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호

영화로 읽는 세상

노무현의 자살은 버림받은 검사의 눈에 어떻게 비칠까

더 킹

  • 노광우 | 영화 칼럼니스트 nkw88@hotmail.com

    입력2017-02-28 13:3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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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7년 겨울 시즌 개봉돼 좋은 반응을 얻은 한국영화는 ‘더 킹’(한재림 연출), ‘판도라’ (박정우 연출), ‘마스터’(조의석 연출), ‘공조’(김성훈 연출) 정도다. 이들 작품은 각기 다른 장르에 속한다. ‘더 킹’은 시대극인 동시에 드라마, ‘판도라’는 재난영화, ‘마스터’는 범죄액션영화, 그리고 ‘공조’는 남북한의 형사들이 공조 수사를 펼치는 버디액션영화다. 이렇게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영화들이 다양한 장르에서 작품성과 오락성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둔 것은 오랜만이다.

    이 영화들 중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작품은 ‘더 킹’이다. 이 영화는 2000년대 한국영화에서 융성했던 어떤 경향성을 이어받고 있다. 영화를 통해 현대사의 특정한 지점을 되돌아보는 경향성 말이다. 대표적 작품으로는 ‘박하사탕’(이창동, 2000), ‘친구’(곽경택, 2001), ‘번지 점프를 하다’(김대승, 2001), ‘클래식’(곽재용, 2003) ‘살인의 추억’(봉준호, 2003), ‘말죽거리 잔혹사’(유하, 2004), ‘효자동 이발사’(임찬상, 2004), ‘그때 그 사람들’(임상수, 2005), ‘그해 여름’(조근식, 2006), ‘오래된 정원’(임상수, 2006)이 있다.

    이 영화들은 주로 1970~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데, 근대화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담고 있거나  군사독재 시절의 정치적·사회적 탄압을 다룬다. 이 흐름은 6·25전쟁과 남북 대치를 묘사한 작품인 ‘실미도’(2003), ‘태극기 휘날리며’(2003), ‘웰컴 투 동막골’(2005)과 더불어 2000년대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다.



    ‘이념’이 사라진 정치 활극

    그러나 현대사를 다룬 2000년대 후반의 한국영화들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이는 부분적으로 주 관객층의 세대가 바뀐 탓도 있을 것이다. 2010년대 들어 과거 회귀 작품들이 부활한다. 이들은 새로운 세대의 관객에게 ‘새로운 과거’를 제시했다. 영화로는 ‘건축학개론’(이용주, 2012)이, TV 드라마로는 ‘응답하라’ 시리즈(2012, 2013, 2015)였다.



    과거 현대사 영화와 달리 이 작품들에서는 ‘정치’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특정 시대에 새로 등장한 대중문화가 주로 언급된다. 예를 들어, ‘응답하라 1997’에서 주인공은 HOT의 열혈 팬이고, ‘응답하라 1994’에서는 주요 인물이 서태지의 팬으로 설정된다. 이는 1990년대 공산권이 몰락하면서 한국 사회에서 탈이념화 현상이 부각된 점과 맞물린다.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1988년을 무대로 한 ‘응답하라 1988’에서는 일부 등장인물이 운동권 학생으로 그려진다.

    2010년대에는 이렇게 정치·이념 문제엔 거리를 두는 대신 정치를 스릴러나 범죄와 결합시키는 새로운 유형의 영화들이 나타난다. ‘특수본’(황병국, 2011), ‘더 테러 라이브’(김병우, 2013), ‘신세계’(박훈정, 2013), ‘베테랑’(류승완, 2015), ‘내부자들’(우민호, 2015), ‘아수라’(김성수, 2016) 같은 작품이 그 예다. 이 작품들에서는 공권력과 엘리트가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법적으로 부패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검사의 타락과 대선 승리

    ‘더 킹’도 이러한 흐름과 어느 정도 맥을 같이한다. 이 영화에서 1980년대 목포의 양아치 박명훈(정성모 분)의 고교생 아들 박태수(조인성 분)는 유명한 싸움꾼이 됐지만 집에 찾아온 검사 앞에 아버지가 쩔쩔매는 모습을 보고는 주먹이 아니라 검사가 진짜 권력을 쥐고 있음을 깨닫고 공부를 하게 된다. 박태수는 서울대 법대에 들어가고 사법고시에 합격해 검사가 되지만 기대와 달리 매일 자잘한 사건들을 처리하는 지루한 생활을 반복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박태수는 여학생을 성추행한 체육교사를 기소하지 못한다. 그 교사가 지역 유지의 아들이자 검찰 간부 한강식(정우성 분)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태수는 법대 선배이자 한강식의 부하인 양동철(배성우 분)이 성추행 사건을 묻어두고 힘 있는 전략부로 들어오라는 제의를 뿌리치지 못한다.  

    박태수는 기소를 포기하는 대신, 전략부에서 한강식과 굵직한 사건들을 다루면서 권력의 맛을 본다. 영화는 정권이 바뀌어도 검찰이 늘 권력의 도구로 기능하면서 조직폭력배와도 결탁해 스스로 권력과 부를 누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강식은 목포의 들개파를 봐주고 들개파는 한강식에게 상납한다. 들개파의 일원이자 박태수의 고교 시절 라이벌인 최두일(류준열 분)은 들개파의 강남지부를 맡아 세력을 키운다. 영화는 한강식과 박태수가 휘두르는 검찰 권력과 들개파와 최두일이 휘두르는 음지의 폭력을 대비시킨다.

    영화는 박태수의 1인칭 내레이션으로 진행되고 시대의 흐름은 박태수의 시점에서 초점이 맞춰진다. 박태수가 아내 임상희(김아중 분)를 만나는 장면은 빠르게 진행되며 다소 코믹하게 다루어진다. 이렇게 극의 흐름상 중요하지 않은 장면을 생략하면서 코믹하게 다루는 기법은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들에서도 발견된다. 마틴 스콜세지는 ‘좋은 친구들’(1990), ‘카지노’(1995), ‘울프 오브 더 월 스트리트’(2013)에서 이런 기법을 사용해 미국 자본주의의 부침과 주인공의 흥망성쇠를 연결했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

    ‘더 킹’은 박태수의 인생 고비마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의 연설 장면이나 대선 승리 장면을 삽입함으로써 그의 흥망성쇠와 정치권력의 변화에 따른 함수관계를 분명히 드러낸다. 박태수는 한강식과 양동철에 의해 버림받고 독직 사건에 휘말려 지방으로 좌천되고, 친구 최두일은 들개파에게 살해된다. 박태수는 나락으로 떨어져 술에 취해 쓰러진다. 그런 그의 눈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을 전하는 TV 뉴스가 비친다. 노무현의 자살은 버림받은 박태수의 처지와 동일시된다. 이 영화는 정치적 사건에 관한 TV 뉴스를 권력 근처에 갔다가 추락하는 박태수의 처지를 빗대기 위해 효과적으로 삽입한다. 영화는 실제의 정치적 사건을 직접 언급하지 않지만 박태수가 한강식을 잡기 위해 정치에 투신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최순실 게이트로 대선 국면이 일찍 전개되고 있는 요즘의 분위기와 잘 맞물린다. 2012년 대선 때에도 ‘남영동 1985’(정지영 연출)와 ‘26년’(조근현, 2012)처럼 정치를 다룬 영화가 나왔다. 대선을 맞아 영화는 정치를 풍자하고 조롱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는 것 같다. 물론 이렇게 대선 정국에서만 정치 드라마가 등장하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정치 풍자는 누가 정권을 잡든 충분히 보장될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 세계가 주목하는 수작이 나온 이유는 영화를 통해 사회적 발언을 하는 표현의 자유가 보장됐기 때문이다. 정권은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



    노광우

    ● 1969년 서울 출생
    ● 미국 서던일리노이대 박사(영화학)
    ● 고려대 정보문화연구소 연구원
    ● 논문 : ‘Dark side of modernization’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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