대 뒤로 펼쳐진 ‘미래의 땅’. 만금(萬金)을 주고도 바꾸지 않을 새만금. 파리의 4배, 서울과 싱가포르 3분의 2 넓이의 땅(409㎢). 중국과 손짓하면 금세라도 닿을 수 있는 거리.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영락없는 ‘동북아시아의 배꼽’이다.

새만금의 뿌리는 모악산(母岳山, 해발 793m)이다. 동쪽 전주와 서쪽 김제 사이에 가부좌를 틀었다. 모악산 자락은 온유하다. 봉우리는 암소 잔등처럼 아늑하다. 발밑에선 김제 만경 들판을 키운다. 만경강(80.86km)과 동진강(51.03km)이 바로 그 생명의 젖줄이다. 두 강물은 갈지자로 느릿느릿 호남평야를 고루 적시며 서해로 빠진다. 새만금 지역은 바로 이 두 강물이 흘러들어 서해와 만나는 곳이다. 만경강은 완주 고산천, 전주천, 소양천, 익산천, 탑천 등을 품에 안고, 동진강은 정읍천, 고부천, 원평천 등과 어우러져 방조제 내수면으로 흘러든다.

호남평야는 동서 50km 남북 80km의 타원형이다. 하지만 새만금이 생기면서 거의 직경 80㎞의 둥근 ‘보름달’ 모양이 됐다.

일제강점기 이 황금 들판에 가난한 일본인 농민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1910년 한일합병 당시 전국의 일본인 토지 8만6951정보 중 전북 지역에 무려 2만2512정보가 몰렸다. 전북 지역 조선 농부들은 대부분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그 비율이 68%로 전국 평균 40%의 2배에 가까웠다. 소작료도 수확량의 3분의 2에 가까웠다.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쌀은 모두 군산항에서 일본으로 빠져나갔다. 1934년 군산항에서 일본으로 수출된 쌀은 200만 석이 넘었다. 

혁명과 종교의 성지

한가로운 어촌 군산은 1899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문을 열면서 흥성거리기 시작했다. 1914년 군산항의 총 수출 물량은 부산 다음으로 전국 2위였다. 수출품은 두말할 것도 없이 쌀. 호남평야의 거대 일본인 농장 주인들도 대부분 군산에서 살았다. 일본인 장사치들과 조선총독부에서 파견한 관리도 이곳에 터를 잡았다. 군산항은 총독부의 주도로 자고나면 커졌다.

군산 신흥동 일대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 부유층이 살던 곳이다. 지금도 당시 포목상이었던 ‘히로쓰 가옥’이 남아있다. 일본식 정원과 주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2층 다다미방은 지금 봐도 호화롭다. 일본인 대지주 구마모토 별장인 이영춘 가옥, 우리나라에 남겨진 유일한 일본식 사찰 동국사, 조선은행 군산지점, 일본 제18은행 군산지점, 구 군산세관본관, 구 군산시 제3청사 등도 마찬가지다. 군산 근대역사박물관(063-450-4541)에 가면 한눈에 ‘아픈 역사의 생채기’를 되돌아볼 수 있다.    

그렇다. 호남평야의 땅은 넓고 기름졌으나 사람들은 굶주렸다. 곡식은 차고 넘쳤지만 그것을 가꾸고 키운 농부의 것은 아니었다. 한양의 양반들이나 부패 관리 그리고 몇몇 지주의 것이었다. 누에 실을 뽑는 것은 항상 농민들이었지만 정작 비단옷을 입는 것은 성안의 귀족들이었다. 일제강점기에도 달라질 것이 없었다. 일본인들의 수탈은 무자비했다. 농민들은 너도나도 보따리를 싸서 만주나 북간도로 떠났다. 남아 있는 농민들의 선택은 딱 두 가지, 혁명을 꾀하거나 아니면 종교에 의지해 사후 세계를 꿈꾸는 것이었다. 그것조차 할 수 없다면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 바로 모악산 일대가 그런 곳이었다. 그곳은 혁명과 종교의 성지였다.

모악산 옆 김제 땅 제비산(帝妃山, 해발 308m)은 조선시대 혁명아 정여립(1546~1589)이 서른아홉 때 한양의 벼슬을 버리고 터를 잡고 산 곳이다. 이곳에서 대동계(大同契)를 만들어 반상의 귀천과 사농공상의 차별, 남녀차별이 전혀 없는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꿨다. 대동계엔 사당패, 광대, 점쟁이, 풍수쟁이, 무당 등 별의별 인물들이 참여해 서로 존댓말을 쓰며 깍듯이 상대를 존중했다. 

‘열혈아’ 정여립의 恨

정여립은 전주 한옥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누구나 능력에 따라 임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당시 조선 선비 사회에 벼락 치는 소리였다. ‘왕후장상에 어디 씨가 따로 있느냐’는 말이었다. 그를 일러 조선왕조 최초의 공화주의자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영국의 공화주의자 올리버 크롬웰(1599~1658)보다도 50여 년이나 앞섰다. 영국 공화정은 정여립 사후 60년 뒤 기축년(1649)에 처음 실시됐다. 정여립의 말은 지금 들어봐도 속이 시원하다.

“천하는 공물(公物)인데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랴!”

“인민에게 해가 되는 임금은 죽여도 괜찮고, 올바름을 실행하기에 부족한 지아비는 떠나도 괜찮다.”

“백성과 땅이 이미 조조와 사마 씨에게 돌아갔는데, 한구석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유현덕의 정통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정여립은 열혈아였다. 거칠 게 없었다. 선조 임금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할 말이 있으면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피력했다. 때로 마음에 안 들면 임금을 째려보기까지 했다. 율곡 이이도 주저 없이 그를 ‘당대 천재’라고 했고, ‘연려실기술’에는 “선비들은 그를 한 번이라도 만나보는 게 소원이었다”고 쓰여 있다. 당대 최고 인기 스타는 그러나 대역죄로 죽임을 당했다. 정여립의 처자식 사촌 처가 삼족도 씨가 말랐다. 그의 친구와 그를 따르던 사람도 모조리 죽었다. 정개청은 정여립 집터를 봐줬다는 죄명으로 죽임을 당했고, 제비산 정여립의 집은 부서지고 그 터는 깊게 파헤쳐져 소금과 숯덩이를 묻고 끝내 연못이 되었다. ‘조선을 뒤흔든 최대 역모사건’(다산초당)을 쓴 신정일 씨는 말한다.

 “16세기 말 1000여 개혁적 선비의 떼죽음은 결국 임진왜란 때 인재 부족으로 이어졌고, 나아가 조선왕조 몰락의 결정타가 됐다. 선비들은 더 이상 바른말을 하지 않았고, 그것은 조선 사회를 썩게 만들었다. 시대의 흐름에 뒤처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우주의 자궁’이 품은 강증산, 전봉준

자유와 평화 정신 품고  국제도시로 우뚝

1 녹두장군 전봉준 2 탄허스님 3 간재 전우 선생

단재 신채호 선생은 기축옥사를 ‘조선 500년 제일사건’이라며 한탄한다.

“이것이 전민족의 항성(恒性)을 묻고 변성(變性)만 키우는 짓이다. 정여립의 이름은 300년 뒤에나, 500년 뒤에나 그 이름이 알려질 뿐이다.”

모악산 배꼽 바로 밑엔 ‘오리알터’로 불리는 금평 저수지가 자리한다. 이곳 사람들은 ‘오리알터’라고 한다. 하지만 오리와는 관계가 없다. ‘올(來) 터’라는 뜻이다. ‘올터’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오리터’→‘오리알터’가 됐다. ‘천하 우주의 모든 기운이 이곳으로부터 나온다’는 의미다. 고통받는 중생을 위해 메시아가 오는 터. 불교에서는 미륵불이 오고, 증산교에서라면 상제(上帝) 강증산이 오는 곳이다. 한마디로 이곳은 모악산 주변 신흥종교인들에게 ‘우주의 자궁’인 셈이다. 모든 생명의 고향이다.

강증산(1871~1909)은 정여립 집터 바로 옆 구릿골(동곡마을)에 약방(廣濟局)을 차려놓고 구한말 절망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했다. 그는 여성과 백정, 무당이 존경받고 서자와 상민이 무시당하지 않는 후천개벽 세상을 역설했다. 그는 38세 젊은 나이에 눈을 감았지만 그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강증산은 막걸리도 곧잘 마시고, 신이 나면 얼씨구절씨구 어깨춤도 들썩였다. 꽹과리나 장구는 물론 굿도 잘했다. 그는 말한다.

“나는 광대요 무당이며 천지 농사꾼이다. 광대와 무당이 바로 가장 큰 후천개벽의 전위다.”

녹두장군 전봉준(1855~1895)도 모악산 오리알터 아래 감곡 황새마을에서 감수성 풍부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훗날 그의 ‘오른팔’이 되는 동학 금구접주 김덕명과 태인접주 손화중도 그 시절 사귀던 동무들이다. 전봉준은 그곳에서 ‘사람이 하늘’인 세상을 꿈꿨다. 요즘에도 이곳에선 ‘눈이 샛별같이 빛나는 차돌 같은 소년 녹두장군’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일제강점기라고 해서 이러한 혁명정신이 끊길 리 없었다. 간재 전우(艮齋 田愚·1841~1922) 선생이 우뚝 솟았다. 그는 고군산군도의 마지막 딸깍발이 선비였다. 그는 뭍인 전주 출신이었지만, 나라가 일본의 손아귀에 넘어가자 군산 앞바다로 나가 평생 섬을 떠돌며 살았다. 두 번 다시 육지를 밟지 않았다. ‘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뗏목을 타고 바다로 들어간다’는 공자의 뜻을 따른 것이다. 왕등도, 계화도, 신시도 등 고군산군도의 섬들을 옮겨 다니며 제자를 키웠다.

그는 ‘을사오적의 목을 베라’는 상소문은 냈지만, 직접 의병에 나서지는 않았다. 그는 ‘500년 종사도 중요하지만, 3000년 도통(道統)을 잇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학문을 일으켜 언젠가 나라를 되찾겠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를 악물고 살아 남아야 한다’고 다짐했다. 내외 정세에 관심을 끊고 오로지 가르치는 것에만 몰두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일본인을 상대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세금도 내지 않았다. ‘호적 신고를 하면 일본 백성이 된다’며 자손을 호적에 올리지도 않았다. 손자에게 ‘나는 조선의 유민인데, 어찌 타국에 입적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그는 벽에 ‘만겁이 흘러도 끝까지 한국의 선비요, 평생을 기울여 공자의 문인 되리라(萬劫終歸韓國士 平生趨付孔門人)’는 시구를 붙여놓고 그대로 실행했다.

간재의 명성은 식민지 조선반도에 널리 퍼졌다. 그가 머무르는 섬마다 전국에서 몰려든 선비들로 도학촌(道學村)을 이뤘다. 제자가 제주도에서 북간도에 이르기까지 3000여 명이나 따랐다. 무명옷을 입고 검소하게 살면서 굶기를 밥 먹 듯했다. 제자들의 보답도 일절 사양했다.

1922년 7월 간재는 지금은 육지가 된 부안 계화도에서 “왜놈들이 이 땅에 있는 한 나의 문집을 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그의 영구엔 무려 2000명 가까이 뒤를 따랐고, 지켜본 사람만도 수만 명에 달했다. 그의 제자들은 무럭무럭 자라 광복 후 나라를 이끌었다.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1887~1964), 전 동아일보 사장 백관수(1889~?), 전 국회부의장 윤제술(1904~1986),국문학자 이병기(1891~1968)가 그 면면이다.

미륵 세상을 꿈꾼 사람들

모악산 일대는 종교의 백화점이다. 계룡산이 신선이나 단군과 관련한 신흥종교 터전이라면, 모악산은 누가 뭐래도 미륵신앙의 보금자리다. 주위에는 수많은 미륵 관련 신흥종교 집단이 자리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미륵 나라, 미륵 세상을 꿈꾼다. 산자락 아래엔 심지어 용화라는 이름의 동네까지 있을 정도다. 미륵은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천기(天氣)와 비기(秘記), 정토(淨土)와 용화(龍華)와 개벽사상 등이 불교, 기독교, 가톨릭, 원불교 등과 묘하게 어우러진다. 이곳 사람들은 예부터 모악산 골짜기에 돈 벌러 들어가면 여지없이 망한다고 말한다. 욕심을 가지고 들어가면 누구든 빈손으로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빈손으로 들어갔다가, 빈손으로 나와야 비로소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들에선 스님 나고, 산에선 장수 난다’는 말이 있다. 호남평야도 그렇다. 큰스님이 많다. 근대 이후만 쳐도 경허선사(1849~1912)를 비롯해 그의 제자 만공월면 선사(滿空月面·1871~1946)와 탄허(1913~1983), 월주(1935〜), 정대(1937〜2003) 스님 등 모두 모악산과 김제 만경 들판 언저리에서 태어난 분들이다.

전주 출신 경허선사(1849~1912)는 대자유인이다. 일체의 머무름도, 걸림도 없었다. 그는 문둥병 여인과 한방에서 지내기도 하고, 일부러 아녀자를 희롱한 뒤 묵묵히 몽둥이세례를 견디기도 했다. 나중엔 ‘빈 거울(경허·鏡虛)’이나 ‘깨우친 소(성우·惺牛)’라는 법명조차 벗어던졌다. 결국 서당 훈장으로 산골(함경도 갑산)에 숨어 살다 눈을 감았다.

정읍 태인 출신 만공스님은 소박했다. 법문도 저잣거리 사람이 알 정도로 쉽게 전했다. 거문고 타기를 즐기거나, 서울 부민관의 최승희 춤 구경을 갈 정도로 풍류를 알았다. 만해 한용운(1879~1944)을 “내 애인”이라며 아낀 것이나, 한참 아래인 김좌진 장군(1889~1930)과 팔씨름을 하며 허물없이 지낸 것도 소탈한 그의 성품을 잘 보여준다. 만공은 1945년 8월 16일 수덕사에서 광복 소식을 들었다. 그는 제자들 앞에서 무궁화 꽃송이에 먹물을 듬뿍 묻혀 한지에 ‘世界一花(세계일화)’라고 썼다. 그리고 말했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요, 이 나라 저 나라가 둘이 아니요,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이다. 머지않아 이 조선이 ‘世界一花(세계일화)’의 중심이 될 것이다. 지렁이 한 마리도 부처로 보고, 저 미웠던 왜놈들까지도 부처로 봐야 이 세상 모두가 편안할 것이다.”

모악산 자락 원평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 교회인 금산교회가 있다. 김제 부자 조덕삼(1867〜1919)이 1908년 세운 ‘ㄱ자’형 한옥이다. 조덕삼은 장로 선거에서 자신이 데리고 있던 젊은 머슴 이자익(1882〜1961)에게 패했지만, 감정을 전혀 내색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이자익 장로와 교회를 더 잘 섬기겠다”고 말한 걸로 유명하다.

실제 조덕삼은 이자익 장로를 평양신학교에 보내 목사로 키웠고, 그가 학업을 끝내자 다시 금산교회 목사로 모셨다. 물론 5년(1910〜1915) 동안의 학비와 생활비도 조덕삼이 댔다. 조덕삼의 손자가 바로 4선(選)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 조세형(1931〜2009)이다.

금산교회는 ‘갇힌 자들의 대부’로 이름난 김홍섭(1915〜1965) 판사가 어린 시절 다니던 곳이기도 하다. 김 판사는 싸구려 양복에 고무신을 신고, 단무지 도시락을 싸서 출근한 ‘법관의 사표’였다. 월급을 타면 대부분 죄수들 뒷바라지에 썼고, 가난한 사형수들의 묘지 구입 비용에 보탰다. 간암으로 짧은 50평생을 살았다. 그는 사형수 묘지 근처에 묻혔으며 묘비명도 뜻이 깊다.

“너희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느님에게 받은 것이니 하느님에게 돌아가라.”             

인근엔 영화 ‘보리울의 여름’을 촬영한 수류성당도 있다. 수류성당은 6·25전쟁 때 신자 50여 명이 순교한 곳이다. 100년이 훨씬 넘은 유서 깊은 성당이다.

그렇다. 들판 사람들은 다투지 않는다. 될 수 있으면 어우러져 산다. 내 종교만 옳다고 목청 높이지 않는다. 새만금 전북 사람들의 얼굴도 아랫녘 전남 사람들과 좀 다르다. 얼굴학자 조용진 한국얼굴연구소장(전 서울교대 교수)에 따르면, 전북의 이웃인 전남과 충남 사람들은 ‘남방계 얼굴’이 우세한데, 그 틈새에 낀 전북 사람들에게선 뜻밖에도 북방계 얼굴이 많이 보인다. 그래서 자신이 고구려 광개토대왕 형상을 제작할 때 전북 출신 대학생들의 얼굴상을 참조했다고 말했다. 정치인 중에는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전 대통령이 북방계로 분류된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충남 서산마애불(국보 제84호)의 세 분 부처님 가운데 석가모니부처님 얼굴을 보면 영락없는 남방계다. 전체적으로 둥글넓적하고 오목조목 입체적이다. 눈은 크고 입술은 두툼한 데다, 코는 얇고 넓으며 콧방울이 뚜렷하다. 정치인 중에는 전두환·김대중 전 대통령, 북한 김일성 김정은 부자가 남방계로 꼽힌다.

고조선, 고구려, 신라 피가 섞인 땅

자유와 평화 정신 품고  국제도시로 우뚝

정여립, 전봉준, 강증산의 발자취를 따라 108년 역사를 지닌 금산교회. 나무 종탑과 ㄱ자형 한옥 건물이 정겹다. [동아일보]

같은 불상이라도 강원도 절집에 가면 갸름하고 길쭉한 북방계 얼굴의 불상이 많이 보인다. 은연중에 그 불상을 만든 그 지역 사람들 얼굴의 특징이 드러난 것이다. 불상을 조각하는 사람으로서는 자연스럽게 당시 그 지역 최고 인기 스타의 얼굴을 떠올리며 새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광주·전남 지역 장승을 봐도 남방계 티가 많이 난다. 눈이 동그랗게 크고, 주먹코에 진한 눈썹 그리고 수염이 멋들어지다. 제주 돌하르방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다. 퉁방울눈에 주먹코는 물론이고 이마에 굵은 주름 하나가 떡하니 가로질러 간다. 보통은 이마 주름이 3개다. 전북의 장승은 눈이 가로로 길게 찢어진 강원도 장승만큼은 아니지만 전남 장승보다 눈이 좀 작고 콧방울도 작아 퉁방울 스타일이 아니다. 북방계 요소가 상당히 스며들었다.

학자들은 ‘고구려 유민설’을 내세운다. 고조선 마지막 왕 준왕이 이주한 곳도 전북 지역이고, 신라는 백제를 멸망시킨 뒤 그 지역을 다스리는 데 애를 먹자 고구려 유민들을 이주시켰다.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전형적인 예다.

통일신라는 문무왕 10년(670)에 고구려 왕족 안승과 그의 예하 4000여 호(戶)를 금마(익산) 지역에 대거 이주시켰다.

한 가구당 5명이라고 쳐도 어림잡아 2만여 명에 달하는 숫자다(당나라 기록에 의하면 백제가 망할 때 76만 호에 총인구 1800만 명. 이 중 300여만 명이 당나라로, 수백만 명이 신라의 노예로 끌려갔고, 100여만 명은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이후 이들에게는 어떤 형태로든 백제 유민들의 피가 섞였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후백제가 망한 뒤에 고려 태조 왕건은 신라인들을 전주로 대거 이주시켜 살게 했다. 반란의 싹을 없애려 했던 것이다. 결국 전북 지역에는 백제, 고구려, 신라인이 골고루 뒤섞이게 된 것이다. 국제도시가 따로 없다.            

사실 북방계 얼굴은 눈코입이 작을뿐더러 얼굴이 평면적이어서 딱딱하게 보인다. 촌스럽고 무뚝뚝하고 억센 느낌을 준다. 어찌 보면 퉁명스럽게 보인다. 외국인들이 곧잘 ‘한국인들은 무표정하고 약간 화난 것 같아 무섭다’고 말하는 이유다.

새만금 사람들도 그렇다. 거의 표정 변화가 없다. 남의 일에 잘 나서지 않고 그저 묵묵히 지켜보기만 한다. 가슴속 깊이 삭이고 또 삭인다. 저물녘 서해 갯벌의 시꺼먼 젓국처럼 속이 질퍽하게 썩고 문드러져야 비로소 ‘자다가 봉창 두드리듯’ 한마디 느릿느릿 툭 던진다. “거시기 쬐께 껄쩍지근허고만 이잉”이라고 하고는 싱긋 한번 소웃음을 친다. 좋게 말하면 점잖고, 나쁘게 말하면 나긋나긋 사교적이지 못하다. 겉으론 무뚝뚝하지만 조금만 속을 들여다보면 살갑기 그지없다. 늘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몸에 배어 있다. 외지인들이 와서 살아도 텃세가 거의 없다. 그만큼 배타적이지 않고 어우러져 놀기를 좋아한다. 

넉넉하고 유순한 ‘들판 정신’

새만금 사람들에겐 ‘들판 정신’이 있다. 온유하고 넉넉하고 유순하다. 붉게 물든 저물녘 들판은 강물과 두런거리며 어둠을 맞는다. 농부들은 저마다 저문 강에 삽과 손발을 씻고 집으로 돌아간다.

김제 만경 출신의 탄허(呑虛)스님은 불교뿐만 아니라 유학, 역학, 노장철학 등 유불선(儒佛仙)에 두루 눈 밝았다. 평생 불교 경전 연구와 번역에 매달린 스님은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날 것을 알고, 자신의 거처를 오대산 상원사에서 경남 양산 통도사로 옮겼다. 생전 탄허스님은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일본 영토 3분의 2가 침몰하고, 우리나라는 동남해안 쪽 100여 리 땅이 피해를 입을 것이다. 하지만 서해안 쪽으로 약 2배 이상의 땅이 융기해 영토는 오히려 늘어날 것이다. 작은 섬나라로 줄어든 일본은 우리나라 영향권 내에 들어올 것이다.”         

그렇다. 새만금은 그곳 사람들 속마음처럼 가슴속 깊이 삭이고 삭이다가 이제 서서히 ‘융기’하고 있다. 그 땅에는 정여립, 강증산, 전봉준, 전우 선생 등 모악산이 품은 정신이 깃들어 있다. 세계 만민의 자유와 평화가 그곳에 녹아 있다.

입력 2016-09-21 13:45:27

김화성 | 언론인·여행작가 marsstell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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