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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외교관이 쓴 韓中 5000년

하늘에서 내려온 자 ‘새벽별 (Chorbon, 졸본)’에 터 잡다

東漢 vs 부여족·선비제국

  • 백범흠 | 駐프랑크푸르트 총영사, 정치학박사

하늘에서 내려온 자 ‘새벽별 (Chorbon, 졸본)’에 터 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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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개의 나루, 百濟

고구려가 국가 체제를 갖추는 과정에서 소서노(召西奴)와 비류(沸流), 온조(溫祚)가 이끄는 해상 연계 세력이 이탈했다. 이들은 서해 뱃길을 타고 내려가 한강 하류 서울 일대를 점거하고 ‘100개의 나루(항구)를 가진 나라’라는 뜻의 백제(百濟)를 세웠다.

고구려와 백제는 건국 이후 곧 동아시아 국제사회에 두각을 드러냈다. 고구려와 백제 건국을 전후해 낙동강 좌안, 오늘날의 경주 지역에는 신라(新羅), 낙동강 우안, 오늘날의 김해 지역 등에는 가야(伽耶)가 출현했다. 신라나 가야의 건국 모두 북방에서 남하한 부족과 한계(韓係) 원주민이 혼화한 결과였다.

무제의 증손자인 선제(宣帝)는 무제가 남긴 부정적 유산, 즉 심각한 경제난을 극복하고 흉노에 공세를 취하는 등 중흥의 시대를 열었다.

흉노는 한나라군의 잇단 공격, 불순한 기후에 따른 기아(饑餓), 선우 계승 문제가 겹친 끝에 기원전 55년경 동·서로 분열했다. 동부를 대표하는 호한야(呼韓耶) 선우가 한나라에 항복하는 등 흉노는 존망의 위기에 내몰렸다. 서부를 대표하는 질지(郅支) 선우는 탈출구를 찾아 북쪽의 정령(투르크족의 한 갈래)과 서쪽의 견곤(투르크족의 한 갈래로 키르기스인의 조상)을 정복했다.

또한 카자흐스탄 동남부 일리강 유역의 강거(투르크족의 한 갈래)를 복속시킨 후 오손(투르크족의 한 갈래)을 합병해 키르키스의 추(Chu)강으로부터 우즈베키스탄 서부 아랄해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서흉노는 기원전 41년 추강과 탈라스강 사이에 큰 성을 쌓았다. 서흉노에 대한 한나라의 공격은 집요했다. 한나라와 동흉노 연합군 7만여 명이 성을 에워싸고 격렬히 공격해왔다. 끝내 성은 함락되고 질지, 선우 등 서흉노 지도부 1500여 명이 살해당했다. 한나라도 선제를 마지막으로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선제의 아들이자 유교적 이상주의자인 원제(元帝)와 방탕한 쾌락주의자 성제(成帝)를 거치면서 난숙기(爛熟期)의 퇴락을 경험하고, 기원후 8년 외척 왕망(王莽)의 신(新)에 나라를 찬탈당하고 말았다.



고구려와 ‘하구려’

하늘에서 내려온 자  ‘새벽별 (Chorbon, 졸본)’에 터 잡다

고구려 건국 시기 한반도와 만주 일대 판도 [동아일보]

한나라를 빼앗은 왕망은 부족한 정통성을 보완하고자 ‘유교적 이상주의에 입각해 서주(西周)에서 시행됐다’는 정전제(井田制)를 도입하는 한편, ‘한나라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기존의 정부 기관명과 지명 또한 거의 다 바꿨다. 심지어 외국인 고구려를 ‘하구려(下句麗)’라고 부르기도 했다. 왕망전(王莽錢)을 도입하는 등 화폐개혁을 실시했으며 왕토사상(王土思想)에 입각해 토지와 노비의 매매를 금하고, 소금과 철, 술을 비롯한 중요 산물을모두 정부 통제하에 뒀다.

왕망의 섣부른 경제·사회개혁은 경제난을 가중시켰으며, 호족(豪族)은 물론 그가 보호하려던 소상인과 농민도 불만을 품게 했다. 왕망의 실패는 이전 왕조(王朝)의 것은 덮어놓고 부정한 데서 출발했다. 과도한 이상론은 이에 기름을 부었다.

농민의 불만은 ‘녹림적(綠林賊)의 난’ ‘적미(赤眉)의 난’ 등 전국 규모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왕망은 왕읍(王邑)과 엄우(嚴尤) 등에게 40만 대군을 줘 막 국가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 갱시제(更始帝) 유현(劉玄)의 녹림 반란군을 토벌하게 했다. 공격 목표는 녹림군의 장수 왕봉(王鳳)과 유수(劉秀)가 수비대장으로 있던 허난성 소재 곤양성(昆陽城)이었다.

유수는 13기(騎)만 거느리고 포위된 곤양성에서 가까스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유수는 성 부근에서 구원병 7000명을 모아 다시 곤양성으로 향했다. 유수의 탁월한 지휘와 병사들의 일당백 전투력 등에 힘입어 녹림군은 곤양성 전투에서 신나라 40만 대군을 괴멸시켰다. 이 전투로 인해 신나라는 사실상 멸망했다. 이때가 기원후 23년이다.

승세를 탄 갱시제군은 신나라의 수도 낙양(뤄양)을 점령한 데 이어 장안(시안)도 손에 넣고, 새 정권의 도읍으로 삼았다. 갱시제 유현은 유수를 경계했다. 유현은 기주(冀州)와 유주(幽州) 즉, 허베이 지역이 안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수를 허베이 지역에 파견했다. 유현과 그의 측근들은 유수가 사라지자 권력에 도취했다.



‘득롱망촉(得隴望蜀)’의 유래

유수의 군대가 허베이 지역을 떠돌 무렵 한나라 성제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왕랑이 이끄는 세력이 황하 중하류에 면한 한단(邯鄲)을 중심으로 봉기했다. 왕랑의 세력은 급격히 불어났다.

유수는 허베이 지역의 최강자가 진정왕 유양이라고 판단한 후 그에게 접근했다. 유수는 다리를 놓아 유양의 질녀인 곽성통을 아내로 맞이했다. 유수는 유양을 후원자로 두면서 그가 거느리던 10만 대군을 확보했다. 유수의 인품과 능력을 눈여겨보던 어양(漁陽), 상곡(上谷) 등의 강력한 군대를 보유한 지방관들이 휘하에 모여들었다. 결국 유수는 왕랑을 손쉽게 격파했다. 어양은 지금의 베이징시 일원, 상곡은 산시성 북부 일대로 흉노, 선비, 부여, 고구려 등 북방 민족 나라들에 접한 곳이다.

유현은 왕랑이 제거된 것에 기뻐하기보다 유수의 세력이 커진 것에 불안을 느꼈다. 유수의 군대는 지방 호족과 옛 한나라 관리의 군대까지 흡수해 수십만 명에 육박했다. 유수는 기원후 25년 광무제(光武帝)로 등극했다. 이제 천하 패권의 향방은 유수와 갱시제 유현, 그리고 번숭(樊崇)이 주도하는 적미군으로 좁혀졌다. 광무제 유수는 유현을 압박했으며 세가 불리해진 유현은 적미군에 투항했다. 유수는 적미군과 천하를 건 일전을 준비했으나 거듭된 한발과 기아로 인해 오합지졸이 돼버린 적미군은 기원후 27년 제대로 싸워 보지도 않고 유수에게 항복했다.

유수는 적미군의 항복을 받은 후 독자 정권을 수립하고 있던 간쑤성 동남부 롱(隴)의 외효(隗囂)와 촉(蜀)의 공손술(公孫述) 세력을 멸했다. ‘한 가지를 이루고 나면 또 한 가지를 바라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의미하는, 즉 롱을 얻고도 만족할 줄 모르고 또 촉을 노린다는 뜻의 ‘득롱망촉(得隴望蜀)’이라는 말이 여기서 생겨났다. 어쨌거나 광무제 유수의 한나라, 즉 동한(東漢)이 기원후 36년 모든 적대 세력을 제압하고 중국을 재(再)통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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