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호

한 글자로 본 중국 | 홍콩

京과 紅에 짓눌린 港人治港의 꿈(베이징·공산당)

港 | 중국과 세계를 잇는 항구

  • 글 · 사진 김용한 | 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입력2016-12-06 13:4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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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편전쟁 당시 홍콩은 “제대로 된 집 한 채 없는 황폐한 섬”이었지만, 지리적 이점과 아편무역은 홍콩을 재화와 문화가 모이는 교역 중심지로 만들었다. 그러나 홍콩인들은 오랫동안 참정권을 박탈당한 채 “‘포주’ 영국에 돈을 바치는 창녀” 신세였다. 마지막 홍콩 총독은 중국 반환 직전 ‘민주화 지뢰’를 묻었지만, 홍콩인이 홍콩을 다스리는 꿈(港人治港)은 멀기만 하다.
    지난 9월 초, 더위가 한풀 꺾인 한국과 달리 홍콩은 여전히 무더웠다. 나는 쇼핑몰보다는 거리를 둘러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홍콩에서는 달랐다. 숨 막히게 무더운 홍콩에서는 조금만 걸어도 지치고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활짝 열린 쇼핑몰 입구에서 상쾌하게 뿜어져 나오는 에어컨 바람을 맞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쇼핑몰 안에 들어와 있었다.

    홍콩이 왜 쇼핑으로 유명한지 깨달았다. 쇼핑을 그리 즐기지 않는 사람들도 더위에 지치면 시원한 쇼핑몰로 들어오게 마련이다. 홍콩 쇼핑몰이 왜 문을 활짝 열어둔 채 에어컨을 켜놓는지도 알았다. 쇼핑몰 에어컨 바람이야말로 최고의 영업사원이었다. ‘쇼핑 천국’ 홍콩에선 날씨가 쇼핑을 부추긴다.

    홍콩(香港)의 약자는 ‘항구 항(港)’이다. 중국뿐 아니라 세계의 대표적 항구인 홍콩다운 약칭이다. 중국이면서도 중국 본토와는 사뭇 다른 땅, 그래서 역설적으로 세계와 중국을 이어주는 항구가 홍콩이다.

    홍콩이 ‘향기로운 항구’라는 뜻의 이름을 갖게 된 유래에는 다양한 전설이 있다. 옛날 이곳에 ‘향고(香姑) 선녀’가 살았다는 전설이 있는가 하면, 향나무가 많아서, 또는 향로가 떠내려와 생긴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어떤 전설이든 홍콩은 향기로운 항구라고 한다. 향나무의 산지로 출발했다가 인도·동남아·아라비아 향료를 (아마도 은밀하게) 거래하는 작은 항구로 성장했기에 붙은 이름이리라. 그러나 작은 항구가 국제무역항으로 변모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국제무역항 홍콩의 탄생엔 매혹적인 향기 대신 매캐한 화약 냄새가 깔려 있다.





    아편으로 탄생, 아편으로 성장

    청나라 말기 조정은 부패하고 무능했지만 경제력만큼은 무시무시했다. 영국은 일찍이 산업혁명을 일으켜 저렴한 면직물로 당대 세계시장을 휩쓸었지만, 중국에서만큼은 큰 적자를 봤다. 중국은 유럽에서 수입하고 싶은 것이 없었지만, 유럽은 중국에서 차, 비단, 도자기 등 수입하고 싶은 게 많았다.

    영국이 청나라에 비해 우위를 가진 것은 군사력밖에 없었다. 신식 군대를 통해서 부당 거래를 강요해야 했다. 덩치 크고 둔한 중국은 한두 번 맞는다고 정신을 못 차리진 않을 것이니 계속 수시로 때려줘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영국은 중국 가까운 땅에 해군 기지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하면 당대 최강인 대영제국의 해군력으로 청나라에 꾸준히 압력을 가할 수 있었다.

    이때 영국이 눈독을 들인 땅이 홍콩이었다. 홍콩은 중국 본토와 최단거리가 불과 400m일 정도로 바짝 붙은 섬이다. 그러면서도 섬답게 경계 구획이 확실하고, 만일의 경우 본토로부터의 침공을 수월하게 막을 수 있다. 수심이 깊고 해안선 깊숙이 만입된 지형은 항구로서 이상적이다. 게다가 중국 남방무역의 중심지인 광둥성 광저우와 매우 가깝고, 동남아시아, 대만, 일본, 조선 등 다양한 지역으로 진출 할 수 있다. 말라카-싱가포르와 홍콩 두 지역만 장악하면 동아시아의 제해권과 패권을 장악할 수 있다.

    당시 일본의 육군사관학교장은 영국이 홍콩에 건설한 요새를 견학한 뒤 영국의 국력과 군항 홍콩의 막강함에 통탄을 금치 못했다.

    “상층으로 통하는 통로는 연와석(煉瓦石)으로 축조돼 무릇 20칸으로 짐작되는 탄약고·막사 등의 설치가 세밀하고, 땅굴의 덮개는 연화석(煉化石)으로서 1m 반 정도로 건축돼 수뢰기(水雷機) 발사 시설도 있다. (…) 일본은 1000만 엔을 육군에 써도 전국에 아직 완전한 요항(要港)이 없고, 에도만(灣)의 방어도 올해에야 구색을 갖추게 됐다. 그런데 홍콩은 동양 영국령의 일단(一端)에 불과함에도 그 방어가 이와 같아 그들이 우리를 모욕함은 까닭이 있으니 어찌 탄식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영국은 아편으로 중국인들을 중독시켰고, 아편전쟁으로 청나라를 굴복시켰다. 제2차 아편전쟁 후 베이징 조약을 체결할 때는 아편을 양약으로 분류해 아예 아편무역을 합법화해버렸다. 국제무역항 홍콩은 아편으로 태어나고 아편으로 성장했다. 1844년 홍콩 총독 존 데이비스는 부임 직후, 사적 자본을 가진 거의 모든 홍콩 거주민이 아편무역에 종사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아편은 홍콩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거래되고 비중이 가장 높은 주력 수출품이었다. 아편 가격이 주식 시세처럼 매일 신문에 보도됐다.

    1910년대는 국제사회 여론도 아편금지 추세로 흘렀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아시아의 작은 섬은 관심에서 멀어졌다. 당시의 목격자는 말한다.

    “독일인들은 억류되고 독일 사업체는 폐쇄됐다. 홍콩 거주 영국인 다수가 자원병으로 전장에 나갔다. 그래도 홍콩이 번영일로를 달릴 수 있었던 것은 일정 정도 아편이라는 비상용 물자 덕분이었다.”

    핵심 인력들이 빠져나가고, 기업 등 경제 단위들도 운영이 정지되는 상황에서도 아편이라는 ‘비상용 물자’는 불황과 전쟁을 모르는 ‘효자상품’이었다. 아편 무역과 재배를 오래 하다 보니 전문지식도 축적됐다. 훗날 마약이 세계적으로 불법화하자 동남아 국가들의 통치력이 쉽게 미치지 못하던 태국·라오스·미얀마 접경 산악지역 일대에 마약 재배 기지 ‘골든 트라이앵글’이 나타났다.

    골든 트라이앵글은 반군, 범죄조직, 현지 농민과 외부 고급인력이 유입되며 기업화했다. 홍콩·대만 출신의 화학자들이 마약 연구소와 정제소에서 일했다. 이렇게 재배된 마약은 삼합회 등 범죄조직에 의해 홍콩, 마카오, 대만으로 흘러들었다. 홍콩과 마약의 인연은 이렇듯 질기고도 질겼다.



    황폐한 섬의 대변신

    홍콩 하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사업가는 국제금융 도시를, 관광객은 쇼핑과 음식 천국을 떠올릴 것이다. 그 모든 이미지는 홍콩이 돈과 온갖 재화, 문화가 모이는 곳이며 교역의 중심임을 의미한다.

    아편전쟁 당시 영국 외무장관 파머스톤의 말처럼, 홍콩은 “제대로 된 집 한 채 없는 황폐한 섬”이었다. 지리적 식견이 부족한 파머스톤은 전쟁까지 치르면서 기껏 쓸모없는 섬을 얻은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영국의 식민지가 된 후 홍콩은 급속히 달라졌다. 해안선을 따라 큰길이 놓였고, ‘여왕의 길(Queen´s Road)’ ‘국왕의 길(King´s Road)’이라는 영국식 이름이 붙었다. 1865년 로빈슨 총독은 홍콩에 인프라를 체계적으로 구축한다. 근대식 병원, 학교, 경찰서, 교도소, 가로수, 종탑을 세웠고, 은행, 상공회의소, 상하수도를 마련했다.

    홍콩의 변화는 중국의 사상가들에게 크나큰 문화충격과 영감을 안겨줬다. 청말의 대표적 사상가 캉유웨이(康有爲)는 홍콩을 방문한 뒤 “서양에도 법도가 있음을 비로소 알았다”며 감탄했다. 홍콩의 우아한 서양식 건물, 깨끗한 거리, 효율적 치안,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를 보며 서구의 시스템에 매료된 캉유웨이는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혁신을 꾀하는 변법자강운동을 구상했다. 쑨원(孫文) 역시 홍콩에서 혁명을 배웠다고 말했다. 홍콩은 신사상·신중국의 어머니였다.



    알제리 모델, 홍콩 모델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통치엔 프랑스의 알제리 모델과 영국의 홍콩 모델이 있었다. 절대왕정의 중앙집권성이 강한 프랑스는 알제리를 프랑스의 하나의 도(道)로 간주하고 직접 통치했다. 이에 반해 봉건영주의 지방분권성이 강한 영국은 작은 식민지 정부가 홍콩을 간접 통치했다. 식민지 정부는 군사적 역량을 갖추고 식민지 수탈을 위한 인프라를 완비하되, 토착지도층의 영향력을 사회적으로 최대한 활용했다.

    홍콩은 작은 정부를 지향했기에, 중앙정부가 장악해야 할 중앙은행도 형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고 민간 기업과 상업회의소가 알아서 운영하도록 했다. 작은 총독부와 토착사회의 자치조직, 경제기구들이 병존하게 됐는데, 이는 중국인 특유의 사조직, 향우회, 상방(商幫, 상인 집단) 문화와도 잘 어울리는 방식이었다.

    중국 상인들은 홍콩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홍콩은 동중국해와 남중국해를 연결하는 접점이며, 남부 중국과 동남아의 중심에 위치한 요지다. 게다가 근대 인프라 위에 근면 성실한 중국 상인들이 움직이니,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격이었다.

    19세기 중반은 홍콩의 신시대였다. 영국에 홍콩은 극동의 거점이며 자유무역항으로서 매우 중요해졌다. 다만 이때의 자유무역이란 떳떳하지 않은 밀무역이었고, 중요 거래 품목은 아편과 ‘현대판 노예’인 쿨리(苦力, 중노동에 시달린 하층 노동자)였다. 작가 진순신(陳舜臣)은 당시 홍콩의 세태를 이렇게 꼬집었다.

    “가장(假裝)한다는 것은 홍콩의 습성이 돼버렸다. 아편은 없는 것으로 가장하면서 실은 듬뿍 있었으며, 쿨리 매매 따위도 않는 체하면서 음성적으로는 성업 중이었다.”

    진통을 겪으면서도 홍콩은 발전을 거듭했다. 지역 발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사람이다. 도시를 만드는 것도, 움직이는 것도 사람이다. 길을 닦고 건물을 지을 사람이 필요하고, 장사할 사람이 필요하다. 돈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고,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 사람이 넘쳐나는 중국에서 인력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人海를 빨아들이다

    홍콩엔 중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두 가지, 돈과 안전이 있었다. 안정적일 때는 돈을 찾아, 혼란스러울 때는 피난을 위해 대륙에서 엄청난 사람이 홍콩으로 몰려왔다. 1895년 홍콩 인구 24만8498명 중 23만7670여 명(95.6%)이 중국인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홍콩 인구는 바로 100만 명이 됐고, 1941년에는 160만 명으로 늘어났다.

    격동의 중국사는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국공(國共)내전 끝에 공산당이 승리하자 많은 기업가, 자본가, 고급 기술자, 숙련공들이 홍콩으로 들어왔다. 1950년 봄 홍콩의 인구는 236만 명에 이르렀다. 대거 유입된 고급 인력은 의류, 해운, 전자 산업에 뛰어들어 홍콩을 국제금융과 현대 산업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1962년 대약진운동과 대기근, 1966년 문화대혁명으로 대륙이 고통 받자 1971년 홍콩의 인구는 393만 명으로 다시 껑충 뛰었다. 1978년 덩샤오핑(鄧小平)이 톈안먼(天安門) 사건을 일으키자, 1980년 홍콩의 인구는 500만 명으로 늘어났다. 경제인뿐만 아니라 많은 문화인, 활동가들도 홍콩에 ‘망명’해 홍콩 문화의 밑거름이 됐다. 현재 홍콩의 인구는 723만 명에 달한다.

    홍콩인들에게 “당신은 당신의 나라를 사랑합니까?”라고 물으면 홍콩인 대부분은 반문할 것이다. “어떤 나라를 말합니까?” 그리고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묻는다면, 홍콩인들은 난감해하며 제각각 다른 답을 내놓을 것이다. 홍콩인(HongKongese, HongKonger), 중국인(Chinese), 홍콩 중국인(Hong Kong Chinese) 등등.

    홍콩의 역사는 짧다. 그러나 변화는 많다. 홍콩 사람들이 특정한 정체성을 가질 만하면 시대가 변하고 사회가 변했다. 홍콩은 영국 식민통치와 함께 역사를 시작했지만 식민통치 아래서 현지인들은 주인이 아닌 노예였다. 영국은 홍콩인들에게 참정권도, 영국 영주권도 주지 않았다. 영화 ‘차이니즈 박스(Chinese Box)’에서 영국 저널리스트 역을 맡은 제레미 아이언스가 말했듯 “홍콩은 부지런히 몸을 팔아 영국이라는 포주에게 돈을 갖다 바치는 성실한 창녀”와도 같았다.



    ‘철도역’의 ‘성실한 창녀’

    영국인들은 홍콩에 정을 주지 않았다. 애초부터 홍콩에 간 영국인들은 대개 고향에서 천덕꾸러기 취급받던 하류계층이었다. 본토인들은 홍콩에서 거들먹거리는 ‘쓰레기(filth)’들이 ‘런던에서 실패해 홍콩을 기웃거리는 놈(Failed In London, Try Hong Kong)’의 줄임말이라고 비아냥댔다.

    고향에서도 뜨내기였던 영국인들은 새로 정착한 홍콩에도 정을 붙이지 않았다. 영국의 한 식민통치자는 말했다.

    “홍콩은 ‘철도역’이라 불려왔다. 사람들은 이곳을 왔다 갔다 하고, 이 거리와 바람을 피우거나 정사를 경험할지도 모르지만, 결코 사랑은 하지 않는다.”

    그러다 거짓말처럼 1997년 홍콩은 중국에 반환됐다. 반환 전후로 홍콩인들은 극심한 불안에 시달렸다. 한편으로는 식민통치를 끝내고 모국의 품으로 돌아가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어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국공내전, 문화대혁명, 톈안먼 사태 등을 떠올리면 무서운 일이기도 했다. 정세 불안은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홍콩은 과연 어떤 곳이고 홍콩인은 누구인가.

    홍콩인 스스로는 문화시민임을 자부한다. ‘미개한 중국인들’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여긴다. 그러나 정작 영국인들이 보기에 홍콩인들은 중국인이다. 더럽지는 않지만 냄새나고, 미신과 유교를 숭상한다. 홍콩인 스스로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 자부하지만, 영국인이 볼 때 홍콩인은 정체불명의 빨간 부적을 덕지덕지 붙이고, 향을 사르고, 풍수(風水)라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땅을 사고 희한한 건물을 짓는다.

    성질이 너무 급해서 불안해 보이기까지 한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 가야 할 층의 버튼을 이미 눌렀음에도 끊임없이 버튼을 계속 눌러댄다. 마치 버튼을 계속 눌러대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도착할 듯이.

    함께 일할 때도 갑갑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자기 의도를 제대로 밝히지 않고 시간만 질질 끈다. 공공연히 표현하지 않고 논의를 지지부진하게 끌어 은근슬쩍 책임을 회피하는 홍콩의 방식을 영국인은 ‘구술 태극권’이라 불렀다. 홍콩에 오래 산 영국인들은 홍콩인들에게 많은 걸 기대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들에게 융통성을 기대하지 말라. 홍콩 교육제도의 실패라 불러도 할 말이 없지만, 그들은 스스로 판단하거나 결정 내리도록 훈련받지 않은 사람들이다.”



    中-港 지역감정 고조

    그러나 홍콩인들은 이미 대륙의 중국인들과는 크게 달라졌다. 홍콩인들은 중국인들이 떼거지로 몰려와 홍콩을 망가뜨리는 것에 눈살을 찌푸린다. 중국인들은 큰길가에서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놓고 쉰다. 거리에 침을 뱉는 것은 예사고, 어린아이가 아무데서나 오줌을 싸게 한다. 홍콩인들은 불만을 터뜨린다.

    “중국인은 예의를 모르고, 무례할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적 질서의식이 희박하다. 자유의식이 결핍됐을 뿐 아니라 더럽고 지저분하다.”

    중국인들은 중국인들대로 홍콩인들이 못마땅하다.

    “홍콩 사람들은 그동안 자본주의에 너무 빠져 있었기 때문에 자기들만 알고 돈을 버는 데만 관심을 기울일 뿐 사람에 대한 배려가 약하다. 이런 점에서 홍콩에는 문화다운 문화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문화적 차이에다 경제·정치 문제까지 겹치니 해결은 난망해진다. 홍콩 반환 전후로 외국으로 이민을 간 주민이 많았지만, 홍콩 인구는 오히려 늘었다. 이민자 대신 본토인들이 자리를 채우고도 남았다. 좁디좁은 홍콩에 많은 사람이 몰리니 집값은 터무니없이 비싸다. 게다가 중국의 부동산 투기꾼들이 부동산 가격을 한껏 올려놓아 홍콩 주택 사정은 더욱 악화됐다.

    집값 상승은 물가 상승을 이끌며 홍콩 서민들의 삶을 더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게다가 2008년 중국에서 멜라민 분유 파동이 발생하자, 중국인 부모들이 대거 홍콩에 몰려와 분유를 싹쓸이해갔다. 홍콩 주민들은 중국인들 때문에 자기들 아기에게 먹일 분유가 없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홍콩은 중국의 슈퍼마켓이 아니다”라던 불만은 어느새 “홍콩은 홍콩인들을 위한 도시여야 한다”는 정치적 자각으로 발전했다.

    지역감정은 한번 생기면 어떤 일에든 개입한다. 2011년 7월 홍콩은 성매매 단속을 벌였다. 중국에서 넘어와 홍콩에서 성매매로 돈을 버는 ‘북쪽 언니(北妹)’ 60명을 적발해 중국에 넘겼다. 지역감정을 유발할 만한 사건은 아니건만, 네티즌들은 지역감정 싸움을 벌였다.

    홍콩인들은 “대륙 남자들은 홍콩에 와서 도둑질하고 여자들은 매춘하고…이러니 1997년 이후에 홍콩 사람들이 죄다 이민 간 것”이라며 대륙인들을 싸잡아 비판한다. 대륙인들은 대륙인들대로 “홍콩놈들, 예전에 광둥성에서 살다가 거지꼴로 넘어간 놈들이 이제 와 잘난 척한다”며 아니꼽게 여긴다.



    ‘진짜 민주주의’ 경험 못해

    사실 중국인들의 불만에도 일리가 있다. 오늘날의 홍콩이 있었던 것은 중국 덕분이니까. 홍콩은 애초부터 영국이 중국에 진출하기 위한 전진기지였다. 뒤집어 말하면, 중국이 없었다면 홍콩도 없었다.

    ‘제대로 된 집 한 채 없는 황폐한 섬’을 개발할 때는 사람의 힘이 필요했다. 그 사람들은 중국 본토에서 왔다. 중국에서 온 막노동꾼, 날품팔이꾼, 뜨내기들이 바로 오늘의 홍콩을 만들어낸 밑거름이다. 좁고 척박한 홍콩에서 그 많은 인구를 부양하기 위한 식량과 물, 전기도 중국에서 왔다. 홍콩의 풍부한 자본도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에 진출하고 싶어 몰려든 자본이다.

    개혁·개방 이후 홍콩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과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광둥성 선전(深圳)이 제조기지 역할을 맡아주면서 홍콩은 고부가가치 산업인 금융업에 전념할 수 있었다. 세계 금융위기로 세계가 휘청거릴 때에도 홍콩은 중국의 대대적인 자본투자 덕분에 번영을 지속할 수 있었다.

    오늘의 홍콩을 만든 것은 예나 지금이나 중국이다. 중국 처지에서는 다른 형제들이 희생해가며 홍콩을 밀어줬는데, 이제 홍콩이 잘나간다고 배은망덕하게 다른 형제들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였다. 영국은 민주주의가 가장 발달한 나라였고 ‘작은 식민지’ 정책을 지향했다. 그래서 홍콩 사람들은 고도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리고 살았을 것만 같다. 그러나 종주국이 제아무리 민주주의가 발달하고 식민지를 강압 통치하지 않더라도 식민지는 식민지다. 홍콩은 민주주의를 제대로 경험해본 적이 없다.

    홍콩인은 영국 여왕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대영제국 시민으로서의 공민권과 참정권은 주어지지 않았다. 총독의 권한은 절대적이었다. 명목상 몇 명의 중국계 의원은 있었지만, 1991년까지 정부의 입법안은 언제나 무사통과됐다. 영국은 1981년 영국국가법(British Nationality Act)으로 포클랜드와 지브롤터 주민들에게는 영국에서 거주할 권리를 보장해줬지만 홍콩은 예외였다. 영국 식민지 중 홍콩은 영국에 경제적 이익을 가장 크게 주면서도, 정치적 이익은 가장 작게 받았다.



    우물물과 강물이 섞이다

    “홍콩인들은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선입관이 있다. 그러나 실상은 홍콩인들이 정치에 무관심한 게 아니라, 무관심하기를 강요받은 것이다. 정치 참여가 봉쇄된 홍콩인들은 경제에 ‘올인’했다. 지도자를 선택할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옷은 선택할 수 있었으니까.

    중국 반환(1997년 7월 1일) 전 영국의 마지막 총독 크리스 패튼은 홍콩의 정치 개혁을 이끌었지만 이는 매우 속 보이는 행위였다. 영국이 진정으로 민주주의를 사랑한다면, 150여 년 동안 가만있다가 반환 3년 전인 1995년 입법의회 선거를 치르며 부랴부랴 민주화를 들고 나왔을까. 영국이 홍콩을 중국에 반환하지 않았다면 홍콩을 민주화했을까.

    그러나 경위야 어찌 됐든, 홍콩 주민들은 처음으로 자신들의 손으로 대표를 뽑을 수 있게 됐다. 홍콩 사람이 홍콩을 다스리는 일(港人治港)은 매우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중국 정부는 홍콩의 민주화가 달갑지 않았다. 공산당 일당독재체제와 홍콩의 직접선거는 상충되는 일이었다. 중국은 홍콩 통치를 곤란하게 만드는 영국의 꼼수가 매우 불쾌했지만, 중요한 것은 일단 홍콩을 돌려받는 것이었다. 그리고 ‘황금 알 낳는 거위’ 홍콩이 죽지 않도록 하는 것은 중국에도 중요한 일이었다.

    홍콩은 특별행정구로서 ‘높은 수준의 자치권(a high degree of autono-my)’을 보장받았다. 1국가 2체제로 중국에 속하기는 하되 사회주의 체제와 다른 독자적 체제를 꾸려갈 수 있다. 우물물은 강물을 범하지 않는(井水不犯河水) 것처럼, 홍콩과 중국은 각자의 한계를 분명히 해서 서로 범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애당초 베이징 정부는 약속을 지킬 마음이 없었고, 홍콩인들도 베이징이 약속을 지키리라 믿지 않았다. 많은 홍콩인은 반환 전후 미국, 영국, 호주 등으로 이민을 떠났다. 특히 인기가 좋았던 캐나다 밴쿠버는 홍콩인들이 워낙 많아 ‘홍쿠버(Hongcouver)’로 불릴 정도였다. 많은 예술가와 영화인도 홍콩을 떠났다. 1980~90년대 세계를 휩쓴 홍콩 영화의 화양연화(花樣年華)도 저물었다. 홍콩 누아르의 전성기는 홍콩 반환 직전 마지막 불꽃, 회광반조(回光返照)였다.

    그런데 생각보다 홍콩의 변화는 별로 없었고, 오히려 더욱 번영하는 것처럼 보였다. 홍콩인들은 다시 고향 홍콩에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변화는 이미 천천히, 하지만 확실히 진행되고 있었다.



    紅人治港, 京人治港

    2014년에 홍콩은 또 한 번 역사의 전환점을 맞는다. 홍콩 반환 이후 지켜져온 일국양제(一國兩制) 원칙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홍콩인들은 2017년부터 행정장관을 직접 선거로 뽑을 수 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꼼수를 부렸다. 행정장관 후보자를 중국 정부가 구성한 선거인단에서 선출토록 해 홍콩인들은 누구를 뽑든 베이징의 입맛에 맞는 사람일 수밖에 없게 됐다. 더욱이 베이징은 혹시라도 오해가 있을까 친절하게 ‘후보자는 애국애항(愛國愛港, 중국과 홍콩을 사랑한다) 인사여야 한다’고 해설했다.

    일찍이 덩샤오핑은 “어떤 사람들은 사회주의를 사랑하지 않는 것과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다르다고 한다. 도대체 어떻게 조국이 추상적인 것인가. 공산당이 지도하는 사회주의 신중국을 사랑하지 않고 무엇을 사랑한다는 말인가”고 애국을 정의한 바 있다.

    조국을 사랑하는데, 왜 그 조국이 꼭 공산당이 지배하는 조국이어야 할까. 그러나 공산당이 지배하는 중국에서 공산당을 반대하는 것은 곧 반역이다. 따라서 애국 인사란 공산당을 지지하고, 또한 공산당의 지지를 받는 사람을 뜻한다. 홍콩인들은 누구를 뽑든 베이징의 충신만을 뽑게 된다. 베이징의 충신이 홍콩을 지배하는 것과 영국 총독의 식민통치와 무엇이 다를까.

    홍콩인들의 부푼 꿈, ‘항인치항’ 대신 공산당이 홍콩을 지배하고(紅人治港) 베이징이 홍콩을 통치한다(京人治港). 급기야 홍콩 시민들은 거리로 나섰다. 정치에 관심 없다던 홍콩인들이 2014년 9~10월 거리를 가득 메웠다. 경찰의 최루액을 우산으로 막아내며 민주주의를 부르짖은 홍콩인들의 투쟁은 ‘우산혁명’이 됐다. 1989년 톈안먼 사건 이래 중국에서 일어난 최대 규모의 집단행동이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완강하다. 일국양제에서 ‘일국(一國)’을 강조하고, “‘높은 수준의 자치권’을 보장한다고 했지 ‘전면적인 자치권’을 보장한 것은 아니다”고 주장했다. 결혼 전 아내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겠다던 남편이 결혼 후 고무장갑 사주는 걸로 끝내려는 격이었다.  

    현재의 대립구도를 단순히 ‘중국 vs 홍콩’으로 볼 수는 없다. 홍콩인들은 중국 정부를 절대 믿지 않는 ‘반중파’와 중국 정부가 어떠한 태도를 취하더라도 별 상관없다는 ‘방관파’, 우리는 모두 중국인이라는 ‘친중파’ 등 세 부류가 엇비슷한 세력을 형성해 팽팽하게 대립한다. 홍콩의 난해함을 지적한 진순신의 말은 오늘도 여전히 유효하다.

    “홍콩이 모략의 도시라고 일컬어지는 것도, 보이지 않게 대립하는 배후 세력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홍콩이 비록 영국 영토의 작은 섬이지만 그곳은 중국 대륙을 움직이는 온갖 세력이 반목하면서 공존하는 도시였다.”



    베이징→홍콩→대만?

    2014년 11월 2일 홍콩 시민 184만 명은 시위 중단과 경찰을 지지하는 서명에 참여했다. 이는 전체 홍콩 시민의 4분의 1, 성인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다. 한편 시위를 지지하는 쪽은 시위가 “안정을 흔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안정을 지키고 번영을 지속하기 위한 것”이라고 항변했다.

    올해 9월 4일 열린 홍콩 입법의회 선거엔 홍콩 유권자 380만 명 중 약 220만 명이 참여했다. 1997년 홍콩 반환 이래 역대 최고의 투표율(58%)이다. 우산혁명의 지도부인 네이선 로 등의 약진에 힘입어 홍콩 자치를 주장하는 범민주파는 지역구 전체 35석 중 절반이 넘는 19석을 차지했다. 이들이 내년 3월에 있을 행정장관 선거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 기대를 모은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완고하고, 홍콩이 어디로 갈지는 불투명하다. 1989년 톈안먼 사건 때 홍콩인들은 “오늘의 베이징은 내일의 홍콩”이라며 불안해했다. 이제는 대만인들이 홍콩을 보며 “오늘의 홍콩은 내일의 대만”이라며 불안해한다. 과연 홍콩이 자율성, 인권, 민주주의를 얼마나 지켜갈 수 있을까.

    홍콩의 추리소설가 찬호께이(陳浩基)는 자신의 책 ‘13.67’에서 “나는 2013년 이후의 홍콩이 1967년 이후의 홍콩처럼 한 발 한 발 올바른 길로 나아가 소생할지 아닐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한 공장의 파업이 중국 문화대혁명 영향으로 봉기로 이어져 5000여 명이 투옥된 1967년 홍콩 봉기 이후 홍콩 경찰은 내부 부패를 척결하고 조직범죄를 뿌리뽑으며 시민의 신뢰를 간신히 회복했다.



    김 용 한

    ● 1976년 서울 출생
    ● 연세대 물리학과, 카이스트 Techno-MBA 전공
    ● 前 하이닉스반도체, 국방기술품질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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