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호

‘간 이식 개척자’ 이종수의 독일 편지

영혼은 언제 육체를 떠나나

선조의 묘와 수술실

  • 이종수 | 독일 본대 의대 종신직 교수

    입력2017-01-26 09:5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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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로 유학해 58년간 의술을 편 이종수 박사의 수필을 2월호부터 연재합니다. 이 박사는 독일에 살면서 느낀 동·서양 문화의 차이와 다양한 이면을 구수한 입담으로 들려줄 계획입니다. 유럽 대륙에서 최초로 간 이식에 성공한 선구적 인물인 이 박사는 아흔을 앞둔 나이에도 여전히 연구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선 ‘새로 쓰는 간 다스리는 법’ 등 베스트셀러를 펴내기도 했습니다.
    내가 독일에서 살아온 날이 58년. 몸은 독일 땅에 있지만, 영혼은 아직도 얼마간은 한국인이다. 특히 한국의 명절이나 기념일이 되면 옛일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이번 설날에도 고향인 전남 영암 땅을 밟지는 못하겠지만, 친지들이 모여 가족의 정을 나누는 정경이 눈에 밟힌다.

    가족의 정뿐 아니다. 서양에서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국의 전통이나 습속에 대해서도 여전히 나는 그 끈을 끊지 못하고 살고 있다. 그 하나가 영혼과 죽음에 대한 생각이다. 죽은 조상을 땅에 묻고 섬기는 풍수지리 풍습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언젠가 시사뉴스가 자주 방송되는 DLF방송에서 한국의 묏자리 문제와 풍수지리설을 다룬 적이 있다.

    “한국에는 산세, 지세, 수세 등을 판단해 인간의 길흉화복과 연결시키는 풍수설이 있습니다. 한국인은 이것을 수백 년간 믿어와 지금도 일상생활에서 영향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특히 조상의 묏자리가 명당이면 자손이 복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집안에 우환이 있거나 사업에 실패하면 조상의 묘, 주로 자기 부모의 묘가 풍수지리설로 판단해 좋지 않은 자리에 있기 때문으로 여기고 묏자리를 옮긴다고 합니다. 우리 유럽인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선거에 출마하는 사람마저 당선되기 위해 선거 전에 지관의 조언을 듣고 부모의 묘를 이장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시체에 대한 동서양의 다른 시선

    “한번 묏자리를 봐주는 데 경비를 얼마나 받습니까?”라는 독일 기자의 질문에 한 지관은 “우리는 일정한 비용을 받지 않고 묏자리를 구하려는 사람의 경제 능력에 따라 사례를 받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독일 기자는 한국을 차로 여행해보면 길가의 언덕 위에 또는 산허리 중턱에 멜론 반쪽을 엎어놓은 모양으로 흙을 쌓아놓은 것이 보이는데 이것이 한국의 묘이며, 부잣집 조상의 묘는 그 주변에 나무도 심고 비석도 만들어놨다고 했다. 한국인이 이렇게 조상의 묘를 정성 들여 관리하면 앞으로 몇 년 후에는 낮은 산이 전부 묘로 덮일 수도 있다고 그 기자는 말했다. 그리고 한국인은 묘 앞에 음식을 차려놓고 술잔을 올려 살아 있는 사람을 접대하는 것처럼 절을 하고 혼잣말로 조상에게 속삭인다고 덧붙였다.



    나는 이 방송을 들으면서 죽은 사람의 영혼과 시신(屍身)에 대한 동서양의 서로 다른 견해가 내 머릿속에 혼재돼 있음을 새삼 느꼈다.

    먼저 한국식 견해다. 이것은 어릴 때 받은 유교적 가정교육에 의해 세뇌된 것이다. 조상의 시신을 묻은 묘를 명당에 잘 쓰고 가꿔야 후손이 번성해가고 집안에 경사가 많다는 생각이 평생 내 머릿속 한구석에 숨어 있다가 한국에만 가면 재차 소생한다. 독일에서 반세기 이상 살았어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기독교 교리에 입각한 유럽식 견해다. 사람은 죽는 순간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 견해는 특히 유럽에서 장기 이식을 해온 의사로서의 직업의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나는 한국에 나가면 2~3년에 한 번 정도 고향에 있는 산소에 성묘를 간다. 그곳에는 조상의 묘가 모여 있는 선산이 있다. 원래 내가 자란 마을에는 일가친척 대부분이 살며 농업에 종사했는데 이제는 그 마을에 친척이 두 집만 남아 있다. 비행기로 광주에 도착하면 나는 공항에 마중 나온 조카와 함께 가게에 가서 성묘할 때 차릴 음식을 산다.

    “얘야, 여러 가지 좀 더 많이 사거라. 모처럼 고향에 왔으니 선영 상에 많이 놔드려야 하지 않겠니?”

    마치 살아 있는 분들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겸허한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특히 아버지 묘 앞에선 항시 어릴 때 들은 설교를 떠올린다.

    “사범학교 졸업하면 인근 학교에 교사로 부임해서 조상 모시고 농사도 겸해 살아가는 것이 가장 행복한 생활이다. 그것 잊지 마라.”

    나는 묘 앞에서 “아버지가 원하셨던 대로 가까이 있지 못하고 먼 외국에 있으니 그 불효를 용서하세요”라고 빌며 절을 한다. 죽은 사람의 영혼이 그 묘 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묘, 조부모의 묘에  절을 할 때도 마찬가지 대화를 하고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빈다.


    해부 실습생들의 패륜

    한국에서 이처럼 살아 있는 후손이 선조의 묘를 가꾸고 성묘를 하는 것은 자기 가문을 자랑하는 것인 동시에 자신도 조상의 복을 받아 대성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나라 풍수지리설과 조상 숭배의 관습은 후손들이 복을 받기 바라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럽 사회에 돌아오면 나는 이 조상숭배의 의식구조에서 완전히 벗어나 생활한다. 의사인 나는, 특히 뇌사자에게 장기를 얻어 이식하면서 평생 사람의 시신과 영혼의 문제에 부딪혀왔다. 내가 의학도의 길에 들어서서 처음으로 사람의 시신과 영혼의 문제에 맞닥뜨린 것은 해부학 실습을 할 때였다. 당시 나는 포르말린 속에 장기간 보존돼 있는 시신으로 해부학 공부를 했다. 코를 찌르는 포르말린 냄새와 해부학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는 스트레스 때문에 내게 배당된 시신과 죽음, 영혼 문제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죽은 자에 대한 농담이 실습장 여기저기서 들리고 급기야 웃음바다가 되는 불손한 장면도 간혹 있었다. 자기 조상이 아닌, 주인 없는 시신에 대한 의대생들의 패륜을 책망해본다.

    환자의 사망 원인을 분석하기 위해 처음으로 병리실에서 시신을 해부한 것은 1959년 겨울이다. 독일 유학 첫해 겨울에 내가 다니던 하인리히·하이네 대학병원에서 약 30km 떨어진, 독일 루르공업지대의 핵심부에 있는 에센 시의 휴이센스스티프퉁 병원의 내과로 실습을 나간 적이 있다. 남자병동에 있었는데 어느 날 37세 광부가 허리가 아프다며 입원했다. 유학 온 지 1년도 안 돼 나는 독일어가 서툴렀는데도 그 환자가 나에게 상당히 의지해, 나는 각별한 관심을 갖고 보살폈다. 주말을 보내고 그다음 주 월요일에 출근했는데 그 환자가 보이지 않아 물어봤더니 사망했다고 했다. 허리 통증은 사망할 병이 아닌데 하고 의아심이 생겼으나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오전 11시가 넘어 병동장 스미트 박사가 나를 끌고 가며 말했다.

    “미스터 리, 이리 와요. 어제 그 환자가 사망했는데 곧 병리실에서 그 환자의 시신 해부가 시작돼요. 같이 가보지요.”

    대학병원 병리학교실의 시신해부실에 비하면 지방병원의 병리실은 청결하지 못했는데 그보다는 해부대 위 시신의 얼굴을 보니 소름이 끼치고 생명의 허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피부에는 이미 검붉은색 반점이 생겨 있고 시신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는 저 환자의 영혼은 어디 있을까 하고 주위를 둘러봤다. 그의 영혼이 어디선가 나를 쳐다보며 원망하고 있지 않을까 불안했다.

    사망 원인은 금세 밝혀졌다. 간호사가 근육주사를 놓았는데 주사기가 오염돼 주사한 부위에 가스 괴저(壞疽)가 생겼던 것이다. 믿고 치료받기 위해 입원한 병원에서 간호사의 잘못으로 귀중한 인간의 생명이 스러진 것이다. 시신은 병리교수에 의해 절개되고 뇌를 비롯한 모든 장기는 사인을 판명하기 위해 적출돼 검사실로 운반됐다. 영혼은 육체를 떠났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장례식장으로 옮겨진 시신은 일부 잔해에 불과했다.

    그러던 나는 1969년 뇌사자의 간을 떼어 유럽대륙 최초로 간 이식을 했다. 즉 최초로 뇌사자에게서 장기를 떼어냈다. 간을 제공한 이는 21세 청년이었는데 뇌출혈로 입원해 의식불명 상태가 됐고 뇌사 진단을 받았다. 뇌사는 1960년대에 콩팥, 심장 등의 장기 이식이 시작되면서 생긴 용어다. 인공호흡에 의해 신체의 모든 부위는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어도 뇌는 이미 사망해 의식불명 상태에 있는 사람에 대해 의학계가 규정한 새로운 죽음의 정의다. 뇌사한 그 청년의 피부색은 창백했다. 하지만 죽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검붉은 반점이 없어 시체로 생각되지 않았다. 의식은 없으나 얼굴은 잠자고 있는 자와 같았다. 기독교의 교리대로 이 환자의 영혼은 정말 이미 육체를 떠난 걸까. 육체를 떠났다면 어느 시점에서 떠났으며, 어느 구석에서 지금 자신의 간을 떼내려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까. 아니면 천당에 가 있을까. 그런 의문들이 내 머릿속에서 교차했다.



    뇌사 판단과 종교

    1960년대 의학계에서는 뇌사의 여러 가지 진단 기준을 발표했다.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대학병원의 하이드 교수는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를 인공호흡으로 생명을 유지시킬 때 여러 날이 지나도 회복이 안 된 경우 그 환자가 언제 사망했다고 봐야 하는지 당시 로마교황 비오 12세에게 물었다. 교황은 “그것은 의학이 판단해 결정할 일이지 종교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다시 말하면 의학이 뇌사자라고 진단한 순간 종교적으로 볼 때 환자는 사망한 것이고 그 순간 영혼은 육체를 떠났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1969년 간 이식에 성공했다는 사실이 언론에 연일 보도된 뒤 내가 근무하는 병원에 간이식수술을 받으려고 기다리는 환자가 무척이나 많아졌다. 그러나 간을 제공할 뇌사자가 적어서 나는 주변의 크고 작은 병원을 찾아다니며 교통사고 등으로 생존 가망이 없는 환자를 우리 병원에 보내줄 것을 부탁했다. 장기 이식을 통해 사람을 살리기 위해 나는 죽어가는 환자나 뇌사자가 된 시신을 모집하는 의사가 됐다. 기기묘묘한 운명 아닌가. 이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는 의사가 뇌사의 진단을 내리는 순간 영혼은 육체를 떠났다고 봐야 한다고 ‘설교’했다. 나의 직업의식 탓이다.

    1972년 어느 날 나는 우리 병원에서 약 100km 떨어진 곳에 있는 아헨시 근처의 천주교병원에서 뇌사자의 간 제공과 관련된 강연을 했다. 그때 한 신부가 이런 질문을 했다.

    “닥터 리, 의식불명인 환자를 대상으로 인공호흡을 할 경우가 있는데, 의사가 뇌사 진단을 확정하지 않았다면 그 환자는 아직 영혼이 육체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봐야 합니까?”

    뇌사 여부를 진단할 때 육체와 영혼의 분리 시기를 정확히 결정하기는 어렵다. 때에 따라서는 아직 뇌사 진단을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순환장애를 일으켜 혈압이 내려가고 심장이 정지된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심장이 정지되기 직전에 장기를 적출할 수 있는가. 혹은 아직 뇌사 진단이 확정되지 않았으니 영혼이 아직도 그 환자에게서 떠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가. 의사가 아무리 노력해도 심장 박동이 느려지고 혈압이 내려갈 경우엔 장기를 떼어내도 좋은가 등등의 복잡한 문제들이 대두된다.


    헬기 타고 이식용 간 구하러 다녀

    1970년대 말부터는 뇌사자 한 사람에게서 여러 장기를 적출하는 게 가능해졌다. 1980년 초에는 한 뇌사자에게서 심장, 간, 췌장, 콩팥, 골격, 눈의 각막 등을 적출해 이식했다. 뇌사자의 시신에 남은 것이 거의 없을 지경이었다. 나는 소형 항공기를 대절해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오스트리아, 덴마크, 네덜란드 등지로 가서 뇌사자의 간을 떼어낸 뒤 다시 시간을 다퉈 독일로 돌아와 이식수술을 하곤 했다. 수술 후에는 이식받은 환자를 보살피는 데 주야로 전력을 다해야 했다. 그래서 장기를 뗀 시신의 영혼에 대해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결국 죽은 자의 영혼 문제는 생각지도 않는 비도덕적 의사가 되고 말았다.

    1980년 중반의 어느 날 나는 헬리콥터를 타고 우리 병원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뮌헨대학병원으로 간을 적출하러 간 적이 있다. 병원 헬기 착륙장에 내리니 장기를 적출하러 온 다른 팀 헬리콥터 두 대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이제는 장기뿐 아니라 골격까지 이식하는 시대가 돼 인체의 모든 부분을 여러 병원에서 나눠 가져갔다. 착륙장에 이 병원 H 교수가 직접 마중을 나와 있었다.

    “이 교수, 안녕하셨어요? 오랜만입니다. 심장 팀과 췌장 팀은 벌써 도착했습니다. 자동차로 오는 두 팀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니 가서 좀 기다리시지요.”

    대기실에서 오스트리아 알프스 산 속에 있는 인스브루크 대학에서 온 심장 팀이 눈에 띄었다. 뮌헨 남부에 있는 한 병원에서 골격과 눈의 각막을 필요로 하는데 아직 그 팀이 도착하지 않았다고 했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조금 있으니 골격 팀이 도착해서 곧바로 수술에 들어갔다. 심장 팀이 먼저 심장을 떼고 그다음 우리가 간장을 떼어 보존액이 들어 있는 봉지에 담고 그 뒤에 췌장과 신장, 각막과 골격을 각자 필요한 팀이 적출했다. 일이 거의 끝나갈 무렵 H 교수가 나를 불렀다.

    “이 교수, 손님께 어려운 부탁을 하나 해야겠어요. 시간이 있으시면 뇌사자의 흉곽과 복부를 좀 봉합해 주시겠어요. 우리 병원 당직의사는 중환자가 있어 바쁘고 다른 의사들은 초과근무수당 때문에 이미 집에 보내버렸습니다. 제가 하려고 했는데 얼마 전 손을 다친 것이 아직 안 좋군요. 오늘 봉합해놓지 않으면 내일 아침에 가족들이 시체를 찾으러 올 텐데 좀 곤란할 것 같아서요.”

    “그러세요. 제가 봉합해놓고 가지요. 아직 시간도 좀 있고 또 이렇게 간장을 적출하게 해주셨으니 뒤처리를 해야지요. 아무 걱정 마세요. 가족들이 마음 아프지 않도록 깨끗하게 해놓겠습니다.”



    인간의 존엄성

    독일에서는 어디서나 노동시간 문제가 복잡하다. 시간외근무를 하면 반드시 많은 액수의 초과수당을 지급하거나 그 시간에 해당하는 만큼 휴가를 줘야 한다. 1960년대만 해도 병원에 근무하는 의사들은 시간외근무니 초과근무수당 같은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특히 대학병원에서는 그런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환자가 있으면 당연히 의사가 옆에 있어야 하는 것으로 알았고 밤을 새워서라도 치료하고 연구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젠 독일에서도 슈바벤(Schwaben, 독일 남부지역)적 근면정신과 프러시아(Preussen, 전 프로이센 공국지역)적인 책임의식을 자랑하던 시대는 지나간 것 같았다.

    나는 골격 팀의 젊은 의사 두 사람이 최후로 남아 능숙한 솜씨로 뇌사자에게서 대퇴부 골격을 빼내는 것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들은 재빠른 손놀림으로 좌우의 대퇴골을 근육으로부터 벗겨내더니 소독된 보자기에 싸서 쏜살같이 사라졌다. 양쪽 윗부분 다리뼈를 빼앗긴 뇌사자의 두 다리는 근육이 수축돼 아주 짧아졌다. 늘씬하던 몸이 순식간에 볼품없이 돼버렸다. 이것이 사고 현장에서 발견된 시체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자신은 죽어가도 다른 사람을 구제하겠다는 숭고한 목적으로 신체의 많은 부위를 남에게 준 기증자의 모습치고는 존엄성을 상실한 외관이어서 슬퍼졌다. 그때 젊은 간호사가 나를 도와주려고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오늘 당직 간호사인가 보죠? 우리 때문에 저녁 늦게 쉬지도 못하고 미안합니다. 오늘밤이나 내일 가족들이 시체를 인수하러 온다는 데 저런 꼴을 보여서야 되겠습니까. 장기 기증을 한다고 고인의 몸을 형편없이 망가뜨려놓은 것을 보면 대경실색할 것 아니오. 그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우리 둘이서 잘 봉합해줍시다.”

    “교수님도 병원에 돌아가지 못하고 고생하시는군요.”

    뇌사자의 몸은 심장을 빼앗겨 흉곽이 텅 비어 있고 복부는 간장, 췌장, 신장이 없어지고 공기가 빠진 위와 장관(腸管)만 등에 유착돼 있어서 마치 의과대학 해부학교실에 학생지도용으로 비치된 시신을 연상케 했다.

    나는 흉곽과 복부를 흉하지 않도록 조심해서 닫고 피부를 한 바늘 한 바늘 꿰매면서 옆에서 거들고 있는 간호사에게 말했다.

    “만약 화상 환자에게 이 피부마저 이식할 수 있게 되면 우리가 이렇게 시신을 봉합할 필요도 없어질 거요. 앞으로 의학이 더 발달하면 틀림없이 화상이나 사고를 당한 환자에게 피부도 이식하게 될 겁니다. 어디 그뿐이겠어요. 지금 내 제자 중 한 사람은 근육과 팔다리의 관절을 이식하는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가 좋아요. 그러면 머지않아 근육과 관절도 가져가게 되겠지요. 머리카락까지 이식하는 세상이 됐으니 앞으로 장기 기증자에게는 남는 게 없을 거예요.”


    장례는 왜 치르는 걸까

    “교수님, 장은 남을 것 아닙니까?”

    “아니에요. 소장과 대장을 이식할 날도 멀지 않았어요. 그동안 동물실험을 계속해왔는데 지금 많은 경험을 쌓았어요.”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장례는 무엇으로 치르지요?”

    맞다. 기증자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장례를 치르란 말인가! 그런 상태로 과연 장례가 필요할까.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나는 간호사를 쳐다보았다. 이렇게 의학이 발전한다면 인간의 죽음에 대한 존엄성은 모두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닌가. 장기와 신체의 모든 부위를 나눠주고 겨우 남은 것들을 끌어모아 장례를 지낼 때 고인의 영혼이 온전한 대접을 받을 수 있을지 동양식 윤리관에서 생각해보았다.

    주위를 돌아보니 썰렁한 수술실의 차가운 불빛 아래서 나와 간호사만 남아 바삐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신체의 많은 부분을 남에게 줘버린 뇌사자의 몸을 봉합하면서 그 몸의 주인공이었던 영혼이 천당의 하나님 곁에 편안히 가 있기를 기도했다. 본 대학으로 돌아오는 헬리콥터 안에서 나는 다시 한 번 간호사의 말을 떠올렸다. ‘앞으로 신체 기증자에게 남는 게 없게 된다면 무엇으로 장례를 치르지요?’

    그런데 장례는 무엇을 위해 치르는 것일까. 시체를 위한 것일까. 영혼을 위한 것일까. 그 영혼을 담았던 몸이 여러 갈래로 찢겨도 영혼은 편안하게 잠들 수 있을까. 이렇게 훼손된 시체의 묘도 풍수지리설에 따라 명당자리에 써야 하는가.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은 내 머릿속에 유교적 윤리관이 유럽문화의 거센 파도에 밀려 퇴조했음에도 아직 모두 없어지진 않았다는 것을 뜻했다.

    세월이 흘러 2006년 9월 24일 일요일 정오에 덴마크 로스킬데에 있는 황후의 묘를 이장한다는 TV뉴스를 봤다. 그 황후는 러시아 10월혁명 때 살해된 제정러시아 최후의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어머니 마리아·호요도로우나였다. 이 덴마크왕실의 공주는 19세 때 러시아황제 알렉산더 3세와 결혼해 52년간 러시아에서 살았는데 러시아혁명 때 덴마크로 피신해 1928년 사망하고 그곳에 78년 동안 매장돼 있었다. 그러다 이날 그 유골이 러시아로 이송돼 9월 28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페트로파브로스크 성당에 묻혀 있는 남편 알렉산더 3세의 묘 곁으로 이장됐다.



    러시아 황후의 묘

    언론은 황후가 78년간 덴마크의 무덤 속에서 러시아 하늘을 바라보다 이제 남편 곁 안식처를 구하게 됐다고 보도했다. 이는 유골에 영혼이 같이 있는 것처럼 인식하고 있다는 말로 들렸다. 기독교문화권 역시 전통적 관습에는 죽은 후 육체와 영혼이 완전히 분리된다는 개념은 없는 것 같다.

    그뿐 아니다. 베트남전쟁, 6·25전쟁 중에 사망한 미군병사의 시체(유골)를 미국 정부가 찾아서 미국으로 가져간다. 이것은 비단 시신의 존엄성만 고려해 이루어진 것보다도 앞의 러시아 황후의 경우와 같이 ‘영혼이여, 이제 고국에서 안식을 취하소서’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유골이 영혼과 같이 이동한다고 보는 것이 옳을까?

    2006년 9월 14일 독일 출신인 교황 베네딕토 16세도 독일 레겐스부르크 근처의 부모 묘를 찾아 동생과 같이 묘 앞에서 기도를 했다. 묘 안의 시체에 부모의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며 기도했을까, 아니면 그 시체를 통해 하늘나라에 있는 영혼에게 기도했을까. 나는 답을 얻지 못했다.

    뇌사자의 장기를 이식하기 위해 오랫동안 장기 적출 수술을 해온 의사에게는 ‘뇌사자의 시신은 존엄스럽게 다뤄야 하나 영혼은 이미 육체를 떠나 하늘나라에 가 있다’고 보는 것이 가장 편안한 결론이다.

    이런 생활을 여러 해 해온 나는 장례식에 잘 가지 않는다. 한국식 장례식이든 유럽식 장례식이든 일반적으로 영구차에 실려 운반되는 시신에는 영혼이 같이 있다고 믿고 가족과 친지가 슬퍼하며 묘지까지 같이 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식용 장기를 적출하는 수술실에서 뇌사자의 시신, 또는 병리실에서 해부된 시신을 연상하면 장례식의 존엄성이 없어진다.



    직업상 장례식 기피 습관

    내가 고령이 돼가니 잘 알고 지내던 친구들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종종 듣는다. 서울을 방문했을 때 주변의 친지들은 유명을 달리한 친구의 집에 찾아가 그 친구의 영정에 인사라도 해야 하지 않느냐고 내게 권유한다. 그러나 나는 친구의 영정을 찾지 않는다. 환자 사망 직후 영혼은 이미 육체를 떠나 천국에 가 있다고 생각하며 시신에서 이식용 장기를 적출하는 나를 영정 속 친구의 영혼이 반기리라고는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고국을 방문해 고향에 가면 선산을 찾아가 술을 한잔 따라 올리며 돌아가신 부모, 조부모와 대화를 나눈다. 유럽에서 의사란 직업을 갖고 일생을 바친 내 머릿속에는 한국적인 나와 유럽적인 내가 공존하고 있어 주변 환경에 따라 1인2역을 하는 것이다. 참 모순적인 해외 동포 1세가 아닐 수 없다.



    이 종 수

    ● 1929년생
    ● 1964년 독일 뒤셀도르프대 의학박사
    ● 1969년 유럽대륙 최초 간 이식 성공
    ● 1975년 본대 의대 이식과 과장
    ● 1994년 간질환연구소장
    ● 저서 : ‘새로 쓰는 간 다스리는 법’ ‘간이 두 개인 남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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