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호

이선경의 讀書, 督書, 毒書

나쁜 짓도 유용하게? 외설조차 건전하게?

  • 이선경 | 문학평론가 doskyee@daum.net

    입력2016-11-09 13:4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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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돌적이며 도발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어 악행을 부추기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매우 건전한 메시지를 담은 책들이 있다. 탕아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방황하던 시절의 질펀한 이야기를 놔두고 굳이 집으로 돌아온 후의 감동과 교훈에 대해서만 말하는 책들도 있다. 이번에 할 이야기는 소위 나쁜 것들을 옹호하는 척하는 책에 대해서다. 

    심리과학자 리처드 스티븐스의 ‘우리는 왜 위험한 것에 끌리는가’는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바람직하지 못한 나쁜 짓이나 일탈행위를 적극 권장한다. 예를 들면 음주를 권한다. 알코올에 덧붙여진 중독과 그것에 이어지는 부정적 이미지는 20세기 들어서 생긴, 상당히 정치적이고 독단적인 합의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근대 이전 알코올은 일부 질병을 예방하는 효과를 가진 것으로 인식됐으며 치료 목적으로 처방되기도 했다.

    스티븐스가 제시하는 몇몇 과학적 실험의 결과에 의해 알코올은 창의력을 불러일으키며 원만한 사회적 상호작용의 원동력을 제공해주는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더불어 인간 내부의 숙취라는 제동장치로 인해, 정지 단추까지 탑재된 이상적인 음료로 취급받는다.



     진보를 향한 터닝포인트

    점잖지 못한 욕설 또한 추천된다. 행복에 겨워 지르는 욕이든 짜증에 복받쳐 내뱉는 욕이든, 그것은 욕할 정도의 여유를 가졌다는 안정감의 표지여서다. 때로 극심한 통증이나 스트레스가 발생할 경우에도 욕설은 유용하다. 욕을 하며 생성되는 전율의 강도로 인해 아드레날린이 분비돼 고통을 완화해주기 때문이다.



    사회적 체면이 구겨지거나 듣는 상대의 기분을 거스를까 걱정된다고? 괜찮다. 고학력에 사회계층이 높을수록 욕하는 빈도가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도 제시된다. 또한 청천벽력이나 극도의 충격에서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욕은 용납된다는 증거도 제시된다. 욕이란 상황적 맥락, 그러니까 해도 될 만한 사이에서만 하는 것이라 오히려 유대감을 강화한다고도 주장한다.

    이 책에서는 게으름도 찬양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멍한 상태, 어수선하고 정리정돈되지 않은 공간, 남아도는 시간 속에서 지루할 정도로 빈둥거리는 실존을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있다. 극도의 무념무상 상태를 통과하고 나서야 인간은 직관을 통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시간을 낭비하고 나서야 집중력과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으며, 지루해보지 않고서는 자기 성찰을 할 수 없다. 필자는 이런 게으름의 상태를 잠복기라 부른다. 스스로 게으름을 느낀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할 때가 왔음을 자각하는, 진보를 향한 터닝포인트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좀 허무하고 싱겁지 않은가. 필자가 권장하는 나쁜 짓이란 사실 그리 심각한 수준의 비행은 아니다. 또한 나쁜 짓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지 못한다. 나쁜 짓이 권장되는 것은 그것이 의외의 성과를 가져올 때다. 궁극적으로 더 유용해지기 위해 하는 일탈이란, 마치 미리 다녀오는 포상휴가나 회식 자리에서 어쩔 수 없이 상사에게 해야 하는 야자타임과 비슷하지 않은가. 만일 그것이 사전에 의도된 것이라면 더더욱 진정한 리스크는 아니지 않을까.



    초식남과 철벽녀

    조금만 더 수위를 높여볼까. 사회학자 에바 일루즈의 저서 ‘사랑은 왜 불안한가’는 19금 연애소설인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시리즈에 대해 말한다. E. L. 제임스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시리즈는 평범한 여대생 아나스타샤 스틸과 그리스 조각 같은 외모에 억만장자인 청년 사업가 크리스천 그레이 사이에서 벌어지는, 계약연애로부터 시작해 열렬한 사랑으로 이어지는 하드코어 로맨스다. 이 할리퀸 로맨스 스타일의 소설에는 노골적인 성적 묘사는 물론이거니와 사디즘과 마조히즘까지 난무한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별다른 홍보도 없이 입소문을 타고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됐으며 영화로도 제작되고 있다. 전 연령의 독자가 읽을 수 있는 선에서 이 소설의 일부를 제시하면 이런 식이다.



    나는 아도니스의 모습을 처음으로 전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 신이 빚어놓은 몸매의 크리스천 그레이. 내 안의 여신도 춤을 멈추고 입을 떡 벌린 채 살짝 침을 흘리면서 바라보았다.

    -E.L. 제임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중에서



    여주인공 아나스타샤에 초점을 맞춘 이러한 동경과 감탄, 기대와 갈망, 때로는 갈등과 상실의 감정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로맨스. 독자의 상당수가 몰래 숨어 읽었으리라 추측되는 이 하드코어 로맨스에서 사회학자가 읽어낸 것은 무엇일까. 이 소설의 조악함을 지적하면서도 일루즈는 베스트셀러로서 이 책이 불러일으키는 사회적 공감에 주목한다. 외설에 가까운 사도마조히즘 계약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 책이 독자의 공감을 얻은 이유는, 그것이 불안과 위기에 처한 오늘날 우리의 애정 전선에서 자기계발서 기능을 하는 데 있다.

    지금 여기의 우리는 사랑이 두렵다. 연애와 결혼을 원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내가 나일 수 있는 자주권과 많은 경우 충돌하기 때문이다. 초식남과 철벽녀가 무성애자라는 새로운 종으로 진화하는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자아를 흠집 낼 수 있는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사랑이 하고 싶지 않은 우리에게, 역설적으로 철저한 계약에 의한 연애로부터 궁극적인 사랑으로 나아가는 방식은 하나의 계몽적 교과서 기능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때로 그것이 변태적이고 외설적인 방법이라도.



    한 잔의 술, 한 줄의 외설

    그것은 불확실한 현대의 애정관계를 확실하고도 예상 가능한 것으로 바꿔준다. 더군다나 그것은 에로스의 쾌락을 최대의 목표로 삼는 연애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지 않은가. 일루즈는 이 외설적인 하드코어 로맨스적 방식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시대의 신경줄을 건드린다는 것에 대해서만은 사회적 공감의 기능을 인정한다.

    그렇다면 다시 나쁜 것들을 옹호하는 책들의 태도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술이든 욕이든 게으름이든 음란함이든, 사실 그것들은 모두 우회로이기 때문에 옹호된다. 창의성과 사회적 상호작용을 위한 음주, 친밀감을 과시하기 위한 욕설, 더 높은 생산성을 목표로 하는 게으름, 자기계발을 향해 나아가는 일그러진 형태의 연애. 이것들은 모두 성장과 효율을 위한 건강함을 궁극의 목표로 삼는다. 나쁜 것들을 옹호하는 척하며 이들 책이 지향하는 것은 결국 지극히 이상적인 가치들이다.

    그런데 나쁜 것들이 처음부터 유용성과 건전함을 목표로 획기적인 결과를 이끌어낸 것일까. 오히려 그러한 결과들은 의도치 않은 부차적 여파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러한 신선함은 의도했을 때 역효과만 가져올지도 모른다. 우리는 나쁜 것들까지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기보다는, 모든 탈선과 일탈과 외설을 그대로 두고 보지 못하는 통제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나쁜 것은 나쁜 것 그대로여야 진정한 가치가 있다. 길을 잃은 줄도 모르고 헤매야 미지의 땅으로 들어설 수 있으며, 선을 넘은 줄도 모르는 채 빗나가야 새로운 길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니 때로는 복잡한 생각 따위는 하지 말고 그냥 한 잔의 술을, 한 마디의 욕을, 한때의 한가함을, 한 줄의 외설을 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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