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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의 神으로부터 열렬한 도덕을 건져 올린 시인

청마 유치환 50주기

  • 김종길 | 고려대 명예교수·시인

허무의 神으로부터 열렬한 도덕을 건져 올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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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의 神으로부터 열렬한 도덕을 건져 올린 시인

청마 유치환(1908~1967)은 미당 서정주와 함께 ‘생명파’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으로 시작하는 ‘깃발’과 ‘사랑하는 것은/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로 시작하는 ‘행복’,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로 시작하는 ‘바위’ 등의 시를 남겼다.

청마 선생께서 우리 곁을 떠나신지 벌써 반세기가 지났단 말인가! 세월의 덧없음을 다시금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다. 1967년 2월 13일 밤 부산의 어느 밤거리에서 버스에 치여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한동안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망연자실의 상태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그러다 어느 신문사의 청탁으로 쓴 조시(弔詩)가 ‘청마선생 추도(靑馬先生 追悼)’이다.



슬픔과 적막(寂寞)은

끝내 용렬한 우리의 것,

살아서 생각하신 바로 그대로

당신은 예보(豫報)도 없는 바람처럼 가셨습니다.

한없는 다정(多情)과 겸손(謙遜)어린 안경 너머로

당신은 엄청나게 큰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지없이 소탈한 사투리 속에

당신은 엄청나게 큰 성량(聲量)을 간직하셨습니다.

인간을 끔찍이도 사랑하셨기에

당신은 즐겨 비정(非情)을 노래하셨고,

삶의 허무(虛無)를 사무치게 깨달으셨기에

당신은 삶이 허무할 수 없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슬픔과 적막(寂寞)은

끝내 용렬한 우리의 것,

1967년 2월 13일 밤 아홉시 반,

당신은 동양(東洋)의 고전(古典)의 한 이름이 되셨습니다.

내가 청마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1946년 6월 6일 저녁 서울 종로의 YMCA 강당에서 열린 ‘청년문학가협회’ 주최 시낭독회에서였지만 정식으로 인사를 나눈 만남은 아니었다. 다시 그분을 만나게 된 것은 6·25전쟁 중의 피란지 대구에서였다. 그분의 고향은 경남 통영이고, 당시 직장도 경남에 있었지만, 대구에 피난 온 문인이 많아서였는지, 대구에 자주 나타나곤 했다.

그분이 대구에서 문인들과 어울리는 곳은 대구역에서 멀지 않은 향촌동 일대의 다방이나 술집들이었다. 그분과 나 사이의 연령차는 18년으로, 그분은 나에게는 거의 아버지뻘이었지만 우리 사이는 거의 숙질 간이나 사촌 간처럼 친숙했다. 그분이나 나나 무심하고 말수가 적고 술을 좋아해 우리 사이는 특히 가까운 편이었다. 그러던 중 그분과 나는 한때 경북대 문리과대학에서 함께 교편을 잡은 적도 있다.

그때 그분은 국문과 전임강사였고 나는 영문과의 전임강사였다. 당시엔 대학의 강의시간이 90분이었는데, 한번은 내가 청강 인원이 많은 ‘문학개론’ 강의를 마치고 교수휴게실로 돌아오니까, 거기서 혼자 계시던 청마 선생이 “뭐가 그리 할 말이 많노. 나는 50분을 채우기도 힘이 드는데” 하는 것이 아닌가. “할 말이 많은 게 아니고, 이것 저것 지껄이다 보면 그렇게 되는 거지요” 라고 받아넘기곤 했다. 그러던 중 청마 선생은 경주고 교장으로 초빙돼 갔다.

우리가 들은 바로는 그분은 경주로 옮긴 다음에도 그곳의 기관장들과 어울리는 자리엔 얼굴도 비치지 않으시고 혼자 교외의 유적이나 둘러보는 것으로 소일거리를 삼았던 모양이다. 그분은 소탈하고 대범해 보였지만 정사(正邪)의 구별에는 엄격하고 단호했다. 그리하여 당시 자유당 정권의 부정과 부패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나 묵과도 허용치 않았다.

그런 강직한 성품은 그의 가족관계에서도 드러나곤 했던 모양이다. 그 무렵 그가 서울걸음을 할 때는 유명하고 유복하던 형님 유치진 선생 댁에는 들르지 않아도, 언덕배기 빈민촌에 사는 누이 집에는 반드시 들렀다가 온다는 말이 돌았다. 그는 허무의 신을 믿는 허무주의자이면서 정이 많고 정의감에 불타는 휴머니스트였다.

이와 같이, 그는 다정한 사람이었지만 사상적으로는 확신에 찬 허무주의자여서 허무를 신격화해 ‘허무의 신’이라는 말을 만들어내고 ‘바람’으로써 그것을 형상화했다. 나는 계간지 ‘창작과 비평’ 1974년 여름호에 기고한 ‘청마 유치환론’을 다음과 같이 끝맺은 바 있다.

‘게다가 그의 허무의 인식은 그의 특색인 사유의 규모를 넓히는 구실을 또한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청마의 생래의 순정과 다정은 그 자신의 허무주의적 회의를 거침으로써 그로 하여금 거대한 시력(視力)을 얻게 했고, 또한 자유에 대한 강렬함, 즉 삶에 대한 열애(熱愛)를 지속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그는 한국 현대시에서 가장 거대하고 꾸준하고 열렬한 도덕적인 시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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