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호

명사 에세이

‘목욕의 영(令)’을 받았느냐?

  • 명로진 | 인디라이터 연구소 대표

    입력2016-12-06 13:5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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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진시황의 병마용갱으로 유명한 중국 시안(西安)시를 방문했다. 병마용갱과 양귀비는 이 도시의 최대 브랜드다. 병마용갱의 규모와 위엄에 당연히 놀랐으나, 내겐 양귀비와 당현종이 자주 갔다는 온천지대 ‘화청지(華淸池)’가 더 인상적이었다. 백거이(772~846)는 ‘장한가(長恨歌)’를 지어 둘의 사랑을 기렸다.



    봄의 입김 아직도 차가운데 / 목욕의 영을 내리신 화청의 못.

    온천물 매끈매끈 응어리진 때를 / 씻어 내려 주다(…)

    처음으로 새로이 이제 / 은택을 입는 때니라.   (천승세)





    당현종은 젊은 나이에 황제 자리에 올라 현군으로 치세했으나 나이가 들어선 양귀비에 빠져 나랏일을 돌보지 않았다. 정사(情事)만 좋아하고 정사(政事)는 소홀히 한 거다. 안록산의 난을 겪으며 피신하다 호위무사들의 반란으로 양귀비는 목숨을 잃는다. 홀로 남은 현종은 우울증에 빠져 쓸쓸히 지내다 세상을 뜬다. 독거노인은 틈만 나면 ‘엑스 와이프(ex-wife)’의 흔적을 좇아 화청지로 몽유했다. 당현종이 ‘목욕의 영(令)을 내리시면’ 양귀비는 화청지에 미리 와서 몸을 씻고 누각에 올라 머리를 말린 뒤 황제를 기다렸다.

    아, 누가 내게 목욕의 영을 내려다오! 나 역시 그를 위해 목욕재계하고 다소곳이 기다리고 싶구나. 그 떨림, 그 설렘, 처음으로 은택을 입는 순간의 전율. 그 엑스터시의 광기를 누리고 싶다. 나는 종교가 없지만 신이 있다면 신은 어디선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가 ‘목욕의 영’을 내리지 않을까. 화청지에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현종은 황제였기에 양귀비 이외에도 많은 궁녀에게 목욕의 영을 내렸다. 그 여인은 잠을 자다가, 수를 놓다가, 음식을 먹다가 영을 듣는다. 순간 모든 것이 정지된다. 하고 있는 일이 아무리 중차대하더라도 멈춰야 한다. 그녀에겐 장안성에서 수레로 3시간 거리인 화청지로 향하는 일만이 중요하다. 나머지는 다 필요 없다. 지엄한 분부 앞에 변명은 소멸한다.

    필자는 대학 졸업 후 스포츠신문사에 들어갔다. 입사 때부터 연예계를 동경했기에 연예부에 가겠다 했다. 신문사에선 신입사원의 소원 따윈 무시하고 사회부에 발령했다. 화려한 무대를 엿볼 생각하지 말고 세속의 사건 속에 코를 박으란 어명이었다. 그때 대학과 경마 쪽을 출입했는데, 대학에 가면 대학가 스타를 취재하고 마사회에 가면 마사회 아나운서를 인터뷰하는 걸로 반항했다.

    세속은 비루하고 날것이었는데 체질적으로 회는 잘 못 먹었다. 입사 1년차 때 미국 아이돌그룹 뉴키즈 온더블록이 내한공연을 했다. 연예부장한테 가서 “취재단에 끼워달라”고 졸랐다. “공연 취재에 사회부 기자가 갈 필요 있느냐?”는 답이었다(실제로 들은 말은 “야, 이 자슥아, 뉴키즈 오는데 니가 왜 가노?”였다). “사건, 사고 나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했다. “애들 노래하는데 무슨 사고가 나냐?” “애들 노래하는 데 애들이 몰려와서 보니 사고가 날지도 모르죠.” 연예부장은 떨떠름한 고갯짓으로 허락했다.

    사실 그때 나는 뉴키즈 온더블록의 왕팬이었다. 기자 프리패스를 달고 맨 앞에서 구경할 속셈이었다. 한창 공연을 보고 있는데 뒤에서 자꾸 애들(주로 여중·고생)이 밀려왔다. 신음에 이어 비명이 들렸다. 사고다! 직감이 왔다. 이날 안전요원도 제대로 없이 진행된 공연에서 여고생 100여 명이 밀려 넘어져 다쳤고 한 명은 결국 사망했다. 재빨리 구호를 청하고 상황을 정리해 신문사에 타전했다. 편집국장이 나중에 연예부장에게 “사회부 기자 한 사람 보내길 잘했네” 했단다.  

    연예기자 생활 3년차 때 박상원, 김혜수, 이미숙 등 베테랑 배우들이 출연하는 드라마 ‘도깨비가 간다’를 취재하러 갔다. 주요 배역인 김준 역할이 아직 캐스팅되지 않은 상태였다. 낮엔 박물관 직원, 밤엔 킬러라는 이 꽃미남 악역은 매력적이었다. 연출자인 이장수 PD에게 “누굴 염두에 두고 있느냐”고 물으니 “다음 주쯤 정해질 것”이란다. 다음 주에 찾아가니 이 PD가 내 앞에 드라마 대본을 내놓으며 말했다. “명 기자가 김준 역을 해보겠소?” 그날 밤 16부작 대본을 다 읽고 나자 날이 밝아왔다.

    이미 나는 김준에 빠져 있었다. 마음은 선하나 상황 때문에 악의 수렁에 빠질 수밖에 없는 배역을 꼭 해보고 싶었다. 샤워(목욕재계)를 하고 책상에 앉아 편집국장에게 제출할 사직서를 썼다. 손이 떨렸다. 아마도 내 생애 첫 번째 ‘목욕의 영’이었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스스로의 능력을 늘 과대평가한다”(마키아벨리)고 했던가. 나는 스스로 꽤 미남이라 생각했다. 이장수 PD의 안목이 탁월하다 여겼다. 웬걸? 방송국 로비에서 장동건을 보니 나는 평범했다. 더구나 연기는 내 전공도 아니었다. 이후 40여 편의 드라마에 출연했지만 크게 빛을 보진 못했다. 한마디로 나는 인생을 우습게 보고 까불었다. 무대를 동경하다 그 위에 서서 박수도 받고 연기도 원 없이 했으므로 만족할 뿐이다.

    2006년 여름, 대학 선배인 심산 작가가 시나리오 학원을 열었다. 내게 “와서 연기를 가르치라”고 했다. 아닌 것 같았다. 며칠 뒤 또 댄스라도 가르치란다. 아니라고 했다. 심 선배와 나는 쿵짝이 잘 맞아 자주 어울려 다녔다. 인수봉 바위에도 매달리고 제주도 길도 걷고 전국의 산을 돌아다녔다.

    이즈음 사진작가 손재식, 심 선배와 함께 북한산에 올랐다 내려와 새로 생긴 사우나에서 담소를 하는데 심 선배가 손 작가를 스카우트하려고 “우리 학원에 와서 사진반을 하시죠” 했다. 이때 딱! 하고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심 선배에게 “책을 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인디라이터 반을 개설하겠다”고 말했다. “인디라이터가 뭐냐?” “독립적인 저술가란 말이지.” “오케이!”

    이렇게 해서 두 번째 목욕의 영을 받들었다. 그때부터 저서를 쓰고 싶어 하는 예비 작가들을 대상으로 인디라이터 강의를 시작했다. 현재 32기가 진행 중이다. 600여 명의 수강생이 거쳐 갔고 그들이 낸 책이 130여 권이다.



    진짜 성공은 과정 속에

    2007년 봄, EBS에서 연락이 왔다. “매일 책을 소개하고 읽어주는 프로그램을 새로 만든다”면서 진행을 해달란다. 이때 ‘논어’나 ‘맹자’ ‘호메로스’ 같은 책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인문 고전이 내게 목욕의 영을 내린 셈이다. 왜 이제야 이 책들을 만나게 됐나 하는 후회 속에 인문학 공부를 시작했다. 지인들을 모아 동서양 고전을 읽었다. 인디반 제자들과 함께 토론했다. 한문 공부를 하고 필사를 하고 유학자를 만났다. 동영상 강의를 듣고, 그리스 신화와 관련된 미술 작품을 감상했다.

    인문학은 나이 40이 돼도 흔들리고 유혹당한 내게 버팀목이 됐다. 그렇다고 인문 고전 공부가 흔들리지 않는 법을 알려주지는 않았다. 성공하는 방법도 재테크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흔들리려면 꺾여 쓰러질 때까지 제대로 흔들리라고, 진짜 성공은 과정 속에 있다고, 재테크보다 사람 테크를 하라고 귀띔할 뿐이었다.

    인문학은 라틴어로 ‘후마니타스()’인데 반대말은 ‘인후마니타스()’다. 반대말이 의미심장하다. 몰인정, 무자비, 무례, 불친절. 결국 인문학의 반대는 신학이 아니라 세상의 불인(不仁)이다. 반의어로 유추해보는 인문정신은 인정과 자비와 예의와 친절이다. 매일 목욕의 영을 받는 심정으로 공자와 호메로스를 읽으면서 나는 어제보다 조금 더 친절한 사람이 되길 바랄 뿐이다.



    명 로 진

    인디라이터 연구소 대표. 연세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스포츠조선’ 기자를 하다 방송계에 입문, SBS 드라마 ‘태양의 남쪽’ 외 40여 편에 출연했다. EBS FM ‘고전 읽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인문 고전과 글쓰기에 대한 책을 여러 권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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