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호

특집 | 崔&朴 슈퍼게이트

“순수한 도움이 악의로 이용됐어요”

최순실이 ‘직접고백’한 최순실

  • 이혜민 기자 | behappy@donga.com

    입력2016-12-14 12: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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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7년 10월호 여성동아에 최순실 수기 게재
    • “나는 육영재단 배후조종자가 아닙니다”
    • “대학 4학년 때 박근혜 명예총재 처음 만나”
    • 단국대 학부, 미국 유학 학력 위조 의혹 제기

    ‘최순실’이라는 이름이 언론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79년이다. 그해 6월 11일자 ‘경향신문’이다

     

    서울 시내 33개 대학교의 새마음봉사단원 750여 명을 비롯, 새마음봉사대 각구단원 750명, 새마음연예봉사단원등 1550여명이 한양대운동장을 꽉 메운 새마음제전은 이날 상오 10시 20분 최순실(단국대대학원1년) 전국새마음대학생 총연합회장의 개회선언으로 시작됐다.

     

    그로부터 8년 후인 1987년 ‘여성동아’ 10월호엔 ‘박근혜 육영재단이사장 측근으로 몰린 최순실 씨 직접고백 “나는 육영재단의 배후조종자가 아닙니다”’ 기사가 나온다. 같은 달 ‘여성중앙’에는 ‘단독 인터뷰 육영재단 ‘외세 개입설’ 관련 최태민 전 구국봉사단 총재 딸 최순실 “순수한 도움이 악의로 이용되었어요”’ 기사가 실렸다.



    그 무렵 일간지는 최씨를 다루지 않았다. 다시 8년 세월이 흐른 뒤인 1995년 11월 14일자 ‘세계일보’에 ‘민 국제영재교육 연구원의 최순실 원장(39) 등 3인이 서울시내 학부모 36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관한 기사가 처음으로 나올 뿐이다.



    첫 만남과 재회 

    최씨는 여성동아 기고문에 ‘대학 4학년 때 박근혜 당시 구국여성봉사단의 명예총재와 처음 만났다’고 썼다. 최씨는 75학번이므로 대학 4학년 때라면 1978년경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1976년 구국여성봉사단 발단식 때부터 명예총재를 맡았다.

     

    당시 그분은 퍼스트레이디 역을 맡을 때였다. 구국여성봉사단의 명예 총재직을 맡고 있을 때이기도 했다. 당시 ‘새마음대학연합회’ 간부가 그 모임에 참여하라고 내게 권했다. 아버님이 간여하시는 여성봉사단 단원의 다른 자녀들이 거의 모두 참여하는 모임에 나만 빠진 것 같아 나도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 대학 4학년 때 나는 ‘새마음대학연합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활동 영역이 넓어지자 보다 폭넓은 지원이 아쉬워졌다. 그래서 우리는 당시 큰 영애 박근혜 이사장을 뵙기로 했다. 그분을 만난 자리에서 우리 대표들은 열심히 설명을 했다. 그분의 승낙과 지원을 받아 우선 여자아이들에게는 타자를, 남자아이들한테는 상업 부기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런데 최씨는 같은 달 여성중앙 인터뷰에선 다른 얘기를 했다. “박근혜 씨와 알게 된 것은 언제부터냐”는 기자의 질문에 “개인적으로 만난 것은 지난해(1986년) 어린이회관에서 처음이었어요”라고 답했다. 여성동아 기고문에서 최씨는 이 시기에 “박 이사장과 재회했다”고 썼다. ‘86년 봄소풍 때 그분과의 뜻밖의 만남이 이뤄졌다”고 했다.

    (1985년 11월 경) 그 당시 유치원은 거의 모두 획일성을 띠고 있었다. 나는 국내 처음으로 종합학원 인가를 받아 문을 열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야외공간이 없는 것이 문제점으로 거론됐다. 당시 내 주위의 친한 분이 어린이회관 활용을 생각해 보라고 했다. (…) 대여섯 번 어린이회관을 이용할 즈음 나는 뜻밖에도, 회관 내를 돌아보던 박근혜 재단이사장을 만날 수 있었다. 박 이사장은 교육자로 변신한 나를 바라보며 반가운 눈인사를 건넸다. (…) 유치원 설립이 계기가 되어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담고 있던 박근혜 이사장과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건 언제일까. 적어도 1979년 6월 10일에 만난 것은 확실하다. ‘뉴스타파’는 박 대통령과 최씨가 이날 한양대에서 열린 제1회 새마음제전에서 나란히 걷고 속삭이는 모습을 포착한 영상을 공개했다.

    다만 최씨가 그 이후 박 대통령과 어떻게 지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최씨는 기고문에 “10·26 이후 난 그분이 어디 계신지도 몰랐다”면서도 “대학원 시절 2년 동안에도 그분이 주도하는 대학생 활동의 후원자 역할을 나도 계속하면서 관계가 지속되었다”고 썼다. 하지만 10·26은 1979년의 일이고, 최씨의 대학원 2년 시절은 1979~1980년이다.



    의문의 유학 학력

    여성동아에 수기를 실은 1987년만 해도 최씨는 유학 학력을 거론하지 않았다. 최씨는 단국대 영문과, 단국대 대학원 영문과를 수료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기고문에선 ‘대학 4학년 때’ ‘대학원 시절’이라고만 썼다.

    ‘중앙일보’에 따르면 최씨는 단국대에 ‘청강생 제도’(1981년 폐지)를 통해 입학했고, 단국대 대학원에선 연구과정을 수료했다. 이와 관련, 단국대 관계자는 “최씨는 학부과정 청강생이고, 대학원 정원외과정을 수료했으므로 학부, 석사학위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국내 연구자들이 자신의 정보를 입력하는 한국연구자정보(KRI, www.kri.go.kr)에 연구자회원으로 가입 후 ‘최순실’을 검색하면 최씨가 미국 캘리포니아 주 퍼시픽스테이츠대학교(PSU)에서 1981년 2월 학사학위, 1985년 2월 석사학위, 1987년 2월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전공은 ‘유아교육학’이란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학력이 위조된 것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홍병식 PSU 교수는 CBS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PSU엔 유아교육과가 없고, 최씨가 학교에 다닌 기록도 없다”면서 “해당 학교에 최순실의 개명 전후 이름(최필녀, 최서원)을 다 확인했지만 그런 학생이 다닌 적이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밝혔다.

    최씨는 대학에 재직하기 위해 이 같은 학력을 활용한 듯하다. 최씨는 1988년 3월부터 1992년 2월까지 영진전문대 유아교육과 조교수 겸 부설유치원 부원장으로 재직했다. 최씨는 이 대학에 제출한 이력서에 자신의 학력을 어떻게 기재했을까. 영진전문대 측은 “최씨의 이력서를 비롯한 정황을 일절 확인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당시 재직한 교직원들이 사망했고, 기록이 건물 이전 등으로 유실됐다”는 게 이유다.

    최씨는 이 학력을 적어도 2008년까지 내세웠을 가능성이 크다. 최씨가 KRI 시스템 학력 정보를 최종 갱신한 시점은 2008년 4월 1일, 연락처 등 개인정보를 개정한 날은 2011년 9월 16일이다. 물론 연구자가 논문 작성, 연구비 수주 등의 활동을 하면 학교 측이 연구자의 정보를 수정하고 이 정보가 KRI에 자동 업데이트된다. 하지만 최씨에겐 2000년대의 연구 실적이 없다.  



    유아교육자의 꿈

    최씨는 여성동아 기고문에 “85년 11월경 독일에서 돌아와 ‘상황 중심 교육’을 시도하기 위한 작업을 연구했다”라고 썼다. KRI에 따르면 최씨는 PSU에서 1985년 석사, 1987년 박사학위를 취득했는데 그사이에 독일엔 왜 갔을까. 1980년대에 독일에서 최씨를 처음 만났다는 전직 언론인은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최씨가 독일에서 공부했고, 이후에도 자주 오갔다”고 말했다.

    최씨의 꿈은 유아교육자였다. 기고문에서 그는 고아와의 인연이 시작이었다고 썼다.

     

    대학원 시절(1979~1980년) 나는 고아인 8살짜리의 보호자 역할을 한 적이 있다. 그 아이는 이른바 ‘찍쇠’라고 불리우는데 ‘새마음 야간학교’에 입학시켜 우리 대학생들 교사들이 정을 그렇게 많이 쏟았는데도 도무지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다. 이미 굳어버린 동심과 사회에 오염된 아이의 실상이었다. 나는 그 아이의 빗나감을 통해 여고시절부터 꿈을 키워오던 유아교육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슴 속에서 꽃피우기 시작했다.



    그는 1985년  11월경 ‘종합학원’ 인가를 받았다며 이곳을 ‘우리 유치원’이라고 칭한다.  

     

    85년 11월경 나는 독일에서 돌아와 ‘상황 중심 교육’을 시도하기 위한 작업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나는 여러 형태의 교구와 교재를 제작하며 유아 교육기관의 문을 여는 일에 들떠 있었다. 그 당시 유치원은 거의 모두 획일성을 띠고 있었다. 나는 국내 처음으로 종합학원의 인가를 받아서 문을 열었다.

     

    하지만 취재 결과 최씨는 ‘종합학원’이 아닌 ‘유치원’ 인가를 받았다. 서울 강남서초교육청 행정지원과 유치원설립팀에 따르면 최씨는 1986년 5월 강남구 신사동 ‘초이유치원’ 인가 신청을 했고, 2002년 2월 인가 폐지를 신청했다. 강남서초교육청 평생교육건강과 학원팀 관계자는 “‘초이’나 ‘최순실’ 관련해 인가받은 학원은 없다”고 밝혔다.  



    재산 증식 미스터리

    ‘유아교육자’ 최씨의 공식 기록은 1989년에 집중된다. 그해 10월 발간된 ‘(어린이 버릇)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가’(김광웅·최순실 공역, 교육과학사)에서 최씨는 공동번역자, 한국문화연구재단 연구원 부원장으로 소개됐다. 같은 해 한국문화재단연구원은 9월과 12월 각각 ‘사회문화적 환경변인에 따른 아동의 발달격차 연구’, ‘사회계층문화와 아동발달에 관한 이론적 고찰’을 펴냈다. 두 연구서의 공동책임자는 김광웅 숙명여대 교수, 공동연구자는 최순실을 비롯한 숙명여대 강사들이다. 연구서는 최씨를 영진전문대 교수, 초이몬테소리교육원 원장으로 소개했다.

    한편 최씨는 기고문에서 유치원 건립 재원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나의 소망인 유치원을 세우기 위해 나는 6~7년 동안 부지런히 뛰었다. 조그만 소품가게를 키워 의상 대리점으로 발전시키기도 했다. 그 의상 대리점에 웬만큼의 프리미엄이 붙자 은행융자, 친척에게 약간의 도움을 받아 유치원을 설립하게 된 것이다.

    ‘이데일리’ ‘연합뉴스’에 따르면, 2007년 최씨는 자신과 부친 최태민씨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김해호 씨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서 소장에 이렇게 적시했다.

       

    1979년경부터 강남구 압구정 현대아파트 상가에서 L패션 대리점을 2년간 운영했다. 1982년경부터 강남구 신사동의 한 빌딩에서 M 소가구 인테리어점을 운영했다. 1985년 신사동의 한 건물을 임차해 종합학원을 운영하다 아이들이 늘어났고, 유치원을 하기 위해 바로 앞 부지  107평(353㎡) 부동산을 다른 사람과 공동 취득했다. (현재 수백억대에 이르는 신사동 미승빌딩 건물 매입 경위에 대해) 아이들이 늘어 학급을 늘리기 위해 신사동 640-1의 200평 건물을 3명이 1988년경 매입했다. 인수 당시 그곳은 교회와 유치원을 하는 곳이라서 굳이 유치원을 하는 사람 외에는 나서지 않아 매입했다. 2003년 이 건물을 신축했는데, 주위에 위해업소가 들어오기 시작해 유치원 운영을 더이상 계속 못하게 됐기 때문이다.



    최씨가 패션 대리점, 인테리어점, 종합학원을 운영했다는 시점은 그가 미국 유학을 했다는 시기와 겹쳐 또 다른 의문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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