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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자로 본 중국

충돌과 저항 ‘관문’의 운명

津 - 베이징의 ‘수호 거인’

  • 글 · 사진 김용한 | 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충돌과 저항 ‘관문’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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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톈진(天津)은 ‘천자의 나루터’였다. 명(明)나라 영락제가 톈진에서 배를 타고 상륙해 쿠데타를 성공시켰다. 톈진은 베이징의 목줄이자 항구였다. 수도를 치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 서양 열강과 중국이 충돌한 공간이다. 톈진은 베이징을 위해 존재하는 외눈박이 거인이다. 그래서 톈진 사람들은 ‘톈진 무인(武人)’ 곽원갑을 그리워한다.
충돌과 저항 ‘관문’의 운명

하이허 강변에는 유럽식 건축물이 늘어서 있다.

姐姐講一下.
중국어를 배우면서 중국인과 웬만한 의사소통은 가능해졌지만, 아무래도 중국어의 미묘한 뉘앙스를 다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다. 톈진 여행 중 발랄한 스무 살 아가씨를 만났다. 내가 인사차 “간마야(干嘛呀)?”라고 물어보자 그녀는 내 표현이 어색하다며 그 이유를 설명해줬다.

“누나가 가르쳐줄게(姐姐講一下). ‘간마야(干嘛呀)?’는 어이없는 상황에서 ‘도대체 뭐하는 거야?’라는 뜻으로 하는 말이고, 일반적으로 ‘뭐해?’라고 물어볼 때는 ‘간마너(干嘛呢)?’라고 해.”

내 나이의 반밖에 안 되는 어린 친구가 천연덕스럽게 ‘누나’라고 자칭하자 헛웃음이 나왔지만, 워낙 발랄하고 귀여우니 모든 게 용서가 됐다.

자부심이 강해 20대 중반 청년도 나이 지긋한 사람에게 “이 어르신네가 어찌 네 말을 듣겠느냐”고 말하는 곳, 초등학교 꼬마 아가씨에게도 ‘누님(大姐)’이라고 불러줘야 하는 곳, 톈진이다.



영락제의 루비콘

충돌과 저항 ‘관문’의 운명
톈진(天津)의 약자는 ‘나루 진(津)’ 자다. 톈진이란 ‘천자의 나루터’라는 뜻으로, 명나라 영락제가 여기서 배를 탄 것에서 유래한다. 로마의 시저가 “주사위는 던져졌다”라고 말하며 루비콘 강을 건넜듯, 연왕(燕王) 주체(朱棣)는 톈진에서 배를 타고 상륙해 쿠데타를 성공시키고 영락제로 등극했다. 즉, 톈진은 영락제의 루비콘이다.

톈진은 아홉 줄기 강물이 황해로 흘러가는 교통의 요지다. 일찍이 수양제가 베이징과 항저우(杭州)를 잇는 대운하를 건설했을 때부터 베이징의 관문도시 톈진은 크게 발달했다. 특히 송대(宋代) 북방 유목민족 국가들이 베이징을 중요 거점으로 삼으면서 톈진의 중요성도 급부상했다. 톈진은 강남의 물자를 베이징에 끌어오기 위한 물류도시였다.

톈진은 영락제와 인연이 깊다. 주원장은 원을 물리치고 명을 건국하며 장쑤성 난징을 수도로 삼았다. 송대부터 강남은 이미 중국 경제의 중심이었으나, 북방 국가들이 베이징을 수도로 삼아 정치의 중심은 되지 못했다. 주원장은 명나라를 세우며 난징을 수도로 삼아 정치와 경제의 중심을 일치시켰다. 주원장이 죽고 손자 건문제가 황위를 계승하자, 건문제의 삼촌인 연왕 주체가 반란을 일으켰다. 주체는 톈진에서 수로를 따라 진군해 ‘정난의 변(靖難之變)’에 성공한다.

주체가 쿠데타에 성공했으나 민심은 싸늘했다. 대의명분도 없이 황제가 되고 싶어 일으킨 정변이었다. 명분 없는 정변이라 당대의 관료·지식인들도 협조적이지 않았다. 방효유는 당대 최고의 학자로 황제의 스승이었다. 영락제의 측근들은 “방효유를 죽이면 천하에 글 읽는 선비가 없어질 것”이라며 살려주길 청했고, 영락제 역시 그의 재주와 명성을 아껴 방효유를 회유하려 했다.

그러나 방효유는 영락제의 제의를 단칼에 자르고 “연적(燕賊)이 위(位)를 찬탈했다”며 돌직구를 날렸다. 영락제는 방효유의 일가 친척에다 지인들까지 873명을 방효유 앞에서 죽이고, 끝으로 방효유도 죽였다. 유배자는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이 사건을 통해 명나라 초기 인재들이 대거 사라졌다. 더욱이 당시 문화의 중심이 강남이기에 처형당한 사람은 대부분 강남의 명사들이었다. 강남의 민심은 더더욱 영락제에게 등을 돌렸다.



조계지 톈진의 비애

영락제의 책사 도연(道衍)은 정난의 변 직후 고향 쑤저우(蘇州)를 찾았다. 20년 만의 금의환향이었으나 고향 사람들에게 냉대를 받았다. 여든 살에 가까운 도연의 누이는 도연을 만나지도 않고 돌려보냈다.

“그렇게 지체 높으신 분이 이런 초라한 집에 오실 용무가 있겠습니까. 무언가 잘못 아시고 오셨겠지요.”

민심이 이렇게 차가워지자 영락제는 자신의 본거지 베이징을 수도로 삼으며, 강남의 물자를 끌어올리기 위해 대운하를 개수했다. 톈진은 자연스럽게 교역·물류의 중심지가 됐다. 영락제가 황제가 되기 전에는 출병기지, 황제가 되고 난 후에는 ‘물류센터’가 된 셈이다.

베이징의 목줄로서, 군사·경제적 요지로서 톈진은 매우 중요했다. 베이징을 지키려면 톈진을 반드시 지켜야 했고, 베이징에 들어오려면 톈진을 반드시 거쳐야 했다. 근대에 톈진을 지키려는 중국과, 톈진에 들어오려는 서양 열강은 첨예하게 맞부딪쳤고, 톈진은 중국과 서양이 만나는 동시에 충돌하는 공간이 됐다.

톈진의 젖줄 하이허(海河)는 걷기 좋은 길이다. 드넓은 강변엔 최첨단 고층건물과 함께 근대 유럽식 건축물들이 늘어서 전통과 현대가 잘 어우러진다. 유럽풍 건축은 고풍스러우면서도 세련된 아름다움을 뽐낸다. 톈진에서 가장 큰 성당인 서개천주교당(西開天主敎堂)은 경건하게 기도하는 천주교인과 놀러온 구경꾼들이 모두 즐겨 찾는다. 오늘날에는 서양적 가치와 중국적 가치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늘이 있기까지 역사는 많은 피를 흘려야 했고, 특히 조계지 톈진은 커다란 고통을 견뎌내야 했다.

예나 지금이나 중국은 거대한 생산기지이자 탐나는 시장이다. 서양 열강은 중국의 귀한 상품을 얻고 중국 시장에 물건을 팔려 했으나, 당시 세계경제의 으뜸이던 중국은 폐쇄적 경제체제를 유지하려 했다. 중국은 서양인을 천박하게 돈만 밝히는 오랑캐 장사꾼으로 봤고, 서양은 중국인을 시대의 흐름을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로 봤다. 상호 경멸은 갈수록 심해져 중국은 서양인을 털북숭이 원숭이로 봤고, 서양은 중국인을 아편 피우는 동양 원숭이로 봤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경멸하니 충돌은 시간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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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사진 김용한 | 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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