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호

미디어 비평

클린턴 몰빵 & 트럼프 몰매 한국언론 美 대선보도 유감

  • 정해윤 | 시사평론가 kinstinct1@naver.com

    입력2016-11-03 17: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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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미국 대선은 우리에게도 큰 관심사다. 그래서 우리 언론매체들도 9월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와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 간 첫 TV토론을 비중 있게 다뤘다. 그런데 상당수 매체의 논조가 클린턴에 너무 치우친 감이 있다.

    ‘조선일보’는 9월 28일자 1면에서 트럼프를 공부 안 한 수험생, 클린턴을 완벽한 연기자로 묘사했다. 누가 봐도 클린턴의 압승으로 인식할 만했다. 3, 4면도 통째로 미국 대선 소식에 할애했는데 “빨간 옷(힐러리)은 강렬했고 190㎝ 거구(트럼프)는 코를 훌쩍였다”라고 비슷한 논조를 견지했다. 작은 기사에선 CNN 여론조사 결과를 인용해 62대 27로 클린턴이 승리했다고 전했다. 한국 관련 정책을 다룬 4면에선 “트럼프 ‘한국, 방위비 더 내야’…클린턴 ‘한미 방위조약 존중’”이라는 타이틀을 뽑아 우리 처지에서도 클린턴이 더 나은 후보임을 암시했다.



    언론판 대연정?

    진보 성향인 ‘한겨레’의 편집도 비슷했다. 1면에서 “62대 27…준비된 클린턴 압승”이라며 클린턴에게 힘을 실어줬다. 3면에선 “클린턴, 차분했지만 공세…트럼프, 흥분했지만 방어 급급”이라며 두 후보를 대비시켰다.

    한국의 보수 언론과 진보 언론은 국내 정치 이슈에선 자주 대립적이지만, 클린턴과 트럼프의 대결에선 모두 친(親)클린턴 성향인 것으로 비친다. 이는 우리 언론이 자주 인용하는 CNN,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스’ 같은 주류 미국 미디어가 친클린턴 성향이라는 것과 어느 정도 연관될 것이다.



    사실 우리 언론은 선거나 북한 문제, 현대사 이슈 같은 몇몇 쟁점을 제외하면 생각보다 큰 차이가 없다. 특히 이번 미국 대선 보도는 언론판 대연정(大聯政)처럼 비치기도 한다. 우리 언론 보도대로라면 트럼프는 미국 대통령이 될 수도 없고 돼서도 안 될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를 지지하는 많은 미국인은 똑같이 어리석고 위험한 사람들일까.

    미국에는 주류 미디어의 흐름과는 다른 여론도 존재한다. 우리 언론이 인용한 62대 27의 CNN 여론조사는 불과 521명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타임’, CNBC, ABC, 폭스뉴스의 인터넷 여론조사에서는 오히려 트럼프가 첫 TV토론에서 이겼다는 결과가 나왔다.

    트럼프에 대한 우리 언론의 비관적 전망은 공화당 후보 경선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 ‘저러다 말겠지…’ 식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트럼프는 살아남았고 끝내 후보 자격을 쟁취했다. 이것은 미국의 밑바닥 여론이 우리 언론 보도와 적잖이 괴리됐음을 보여준다. 현지 여론을 제대로 알려면 미국 언론의 생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미국 보통 시민들의 마음

    흔히 트럼프 현상의 원인을 기성 정치에 대한 환멸에서 찾는다. 그런데 이것은 기성 언론에 대한 환멸로 이어진다. 미국 언론계는 ‘진보 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주류 신문·방송·잡지는 압도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하는 성향이며, 보도에서도 노골적으로 편향성을 드러내는 편이다. 이 매체들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라는 말로 친 클린턴 성향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트럼프를 지지하는 40%대의 미국 시민들은 자신보다 이민자에게 더 관대한 자국 언론을 불신한다.      

    미국 언론의 편향성은 클린턴에게 유리할 것 같지만, 이번 대선에선 역설적인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트럼프는 저서에서 “나쁜 평판은 평판이 없는 것보다 낫고, 논란은 장사가 된다”는 거래의 기술을 밝혔다. 이것이 대선판에서 어느 정도 입증되고 있다. 트럼프는 막말 논란으로 언론의 집중포화를 받았지만, 오히려 노출 빈도를 높여 정치 신인의 약점인 낮은 인지도를 끌어올렸다.

    언론의 공세에 ‘약자 코스프레’로 대응해 지지자들을 결집시키기도 했다. 한 조사에 따르면 힐러리가 이번 대선에서 1억 달러를 투자해 8억 달러의 광고효과를 본 반면 트럼프는 1000만 달러를 들여 15억 달러의 효과를 봤다고 한다.

    ‘트럼프 현상’은 우리가 2002년 대선 과정에서 경험한 ‘노무현 현상’과 유사하다. 노무현은 기성 언론에 대한 불신을 투박한 언사로 표현했고 인터넷 여론전에서 승리했다. 트럼프 역시 정치인의 교과서적 화법을 파괴했고 SNS를 통해 지지자들과 직접 소통했다. 2002년 한국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미국인들은 정치 엘리트와 언론 엘리트에 대한 불신을 트럼프를 통해 분출한 셈이다.  

    제3자인 우리 언론의 ‘클린턴 몰빵’은 아슬아슬해 보인다. 트럼프의 당선 여부와 상관없이 미국에서 트럼프 현상은 한동안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그렇다. 7월 영국인들이 선택한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는 반세계화와 보호무역주의를 상징한다. 이는 트럼프 현상이나 샌더스 현상과 맥을 같이한다.

    좌파 경제학자들은 세계화의 가장 큰 수혜자로 미국을 지목해왔다. 그러나 최근 일부 연구자들은 오히려 “1990년대 이후 세계화의 가장 큰 피해자가 미국 등 선진국의 중산층”이라고 주장한다. 미국 중산층은 지금 단단히 화가 나 있고 변화를 갈망한다. 누가 미국 대통령이 되든 이 흐름을 바꾸긴 힘들어 보인다. 클린턴도 같은 당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추진해온 TPP(환태평양 경제동반자협정)에 대해 재검토 의사를 밝혔다. 자유무역체제에서 이미 후퇴하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 공격해 얻는 것은?

    그렇다면 우리 언론은 트럼프를 때려서 무엇을 얻으려는 것일까. 이 대목에서 진보와 보수는 다른 셈법을 하고 있다. 우리 보수 언론의 관점에서 트럼프는 주한미군 주둔 및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지속과 관련해 한국을 불안하게 만든 것으로 여긴다. 반면 클린턴은 확고한 이행을 공언한다. 결국 ‘현상 유지’를 원하는 우리 보수 언론의 열망이 ‘친클린턴 논조’로 나타나는 듯하다.

    우리 진보 언론은 이성적 판단을 결여한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부동산 재벌’ ‘공화당’ ‘막말’ 같은 피상적 이미지에 근거해 막연하게 트럼프를 싫어하는 것 같다. 그러나 정책만 놓고 보면 트럼프는 한국 진보 진영이 원하는 가치에 더 가까이 가 있다.

    트럼프는 기본적으로 미국을 고립주의로 돌려세우려 한다. ‘세계 경찰’ 노릇을 내려놓으려 한다. 또한 한반도에서의 미군 영향력 감소를 암시한다. 한국에 자주국방을 주문하기도 한다. 그래서 중국과 러시아는 내심 트럼프를 훨씬 선호한다. 일부 눈치 빠른 한국의 진보 성향 지식인들도 “트럼프의 당선이 더 낫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 진보 언론은 이런 사정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트럼프가 여성 비하 막말을 한 사실이 드러나자 우리 보수·진보 언론은 트럼프 때리기에 더 열을 낸다. 문제는, 우리 언론의 이러한 트럼프 공격이 한국에 별로 득 될 게 없다는 점이다. 선거 결과는 투표함을 열어봐야 안다. 우리 언론은 트럼프 현상에 잠재된 평범한 미국인들의 마음을 읽는 데 더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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