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호

史論으로 본 조선왕조실록

과정 급할수록 돌아가라 |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연잉군 왕세제 책봉 | 도성을 버린 선조 도망친 곳에

  • 이규옥 |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최두헌 | 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

    입력2017-02-10 09: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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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국정 기록을 전담한 사관은 임금과 신하의 대화를 기록하고 국정과 관련된 주요 문건을 인용, 발취해 사초를 작성했다. 사건의 시말(始末), 시시비비, 인물에 대한 평가 등 사관들의 다양한 의견(史論)이 함께 실렸다. 당대에 첨예한 논란을 빚으며 사관들의 붓끝을 뜨겁게 한 사건을 2편씩 소개한다. 이 글은 최근 한국고전번역원이 발간한 ‘사필(史筆)’에서 가져왔다.

    한국고전번역원 刊 ‘사필(史筆)’





    연잉군 왕세제 책봉 과정 - 급할수록 돌아가라


    이규옥 |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조선에서 당쟁이 가장 격렬했던 때는 아마도 숙종에서 경종을 거쳐 영조에 이르는 시기일 것이다. 숙종 때부터 집권 세력이 일시에 바뀌는 이른바 ‘환국(換局)’을 여러 차례 겪으면서 당파 간의 대립이 극에 달했다. 이는 왕비 소생의 아들이 없는 숙종의 왕위 계승 문제와도 직결돼 있었다. 숙종의 뒤를 이은 경종이 후사를 얻지 못하자 노론 측에서는 숙빈 최씨 소생인 연잉군 영조를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 일을 빌미로 소론은 신임사화(辛壬士禍)를 통해 노론에 막대한 정치적 타격을 입혔다. ‘정조실록’에는 연잉군이 왕세제로 결정되던 순간의 이야기가 기록돼 있다. 영조의 손자 정조가 직접 비문을 짓고 글씨도 쓴 검암기적비(黔巖紀蹟碑) 내용이 그것이다.

    “영조께서 왕자로 있던 신축년(1721, 경종1) 8월 15일은 숙종의 탄신일이어서 명릉(明陵)에 참배하고 고령리(高嶺里)의 농가에 가서 머물렀다. 5일을 보내고 대궐에 문안하기 위해 말 한 필, 동자 두 명과 함께 돌아오는 길에 덕수천(德水川)에 이르렀는데, 마침 밤이 깊어 검암(黔巖)의 파발참에서 잠시 쉬었다. 조금 뒤에 어떤 사람이 소를 몰고 앞 시내를 지나갔는데, 누군가가 뒤를 좇아가더니 앞서 간 사람을 붙잡아 와서는 ‘도둑’이라고 하였다. 영조가 이를 보고 불쌍하게 여겨 참장(站將) 이성신에게 ‘저 사람은 흉년에 굶주림에 시달리다 이런 짓을 한 것이다. 그러나 농부가 소를 잃어버리면 어떻게 농사를 지을 수 있겠는가. 참장도 관직이니, 그대가 알아서 잘 판결해주도록 하라’고 했다. 이성신이 물러가서 소는 주인에게 돌려주고 도둑은 관아에 고발하지 않았다. 새벽녘이 돼 말을 타고 도성에 돌아왔는데, 창의궁(彰義宮) 문 밖에 동궁이 타는 수레가 준비돼 있었다. 이미 왕세제로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연잉군은 숙종의 탄신일에 지금의 경기 고양시 서오릉(西五陵) 경내에 있는 명릉에 참배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돌아오지 않고 어머니 숙빈최 씨의 묘소가 있는 양주(楊州) 고령리로 가서 머물렀다. 5일이 지난 후 늦은 밤 도성으로 돌아오는 길에 소도둑을 잡는 현장을 목격하고 소도둑의 딱한 처지를 살펴 관대하게 처리하도록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백성을 사랑하는 연잉군의 마음을 드러낸 일화로, 그가 성군(聖君)이 될 바탕을 이미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정조는 이런 영조의 애민정신을 드러내기 위해 이 일이 있은 지 60년이 되는 해를 기념해 이 비를 세운다고 밝혔다. 이 비는 지금 서울시 은평구 진관동의 창릉천 가에 있다.



    그런데 이 글을 자세히 살펴보면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 명릉이나 양주 고령리는 도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인데, 연잉군은 5일 동안이나 농가에 머무르다 한밤중에 돌아왔다. 게다가 돌아와 보니 이미 왕세제로 결정되어 있었다. 연잉군이 도성을 떠난 5일 동안 대궐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경종은 집권당인 노론 세력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더구나 경종에게 후사가 없자 노론 측에서는 자신들이 지지하는 연잉군을 왕위 계승자로 정해 두려고 서둘렀다. 이 문제를 가장 먼저 제기한 이는 사간원 정언 이정소였다. 그는 연잉군이 고령의 농가에 머물고 있던 경종 1년 8월 20일에 상소를 올려 빨리 후사를 세우자고 청했다. 이정소가 상소를 올린 그날 밤 노론인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등은 경종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늦은 밤에 대신들이 면담을 요청하는 것은 국가에 위급한 일이 생겼을 경우에나 있던 일이다. 그런데 경종은 대신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노론 측 신하들을 만났다.



    영의정 김창집 : 성상께서 한창 나이인데도 아직 보위를 이을 자식이 없으셔서, 신은 대신으로서 밤낮없이 걱정해왔습니다. 그러나 너무 중대한 일이기에 감히 청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대간이 아뢴 말이 지당하니 누가 감히 다른 의견을 내겠습니까?

    판중추부사 조태채 : 송나라 인종(仁宗)은 그리 늦은 나이가 아니었는데도 두 황자(皇子)를 잃은 뒤에 신하들이 힘써 청하여 후계자를 정했습니다. 지금 대간이 이미 아뢰었으니 오래 끌어서는 안 됩니다. 빨리 처분을 내려주소서.

    좌의정 이건명 : 이 일은 일각이라도 늦추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 신들이 깊은 밤중에 면대를 청한 것이니, 전하께서는 잘 생각하시어 속히 후계자를 정하소서.

    경종 : 그리 하겠다.

    신하들 : “이는 종묘사직의 한없는 복입니다. 〈경종실록 1년 8월 20일〉




    노론 측에서는 이정소의 상소가 나오자마자 즉시 이 일을 매듭지으려고 소론 측 신하들을 배제한 채 곧바로 일을 진행했다. 그런데 경종은 노론 대신들의 거센 요청에 압도됐는지 즉석에서 승낙했다. 그러나 이 일은 자칫하면 이를 주장한 신하들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도 있는 위험한 사안이었다. 그래서 노론 측 신하들은 이 정도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대비인 인원왕후의 허락을 받아달라고 했다. 경종은 노론 대신들의 요구에 따라 대내에 들어갔다가 새벽녘에 신하들을 낙선당으로 불렀다.

    마치 한밤중의 기습작전을 보는 듯하다. 질환이 있기는 해도 아직 서른세 살밖에 되지 않은 경종이 충분한 논의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몇 시간 만에 왕위 계승자를 정해버린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건 그렇다 치고 당사자인 연잉군은 왜 5일 동안 도성을 떠나 어머니 산소가 있는 시골에 가 있었을까. 연잉군이 도성 안에 있으면 훗날 이 일에 관련됐다는 혐의를 받을 것을 염려해 미리 몸을 피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더구나 연잉군이 6일째 되는 날 동틀 무렵 도성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그가 노론 측 신하들과 긴밀하게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사전에 만반의 계획을 세워놓고 거사를 추진했던 것이다.

    이 일에 대해 사관은 경종이 후사를 두기 어려워 나라의 형세가 위태롭게 됐다고 진단하면서,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한 것 자체를 문제 삼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일을 추진하는 과정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그날 대신들은 조정에 모여 의논을 꺼내려 하지 않고 교외에 있는 동료 대신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조정에 있던 4, 5인의 동료들과 밤중에 임금에게 면담을 요청하여 광명정대한 일을 제대로 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엉성하게 처리하였다. 심지어 주상의 뜻은 물어보지도 않고 반드시 대비께서 직접 쓰신 글을 본 뒤에야 봉행하겠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주상께 아뢰는 올바른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경종실록 1년 8월 20일〉




    노론 측 신하들이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논의를 진행하지 않은 점, 교외에 있던 우의정 조태구를 부르지 않은 점 등을 정상적인 절차를 무시한 엉터리 일 처리라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노론은 절차를 무시하고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을 무리하게 추진했고, 훗날 이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 했다. 신축년(1721, 경종1)과 임인년(1722)에 김창집 등 노론 4대신을 비롯한 노론 인사들이 신임사화를 겪는다. 아무리 상황이 급박하고 명분이 정당하더라도 정상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일을 추진하면 훗날 반드시 탈이 나는 것이 역사의 법칙이다.



    도성을 버린 선조 -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최두헌|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라는 말이 있지만, 역사는 두 번을 넘어 몇 번이고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인간의 본성은 쉽게 변하지 않고, 지난 역사를 통해서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비극은 전쟁이다. 우리 조상들은 오랜 기간 수없이 많은 전쟁을 겪었다. 조선 시대에도 몇 번의 큰 전쟁이 있었고, 그때마다 백성은 임금과 조정 신료들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치는 모습을 목격했다.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총병력 20여만 명의 일본군이 부산을 통해 쳐들어오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됐다. 전쟁 발발 15일째인 4월 28일, 도순변사 신립이 충주의 탄금대에서 일본군에게 대패했다. 보고를 받은 선조는 4월 30일 새벽 도성인 한양을 버리고 떠나 5월 1일 개성으로 몽진(蒙塵)했다. 그리고 5월 2일 한양이 함락되자 이튿날 바로 개성을 떠나 평양으로 향했다. 임진강 전투에서 도원수 김명원을 격파한 일본군 선봉대가 6월 8일 대동강 변에 진을 치자, 6월 11일 평양을 떠나 22일 의주에 도착했다. 더 이상은 갈 곳이 없었다. 압록강을 건너면 바로 요동, 즉 명나라 땅이다.

    그러나 선조는 천자의 나라에서 죽을지언정 왜적의 손에 죽을 수는 없다며 요동으로 망명하기를 바랐다. 처음에는 극력 반대하던 신료들도 선조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결국 왕세자 광해군이 이끄는 또 하나의 조정, 즉 분조(分朝)가 조선에 남아 전쟁을 지휘하고, 선조는 요동으로 망명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됐다. 그런데 전황이 호전되기 시작하면서 요동 망명은 일단 중지하고, 선조는 계속 의주에 머물렀다. 해를 넘긴 선조 26년(1593) 1월 8일, 명나라 군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평양성을 탈환했다. 그리고 며칠 뒤, 선조와 좌의정 윤두수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선조 : “이제 와서 말인데, 경성을 무슨 수로 지킬 수 있었겠는가? 성곽밖에 없었으니 갑작스레 변란을 당해 무슨 수로 외적을 상대할 수 있었겠는가? 듣자 하니 북경은 평상시에도 무기를 설치해둔다고 한다.”

    윤두수 : “경성은 사실상 지킬 수 없었습니다.”〈선조실록 26년 1월 14일〉






    선조는 전쟁이 발발한 지 보름여 만에, 충주에서 날아온 대패 소식에 다급히 한양을 버리고 몽진했다. 임진강을 건너면서는 일본군의 추격을 늦추려는 목적으로 배와 나루터, 주변의 민가를 파괴했다. 이로 인해 피난을 가던 백성, 조정의 신료 가운데 임진강을 건너지 못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한양을 버리고 도망친 선조의 권위는 완전히 바닥에 떨어졌다. 선조는 뒤늦게나마 이에 대해 항변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경성은 평소에 전쟁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적이 턱밑까지 치고 올라오는 위기 상황에서는 도망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 대화를 기록한 사관의 의견은 좀 달랐다.



    도성은 종묘와 국가의 창고가 있는 곳이고 백관과 많은 백성이 모인 곳이다. 이곳보다 성곽의 방어가 견고하고 병력이 많은 곳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니 한 걸음이라도 이곳을 떠나면, 이로 인해 선조들이 물려준 영토를 잃게 된다. 성안의 사람을 모아 도성을 수비하게 하고, 팔도의 군사를 징발하여 도성 주변 지역에 진을 치게 한 후, 적이 도성으로 쳐들어오면 도성 주변에 있던 군사들이 적의 뒤를 치고, 적이 병력을 나누어 도성 주변 지역을 공략하면 도성의 군사가 적의 후미를 공격하게 하는 식으로 서로 긴밀하게 호응하면서 쉬고 있던 군사를 번갈아 출동시켰다면, 홀로 깊숙이 쳐들어온 저 적들은 양식이 떨어지고 군사들이 지쳐 저절로 쓰러져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대책을 생각하지 않고 충주에서 한 번 실패하자 도성을 버렸고, 한강에서 재차 무너지자 개성을 버렸으며, 임진강에서 세 번째로 패배하자 평양을 버렸다. 다행히 하늘이 재앙을 내린 것을 후회하고 귀신이 정성껏 도와 마침내 흉악한 적이 평양성을 넘어 진격할 수 없게 하였으니, 이것은 하늘이 돌본 것이다. 만약 의주성이 공격을 받아 임금의 행차가 압록강을 건넜다면 우리의 산하는 적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이씨의 사직도 의탁할 곳이 없게 되었을 것이다. 초야로 도망쳐 다니다가 결국 멸망당하는 것이 어찌 선왕이 물려준 나라를 지키며 ‘임금은 사직을 위해 죽는다’는 의리를 따르는 것만 하겠는가?

    그런데 믿을 수 없는 하늘에 요행을 바라면서 목숨을 바쳐서라도 떠나지 말고 지키라는 경고를 준수하지 못했으니, 오늘날 임금이 피난을 다닌 것은 정말 위태로운 행동이었다. 이산해가 먼저 잘못된 주장을 했고, 윤두수도 이에 대해 대의(大義)를 내세워 반론하지 못했다. 단지 임금의 뜻에 따를 줄만 알아, ‘겉으로는 큰소리 쳤지만 사실은 지킬 수 없었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이 후세에 전해지면 천하의 사람들이 틀림없이 오늘날의 임금과 신하들은 모두 적이 쳐들어오면 도망치는 것을 상책으로 삼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니 크게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 〈선조실록 26년 1월 14일〉






    임금이 도성을 버리고 몽진했다는 것만으로 비판할 수는 없다. 전쟁 초반에 임금이 적에게 사로잡히거나 죽게 되면, 전세를 뒤집기 어려울 정도의 치명타가 될 수 있고, 도성을 떠나지 않고 지킨다고 해서 사관의 주장대로 전황이 전개되리라는 보장도 없다. 전쟁 중에는 워낙 다양한 변수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몽진을 결정한 이후의 과정이 형편없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선조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전략적인 후퇴를 한 것이 아니었다. 나라의 존망보다 자신의 안위를 우선시해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심지어 조국을 버리고 다른 나라로 망명하겠다는 계획까지 세웠다. 사관은 임금이 남의 나라로 도망쳐 목숨을 보전한다 해도, 국토가 모두 적의 손에 넘어간다면 그것이 바로 나라의 멸망이라고 생각했다. 아무 대책 없이 도망치다가 상황이 좀 나아지자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노라고 자기 합리화를 하는 선조와 신료들을 보며 울분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후로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선조의 실책은 계속 이어졌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과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의 활약, 명나라 군의 지원이 없었다면 조선의 운명은 어찌 됐을지 모른다.

    이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인조 2년(1624), 이괄이 난을 일으켜 임진강을 건너자 인조는 도성을 떠나 수원, 천안을 거쳐 공주로 몽진했다. 인조 5년(1627)에는 파죽지세로 남하하는 후금(後金)의 군대를 피해 강화도로 몽진했다. 인조 14년(1636), 청나라군이 또다시 침공해 오자 이번에는 남한산성으로 몽진했다. 불과 50년도 되지 않는 기간에 임금이 네 차례나 도성을 포기한 것이다. 덕분에 임금은 옥체를 보전했지만 나라가 입은 피해는 막심했다. 큰 재난을 겪고서도 여전히 준비는 소홀했고 사후 대처는 형편없었다. 소를 잃고도 외양간을 손보지 않은 것이다. 그로부터 300여 년이 지난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졌고, 또다시 최고 지도자가 수도를 버리고 퇴각했다. 역사는 몇 번이고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그다음 또한 비극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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