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호

김재욱의 대선 삼국지

“강자를 섬기며 때를 기다렸건만”

안희정, 적벽대전을 치르지 못한 손권

  • 입력2017-03-21 09: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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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동의 맹주를 꿈꾸던 오나라 손책은 독화살을 맞고 쓰러지자 열아홉 살 아우 손권에게 나라를 맡기며 이렇게 당부한다. “강동의 많은 인재를 데리고 조조와 유비한테 맞서서 싸우는 일은 네가 나보다 못할 것이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을 부려서 이 땅을 보전하는 일은 내가 너만 못하다. 너는 늘 아버지와 나의 어려웠던 일을 생각하면서 대업을 도모해라.”
    한달 사이에 참 많은 일이 일어났다. 삼성의 이재용 부회장이 구속됐고, 보수진영은 세력을 결집해 탄핵 반대 집회를 열었으며, 황교안 권한대행은 특검 수사 연장을 불허했고 결국 특검 수사는 종결됐다. 이런 가운데 헌법재판소는 3월 10일 오전 11시,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인용했다. 현직 대통령이 파면되는 일대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그간 야권 지지자들 사이에서 회자되던 이른바 ‘벚꽃 대선’이 현실로 다가왔다. 이제 60일 안에 각 당은 경선을 통해 후보를 선출하고 본선을 준비해야 한다.

    먼저 ‘빅 3’ 후보를 보유한 더불어민주당의 상황을 살펴보자. 문재인 전 대표가 부동의 1위 자리를 지키고 있고, 한때 20%의 지지율을 기록한 안희정 충남지사(이하 안희정으로 표기)는 ‘대연정’과 ‘선의’ 발언 이후 하향세다. 이재명 성남시장은 한 자릿수 지지율을 획득하고 있으나 반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국민의당 안철수 의원은 두 자릿수 근처에서 오락가락하고 있고, 보수진영에서는 현재까지 두각을 나타내는 후보는 없으나 황교안 권한대행이 대안으로 떠오르면서 안희정을 제치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황 권한대행은 아직 출마 여부를 밝히지 않은 상황이므로 이번 호에선 야권 2위 후보인 안희정을 중심으로 이야기하려 한다.



    분노와 미움을 넘어서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안희정은 식음을 전폐한 채 노무현의 죽음을 애통해했고 그 모습을 지켜본 모친의 말을 전한 글이 있다.



    “에이구, 제 어미가 죽었어도 그리 슬플까. 물 한 모금 안 넘기고 자지도 먹지도 않고…기진해 있어서 내가 뭐 약 좀 가져갔더니 어머니나 드시라고 거들떠도 안 봐.…그려 알어, 온 나라 사람이 다 슬퍼하니께. 아녀, 좋아서 신나는 인간도 있을껴. 내가 왜 이런다냐.…당최 나잇값도 못 하고 악담이나 하다니.”(2010년 5월 26일 딴지일보)

    안희정은 스물일곱 살 되던 1994년에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사무국장이 되면서 공식적으로 노무현과 손을 잡았다. 이후 2001년 노무현 대통령후보 경선캠프 사무국장을 지냈고, 2002년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비서실 정무팀장을 맡으면서 노무현 대통령 당선과 참여정부 출범에 기여했다. 이런 사람이니 이처럼 슬퍼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다.

    2010년 안희정은 제36대 충청남도 도지사가 됐다. 이전까지 현실 정치 경험이 없다시피 했고, 인지도도 높다고 할 수 없었으며, 확고한 지지기반을 다져놓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유력한 자유선진당 후보를 2.4% 차이로 따돌리고 당선됐다.

    그를 당선시킨 힘은 무엇일까. 표면적으로는 당시 이명박 대통령의 세종시 수정안에 대한 충남도민의 반발을 적절히 이용한 안희정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노무현 대통령 서거 1주기를 맞이하며 전국에 잠재돼 있던 추모 열기 아니었을까. 아닌 게 아니라 2010년 지방선거를 대변한 핵심어 중 하나가 ‘친노의 부활’이었다. 노무현의 죽음이 이른바 ‘폐족’이 됐던 친노를 부활시킨 셈이다.

    “나에게도 분노가 있다.…‘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마지막 메시지도 결국 ‘분노를 넘어서달라’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분노와 미움이 더 이상 우리 안에 자리를 잡지 못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더 좋은 민주주의다.”(안희정 ‘산다는 것은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위즈덤하우스, 2013)

    그러나 안희정은 노무현의 복수를 꿈꾸지 않고, 오히려 분노를 넘어서기 위해 노력했다. 도지사가 되고 난 이후 충남 지역의 현안 해결에 주력했다. 그가 말한 것처럼 어디에서도 ‘노무현을 위한 분노’를 찾아볼 수 없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강력한 리더십도, 그의 죽음도 국민의 용인하에 이뤄진 것.… 진보진영은 박 대통령이 1963년, 1967년 대선에서 선출됐다는 사실을 역사로 인정해야 한다.…(다만) 박 전 대통령의 공적을 아무리 찬양해도 공칠과삼(功七過三)을 넘지 않는 합리성을 가져야 한다.…전두환 정권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지만 외환 자유화, 물가 안정 등을 통해 역사적 전환을 이뤘다.…노태우 정권은 북방외교를 적절하게 추진했다.”(2013년 11월 13일 동아일보)

    진영 논리가 사회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상황인데도 안희정은 자신의 진영에서 벗어나 상대 진영까지 감싸 안으려고 했다. 안희정의 이러한 태도는 자칫하면 양 진영 모두에게 배척당할 수 있겠는데, 어찌됐건 안희정은 자신의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동시에 좌고우면하지 않고 지역 일꾼으로 남았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안희정은 2014년 충남지사 재선에 성공했다. 섣불리 단정할 순 없겠으나, 선거 결과만 놓고 본다면 충남 유권자들이 안희정의 태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고 볼 수 있다.



    강동의 주인에서 천하의 주인으로

    2014년 ‘삼국지인물전’을 쓰면서, 안희정을 오나라의 기반을 마련한 손책(손권의 형)에 비유했다. 손책은 기반이 다져지지 않은 상태에서 성급히 조조를 치려다 자객의 손에 허무하게 죽었다. 안희정의 결말이 그렇게 된다고 예상한 게 아니라, 안희정의 당시 상황이 그와 유사하니 성급하게 전국의 주인이 되려 하지 말고 먼저 기반을 다져 주기 바랐던 것이다.

    다행히 안희정은 손책처럼 서두르지 않았다. 우리는 분노와 진영 논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안희정의 태도에 주목해야 한다. 그런 안희정에게서 오나라 손권(孫權·182~252)의 모습이 비친다. 손권은 아버지 손견을 죽인 유표에게 곧바로 복수하지 않고 먼저 기반을 다졌으며, 강동 지역을 평정한 뒤 강력한 조조에게 맞서기 위해 라이벌인 유비와 손잡기도 하고, 조조에게 머리를 숙이기도 하면서 오직 때를 기다렸다. 

    소설 ‘삼국지’에서 손권은 황제가 됐지만 유비나 조조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한 인물이다. 주로 방어전을 했고, 강동 지역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한다. 이래서 손권을 진취적이지 못하고 큰 뜻이 없는 사람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손권은 노숙을 처음 만났을 때 이렇게 말했다.

    “춘추시대의 제나라 환공(桓公)이나 진나라 문공(文公)처럼 패권을 차지하고 싶은데, 당신은 나를 어떤 방향으로 인도하겠소?”

    노숙이 대답했다.



    “저의 생각에는 한나라 황실은 부흥시킬 수 없고, 조조를 쉽게 제거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장군께서는 제환공, 진문공과 같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대신 장군께선 먼저 황조를 죽이고, 유표를 공격해 장강(長江)을 경계로 삼은 다음, 칭제건호(황제를 칭하고 자립해 제후가 되다)를 하여 천하를 도모하셔야 하겠습니다.”

    제환공과 진문공은 주(周)나라 천자의 권위를 인정한 사람들이다. 노숙은 그 주나라에 해당하는 현재의 한나라가 망할 것이므로 손권이 그들처럼 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노숙은 손권에게 스스로 황제가 돼 독립하라고 권유했다. 이때 한나라는 아직 망하지 않았으니 사실상 손권에게 ‘반란’을 권유한 셈이다. 손권은 노숙의 말을 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례했다. 손권은 천하의 주인이 되려는 뜻을 품고 있었다.

    “정신적으로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뒤를 잇는 장자라는 자부심이 있다.…집안을 이어나가는 맏이가 되겠다는 포부가 있다.…한국의 낡은 정치와 민주당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싶다.…아직은 힘이 부족하지만 많이 단련하고 정책 비전을 내 놓아 도민들로부터 여야를 가리지 않고 훌륭한 정치인으로 꼽힐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2013년 12월 17일, 안희정의 송년기자회견’)

    안 지사가 겉으로는 ‘도민’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이미 이때부터 안희정의 눈은 전국을 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희망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머리를 조아리고 때를 기다리다

    219년, 손권은 관우를 죽이고 형주를 점령했다. 그러나 유비의 보복이 두려웠다. 게다가 혹시라도 유비와 자신이 싸우는 사이 조조가 공격해 오기라도 하는 날이면 속절없이 무너질 판이었다. 손권은 관우의 수급(전쟁에서 베어 얻은 적군의 머리)을 조조한테 보내면서 상소를 썼다.

    “신(臣) 손권은 천명(天命)이 주상(主上, 조조를 가리킴)께 돌아간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어서 황제 자리에 오르시고, 속히 장수를 보내셔서 유비를 소탕하시옵소서. 신은 곧 아랫것들을 거느리고 땅을 바쳐 항복하겠습니다.”

    유비의 원망을 조조한테로 돌려놓겠다는 심산이다. 조조가 누군가. 이런 수에 넘어갈 리가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손권이 자신을 ‘신하’라고 하는데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조조는 손권을 표기장군으로 삼고, 형주목을 겸하도록 했으며, 남창후(南昌侯)로 봉했다. 한나라 황제의 권위를 빌렸지만, 자신이 손권한테 벼슬을 내려준 것이다. 손권은 사신을 보내 한나라 황실에 공물을 바쳤고, 포로로 잡았던 조조의 부하를 돌려보냈다. 이렇게 손권은 강적 조조한테 굽히고, 유비와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는 자세를 취했다.

    이제 안희정의 자세를 보자. 우리 사회의 주류는 여전히 보수 세력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을 인정하고, 근래에 와서 상대 진영과 ‘대연정’을 할 수 있다거나 비판받는 지도자라 할지라도 그들의 나라와 국민을 향한 ‘선의’를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는 발언을 하는 안희정에게서 손권의 모습이 비친다.

    이후에도 손권은 이런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조조의 아들 조비가 주는 왕의 작위를 받고 아름다운 옥돌과 구슬을 조비한테 보냈으며, 관우가 사로잡아놓은 위나라 장수 우금을 돌려보냈다. 222년 유비가 대군을 거느리고 침입해 오자 손권은 육손을 기용해 유비의 군대를 궤멸시켰다. 곧바로 황제 자리에 오를 법한데 손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부하들도 손권에게 속히 황제가 되라고 했다. 손권은 번번이 거절하다가 7년 뒤인 229년, 마침내 황제 자리에 올랐다.

    ‘대연정’과 ‘선의’ 발언을 한 이후, 야권의 유권자들은 안희정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곧바로 안희정의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졌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안희정은 태도를 바꿀 생각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손권은 비록 천하통일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오나라의 황제가 됐다. 그렇다면 안희정의 미래는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대연정 vs 적폐 청산

    안희정이 말했다.

    “기존의 여야 구도에서 ‘나는 반대하겠다’라고 하는 야당을 상존시켜서는 의회는 작동하지 않습니다. 가장 반대 진영의 사람들과 대화와 타협을 통해서 함께 국가의 목표를 합의할 때라야만 국민들이 지금 요구하고 있는 시대적 개혁을 추진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국회법상에서 야당이 기본적으로 무조건적인 반대와 재 뿌리기를 그동안 우리가 봐왔던 정치처럼 강행한다면 그건 작동 불가능한 국회가 됩니다.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연정이기를 바랍니다.”

    정관용이 질문했다.

    “그렇기 때문에 새누리당은 무조건 안 돼, 당신은 무조건 야당 해, 이런 자세는 안 된다 그런 얘기시군요.” 

    안희정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이상 2017년 2월 2일 노컷뉴스)

    이것이 이슈가 된 ‘대연정’ 발언의 일단이다. 발언 내용만 보면 크게 문제 삼을 만한 것이 없다. 같은 편만 가지고 정치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울러 ‘연정’이라는 ‘개념어’가 등장해서 다소 생경한 주장처럼 보이지만, 안희정은 예전부터 줄곧 이와 같은 태도를 견지해왔다.

    그러나 야권의 많은 유권자는 안희정의 주장을 용납하지 않았다. 야권으로선 현재의 보수 정당은 ‘단죄 대상 세력’인데 이들과 어떻게 손을 잡느냐는 것이다. 줄곧 상승세를 타던 안희정을 향해 비난이 쏟아졌다. 논란이 커지자 “적폐 청산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다”라며 한발 물러섰지만 야권 지지자들에게 오해를 사고 비난받을 여지는 분명 있었다.

    “지난 100년, 부끄러운 역사도 있었지만 우리는 마침내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 그리고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했습니다. 그 자체로 자랑스러운 역사입니다. 그 역사 속에 김구도, 이승만도, 박정희도, 김대중도, 노무현도 있습니다. 그들 모두가 대한민국입니다. 지난 100년의 역사를 국민의 관점에서 자긍심을 가지고 받아들이는 것이 대통합이고, 앞으로 100년을 국민이 함께 설계하는 것이 ‘시대교체’입니다.”(안희정 ‘3·1절 기념사’ 2017년 3월 1일 페이스북)

    야권 유권자에게 꽤 많은 비판을 받은 발언이다. 비판의 요지는 ‘이승만과 박정희를 어떻게 자랑스럽다고 할 수 있는가’였다. 그러나 이 역시 안희정이 그동안 취해온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발언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전적으로 개인에게 달려 있지만 안희정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곧바로 지지율 하락으로 연결됐다.

    그럼에도 안희정은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는 명약관화하다. 안희정은 본선 후보가 되기 어렵다. 천신만고 끝에 본선에 올라간다면 중도보수 성향의 유권자를 흡수하면서 당선될 수도 있겠지만, 당장 더불어민주당 경선에서 승리하기 어렵다. 이에 안희정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여타의 유권자를 두고 “발언의 전후 맥락을 살피지 않는다” “안희정의 진심을 몰라준다” “유연하지 못하다” “현실적이지 않다”고 개탄할 수 있겠지만, 현재 야권 지지자들은 안희정의 유연한 태도보다 문재인의 ‘적폐 청산’을 더 선호하는 듯하다.

    살펴본 대로 안희정은 상대에게 굽히기도 하고 타협하면서 때를 기다리던 손권을 닮았다. 아울러 우리나라의 ‘강동’이라 할 수 있는 충남에서 많은 신망을 얻었다. 적이 많지 않고 영호남 지역주의에서도 자유로운 편이다. 충분히 전국 제패를 노려볼 만한 조건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둘 사이엔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손권은 ‘적벽대전’을 치렀다는 사실이다. 싸울 때는 과감하게 싸웠다. 아쉽게도 안희정은 ‘적벽대전’을 치른 적이 없다. ‘적벽대전’을 거치지 않고 손권이 될 수 있을까. 싸움도 정치의 영역에 포함된다. 현재와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이번은 물론 ‘차차기’에도 어렵다. 난세에는 문무를 겸비한 영웅이 필요하다.

    김 재 욱


    ● 1972년, 경북 봉화 출생
    ● 동국대 한문학과(학사), 교육대학원(석사)
    ● 고려대 국문학과 한문학 전공(박사, 한국한시, ‘목은 이색의 영물시 연구’)
    ● KBS 대하드라마 ‘징비록’ 고전철학 자문
    ● 現 고려대 한자한문연구소 연구교수
    ● 저서 ‘삼국지인물전’ ‘한시에 마음을 베이다’ ‘군웅할거 대한민국 삼국지’외 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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