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호

위기의 출판, 새로운 그림을 그리자

서적 도매상 2위 업체 송인 부도 그 후

  • 장은수 |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입력2017-01-26 09:5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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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여 거래 출판사 중 500여 곳엔 직격탄
    • 도서정가제 도입 때문이란 것은 오해
    • 통합전산망으로 거래 투명성 높여야
    오늘날 출판의 운명을 이야기하자니, 자크 데리다의 ‘고슴도치’가 먼저 떠오른다. 데리다는 이 동물을 통해 문학(시)의 운명을 환기한다. 그 고슴도치는, 지금 이 순간, 고속도로 한복판에 멈춰 있다. 어떤 우연한 이끌림에 따라,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광포한 속도로 차들은 달린다. 어느새 닥쳐올 사고를 예감하는 고슴도치는 고개를 가슴께 처박고 잔뜩 웅크린 채 온몸의 털을 세워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 목숨을 보전하려는 이 행위 탓에 고슴도치는 스스로 장님 상태가 된다. 사고가 닥칠 것이라는 예감으로 고슴도치는 가장 낮은 장소에서, 가장 낮은 목소리로 절박하게 호소한다. “기억해주세요(apprendre par coeur)!”

    프랑스어로 기억한다는 것은 ‘심장(coeur)을 통해 배우는 것(appr endre)’이다. 심장의 언어로 존재를 다시 쓰는 것이다. 잊지 말아달라고, 잊지 말아달라고, 제 심장을 들여다보면서, 솟구친 가시의 목소리로, 출판은 세상을 향해 뜨거운 호소를 발신 중이다. 오늘날 출판이 맞닥뜨린 사태는 그만큼 심각하고, 도무지 앞날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위기다.

    2017년, 한국 출판은 희망에 부푸는 마음이 아니라 절망의 눈물로 얼룩지는 한 해를 출발했다. 업무 시작일인 1월 2일, 한국에서 두 번째로 큰 서적 도매상인 송인서적이 만기 어음을 막지 못하고 부도를 냈다. 송인서적이 밝힌 채권 및 채무 규모는 부도어음 100억 원, 은행대출 50억 원, 보유재고서적 40억 원, 서점매출채권 210억 원, 출판사채권 270억 원이다. 부실 규모가 조 단위에 이르는 다른 산업과 비교하면 미미해 보일 수 있어도, 영세 규모 출판사와 서점 수천 군데가 이 부실을 고스란히 나누어 부담할 것을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진다. 송인서적과 거래하는 출판사는 2000여 곳. 그중 송인서적을 통해서만 지역 서점과 거래하는 이른바 ‘일원화 출판사’만 따져도 무려 500여 군데나 된다.



    중소출판사 연쇄 도산 우려

     사정이 나은 몇 곳을 제외하면, 이 출판사들 전체가 송인에서 떼인 돈으로 인해 경영이 위축될 것이고, 자금 압박을 견디다 못한 출판사의 연쇄부도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면 인쇄소와 제본소, 디자인사무소와 지업사(종이 공급 업체)가 차례로 법적 책임을 떠안으면서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질 수 있다. 송인서적을 통해서 책을 공급받던 지역 소매서점 쪽에서도 비슷한 사태가 초래될 수도 있다.



    출판계가 정부에 공적 개입을 긴급하게 요청하고, 문화체육관광부는 그 고리를 끊고자 출판계 긴급 지원에 나선 것은 일단 다행이다. YTN에 따르면 출판문화진흥재단을 통해서는 1%대 금리, 중소기업청을 통해서는 2%대 금리의 융자가 가능하다. 문제가 발생한 출판사는 최다 2000만 원 정도 지원받을 수 있고 다시 중소기업청을 통해 2%대 금리로 최다 10억 원까지 융자를 받을 수 있다.

    상당수 피해 출판사는 송인서적의 어음과 재고를 정부가 일단 매입한 후 나중에 구상권을 행사하는 방식의 완전한 피해복구를 원한다. 하지만 정부자금의 일반적 성격과 송인서적의 자산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것을 고려하면, 탄핵정국이 계속돼 사실상 국정의 컨트롤타워가 실종된 현재 이런 지원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보인다. 송인서적의 질서 있는 청산을 통한 피해의 최소화, 책과 독자를 연결할 수 있는 임시 물류 시스템 가동, 이 사태로 예견되는 구조조정의 압력이 노동자들에게만 일방적으로 전가되지 않도록 할 관리감독의 강화, 그리고 ‘출판유통 현대화’라는 근본대책 마련이 아마도 현실적 방안일 것이다.

    송인서적 사태와 관련해서 주목할 일 중 하나는 ‘송인서적’이라는 키워드가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 순위에 노출된 일이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기업이 폐업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 사실이 하나의 희망으로 느껴진다. 약간은 아전인수일 수 있지만, 시민들이 위기에 빠진 책의 운명에 깊은 관심을 표하면서 출판에 닥친 컴컴한 어둠 속에서 촛불을 들었다고까지 생각하고 싶다.


    위기의 원인은 도서정가제?

    사실, 누구나 이미 알고 있다. 오늘날 출판산업이 어려움에 빠진 것은 스마트폰으로 상징되는 모바일 환경에서 책이라는 미디어가 상대적으로 불리한 운명에 처했기 때문이다. 방송통신위원회에 따르면, ‘일상생활 필수 매체에 대한 이용자 인식’ 조사에서 책의 중요도는 2011년 2.2%에서 2014년 0.6%로 크게 감소했으며, 10대와 20대의 경우에는 69%가 스마트폰을 필수 매체로 인식했다. 한 사람의 시간은 절대적으로 제한돼 있는데, 스마트폰을 통한 콘텐츠 소비 기회는 거의 무한대로 늘어났다. 따라서 스마트폰으로 이용하기 어려운 콘텐츠인 책에 대한 관심이 떨어져서, 중국 같은 일부 신흥국가를 제외하면 전 세계적으로 종이책 소비가 정체 또는 위축되고 있다.

    게다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한국의 저출산 고령화 추세는 출판 산업의 기반을 오래전부터 갉아먹고 있다. 그에 따라서 해마다 국민 독서율이 떨어지고 월평균 문화생활비에서 서적 구입비가 차지하는 비중도 갈수록 하락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동네서점이 문을 닫고, 거기에 책을 공급하던 도매상이 부도를 내고, 뒤이어 송인서적과 거래하던 출판사가 어려움에 처하는 위기 상황의 도래는 사실상 시간문제였을 뿐이다.

    어떤 사람은 도서정가제를 이번 유통 위기의 한 원인으로 제기한다. 도서정가제로 인해 소비자 가격이 올라가는 바람에 도서 총수요가 줄어들었고, 이 때문에 개별 서점들이 어려워져 송인서적이 부도를 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오해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도서정가제가 출판산업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분명하다. 2016년 말, KB국민카드가 도서정가제 실시 2년을 전후로 해서 가맹 서점의 결제금액을 분석한 자료를 보자. 도서정가제 실시 이후 서점 전체에서 카드 결제 이용건수는 4.1%, 이용금액은 1.2% 각각 증가했다. 이를 서점의 규모나 형태에 따라 나눠 살펴보자. 온라인 서점의 경우는 이용건수(10.9%) 및 이용금액(9.6%)이 모두 큰 폭으로 증가했다. 오프라인 대형서점의 경우는 이용건수(-0.9%) 및 이용금액(-3.6%) 모두 감소했다. 또 오프라인 중소서점은 이용건수(3.8%)는 늘었으나, 이용금액(-0.6%)은 감소했다.

    물론 세부적으로 따져야 할 것은 많지만, 도서정가제와 관계없이 온라인서점들이 편익을 가장 많이 취하고 있으며, 오프라인서점들은 전반적으로 위축돼 있다. 단, 도매서점인 송인서적과 주로 거래하는 오프라인 중소서점의 이용금액은 시장 축소로 보기에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프라인 중소서점의 서적 판매량은 증가한 것으로 봐야 한다. 송인서적의 부도와 도서정가제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할 수 있다.



    폭탄 돌리기 식 전근대적 경영

    사실, 송인서적이 초래한 위기의 진짜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 전근대적 출판 유통 환경이다. 이것이 서적의 공급 과잉을 유발하고, 시장 포화로 인한 마케팅 비용 증가의 악순환을 일으킨다. 하지만 위기의 일상화는 사람을 둔감하게 만든다. 책이 다시 살아날 기회가 찾아올 때까지 바싹 몸을 웅크린 채 아슬아슬한 곡예를 나날이, 다달이, 그리고 해마다 치르다 보면 어떠한 재난도 당연해 보인다.

    물론 송인서적 부도에는 부실의 흔적이 확연한 데도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한 경영적 무능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는 말한다. 이 사태가 벌써 오래전부터 배태해 있었다고. 외환위기 직후, 정부가 긴급 자금 500억 원을 마련해 출판산업을 지원했을 때, 유통에서 어음 거래와 같은 전근대적 관행을 청산하지 않고, 뒤이어 찾아온 반짝 호황에 안주해 주저앉은 탓이라고. 그중에서도 송인서적은 전근대적 운영이 확연한 곳이었다.

    현재까지의 경과를 살펴보면, 송인서적의 경영진은 위기를 깔고 앉아 출판사와 소매서점 사이에서 폭탄을 돌리면서 버텨온 것으로 보인다. 독자들은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겠지만, 일상 구석구석까지 정보망이 완벽하게 깔려 있는 한국 사회에서 송인서적의 경영진은 자사와 거래하는 소매서점의 서적 판매량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보니 서적 판매대금의 지불 과정이 주먹구구식을 전혀 벗어나지 못했다.

    서적이 모두 예측대로 판매되면 그나마 문제는 적겠지만, 어느 한 곳에서 삐걱대도 크고 작은 위기가 올 수 있다. 대형출판사 역시 피해를 본 곳이 많지만, 현금 결제를 요구한 곳이 많다는 걸 보면, 이러한 위기를 어느 정도 예측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일단 현금이 빠져나가면서 사정이 나빠진 송인서적은 상대적으로 거래 능력이 취약한 중소출판사를 대상으로 짧게는 4개월에서 길게는 7개월에 이르는 자가 어음을 발행하거나, 지불금액을 축소하는 식으로 대응했다. 이번에 피해금액이 큰 출판사가 주로 중소형 출판사인 것도 이 때문이다.



    통합전산망 도입 서둘러야

    하지만 한 다리만 건너면 서로 형님아우하는 출판계 분위기는 문제의 조기 분출을 가로막아서 결국 부도가 날 때까지 곪아터지도록 만들었다. 송인서적 경영진은 일부 중소출판사들이 어려울 때 자금을 봐주는 식으로 인심을 잃지 않아 왔는데 이런 ‘의리’가 문제를 덮어 온 것이다. 모 출판인은 말하기를 “어렵다고 하소연하면 1000만 원 얹어주는 식”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일부에서 고의 부도설을 제기하는 등 사태의 진전을 더 살펴봐야 하겠지만, 현실적으로 볼 때 그다지 사악하지는 않은 경영진이 버티다 버티고 견디지 못하고 손든 형국인 듯하다.

    송인서적을 쓰러뜨리고 출판에 위기를 가져온 것은 시장 참여자 전체가 아무도 거래 내역을 확인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전근대적 서적 유통 시스템이다. 일부에서는 출판사에서 서적을 임의로 출고하고, 판매되지 않으면 서점이 반품하는 위탁거래를 근본 원인으로 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위탁거래는 출판의 문화적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출판계에서 합의해 만든 제도다. 출판사에서 서적이 출고되면 서점이 판매를 온전히 책임지는 식으로 위탁거래를 손보는 방법은 해외 사례를 볼 때 홍보력이 떨어지는 출판사의 대량 폐업을 불러올 가능성이 크다.

    송인서적 부도의 직접 원인인 어음교환을 줄이려면 거래의 투명성이 완벽하게 확보돼야 한다. 하지만 개별 서점에서 출판사까지 이어지는 통합전산망 없이 거래 당사자 간 신뢰를 구축하기는 어렵다. 아마도 당장 출판계의 연쇄부도를 막기 위해 정부 등에서 긴급자금을 갖다 쓰더라도 이러한 환경이 존치하는 한 또다시 위기가 반복될 것이다. 이 기회에 서점 전체에 통합전산망을 도입하고, 이 전산망을 관리하는 공적인 기구를 둠으로써 출판 혁신의 기회로 삼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와 출판계는 이 부분에 관심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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