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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판사를 그만두고 방위사업청으로 갔나

  • 정재민 | 전 판사·소설가

나는 왜 판사를 그만두고 방위사업청으로 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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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복 속에 개성 감추기

판사의 일을 재미있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사람을 감옥에 보내고, 부부를 이혼시키고, 자식의 양육권을 어느 한쪽에만 주고, 재산을 빼앗거나 회사를 파산시키는 일들이 재미있겠는가. 재미는커녕 상처만 쌓인다. 아무리 모르는 사람이라지만 내 손에 피를 묻힐 때마다 내 가슴에 보이지 않는 무수한 흠집이 남는다.

판사는 검은 법복 속에 자기 자신을 감춘 채 살아간다. 개성을 발현시키는 것이 제한된다. 생각도 평균인의 상식에 끼워 넣어야 한다. 당사자들이 어느 판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다른 판결을 받는 것은 정의롭지 않기 때문이다. 정의란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취급하는 것이다. 수많은 판결례가 사실상 판사의 판단을 제어하고 있고 그에 반하는 판결을 하면 항소심에서 교정된다. 판사가 어떻게 말하고 조치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빈틈이 없을 정도로 세세하게 매뉴얼이 확립돼 있다. 사람이 각자 ‘나’로서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나’를 이루어간다는 인생관을 가진 사람에게 판사로만 사는 것은 갑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나는 왜 판사가 됐나. 출퇴근할 때마다, 어려운 사건 앞에 답을 찾지 못할 때마다 무수히 내 자신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어떤 판사들은 뚜렷하고 근사한 대답을 품고 있다.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기 위해서. 나는 그렇지 못했다. 실은 절실하게 판사가 되고 싶었던 적이 없다.

학창 시절 내 꿈은 특파원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판검사가 돼야 한다면서 힐난하셨다. “사람이 어떻게 제 하고 싶은 대로만 사노.” 일리 있는 말이었다. 내가 뭐라고. 이 거친 세상에서 몸 하나밖에 없는 놈이 어찌 나 원하는 대로만 살 수 있겠는가. 가난한 집안 맏이로서 가계에 도움도 되어야 하겠지. 아픈 어머니 말씀이라 더욱 거역할 수 없었다. 나만의 길을 홀로 떠날 수 있을 정도로 내 심지가 여물지도 못하던 때였다. 부모님의 바람과 선생님의 말대로 법대를 갔다. 나 역시 사회적 지위, 장래의 경제력 등 실리적으로도 좋다는 계산을 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사법시험을 보게 됐고 합격하고 나니 판사가 된 것이다. 마치 혼잡한 지하철에서 내려서 가장 많은 사람이 몰린 방향으로 무작정 따라 나가는 것처럼.





나쓰메 소세키의 편지

그러나 남들이 좋다는 삶도 소문난 잔치처럼 별것 없었다. 그저 그런 패키지여행 같았다. 그리 나쁘지는 않았지만 신나지도 않았다. 여행 끝나고 남는 것은 감동 없는 관광명소를 배경으로 한 사진들뿐. 내가 좋아하는 일과 연애결혼한 것이 아니라 남들이 좋다는 일과 중매결혼한 아쉬움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틈틈이 소설과 논문도 몇 편 쓰고, 이례적으로 국방부 정책실, 외교부 국제법률국, 유엔국제형사재판소에서 일하는 일종의 외도를 감행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재작년 국제형사재판소가 있는 헤이그에 머물 때 수십 번 고쳐 읽은 편지 구절이 있다. 일본 근대소설의 아버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가 영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교토대 영문과 교수직을 거부하고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하면서 친구에게 쓴 편지다. ‘유학에서 돌아오는 길에 결심했네. 다시는 지금까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내 스스로가 얼마나 위대한지 시험해볼 기회가 없었네. 스스로를 신뢰한 적이 없었네. 이제는 내 혼자 힘으로 가는 데까지 가다가 막다른 골목을 만나면 거기서 쓰러지겠네.’ 이 중에서도 ‘스스로를 신뢰한 적이 없었네’라는 구절이 정곡을 찔렀다. 내가 그동안 대체로 남들이 좋다는 안전한 일만 좇은 것도 내가 스스로를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믿어주지 못한 내 자신에게 미안해졌다. 실패를 겪더라도 내 자신을 믿어주고 싶었다. 그러지 않으면 죽을 때 내 자신이 서럽게 울 것 같았다. 마침 나이 마흔을 맞이하면서 각오도 남달랐다. 그래서 결심했다. 귀국하면 다시는 이전과 같은 삶을 살지 않겠다고.

남은 절반의 인생은 오로지 ‘나’로서 살아보고 싶었다. 그러자면 먼저 ‘나’보다 비대한 ‘판사’라는 꼬리표를 잘라내야 했다. ‘정 판사’가 아니라 ‘정재민’으로 살아보고 싶었다. 번듯한 명함에 기대지 않고 대접이 더 나쁘더라도 내 이름 석 자의 무게로 살기로 했다.



왜 방위사업청인가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 행정부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예전에 국방부, 외교부에서 일할 때 행정부 일의 스케일과 재미와 보람에 홀딱 반한 기억 때문이었다. 국가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일인 만큼 보람이 크고 문제 해결 방식이 하나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어서 창의적이고 재미있게 일할 수 있었다. 미력하게나마 국익에 기여한다는 자부심도 빼놓을 수 없었다.

왜 하필 방위사업청이냐고 묻는 사람이 많다. 많은 이가 말하는 방산비리 척결이 최우선 동기는 아니다. 방사청장도 아닌 일개 팀장으로 가면서 그런 말을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주제 넘는다. 방위산업전문 변호사가 되려고 잠시 경력을 쌓으려는 것도 아니다. 정년을 채우려고 직급을 낮춰 정규직 공무원이 됐다. 은퇴하고 취업제한기간이 끝나면 아무래도 변호사가 될 가능성이 높겠지만  나중에 내가 로버트 태권V를 만들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직급이 낮아지는 것을 이해 못하는 분들도 있지만 정부중앙부처의 베테랑 공무원 스물다섯 명과 일하는 팀장 자리가 내게 과분할지언정 결코 낮은 자리라 생각지 않는다. 퇴계 이황 선생도 정3품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말라고 했다. 내 선택이 용감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대단한 모험은 아니다. 요즘처럼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시기에 그저 정년 보장되는 공무원 된 것 아닌가.

방위사업청에 간 데에는 무엇보다 방위사업청 자체의 매력이 컸다. 방위사업청은 우리 군이 필요한 무기나 장비를 자체적으로 개발하거나 국내외에서 구입하는 기관이다. 국내업체가 만든 무기를 외국에 팔 수 있도록 활로를 개척하는 일도 한다. 구축함이나 헬기를 프라모델로 만들어도 뿌듯한데 세계를 다니면서 장비와 부품을 구해서 실제로 디자인하고 조립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재미있겠는가. 우리나라 무기를 들고 새로운 나라에 활로를 뚫는 일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뛴다. 정무적, 추상적 담론만 다루는 부처와 달리 구체적인 성과가 무기나 장비로 눈에 보인다는 것도 매력적이다.

외교, 안보, 과학기술, 법률, 국제, 경제, 회계, 인문학 등 여러 분야가 얽혀 있는 영역이므로 내가 그동안 배우고 익힌 이런저런 지식과 경험을 헛되지 않게 써먹을 수도 있다. 방위사업청 입장에서 내 이력이 특이한 만큼 전문성과 공정성 측면에서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계약과 같이 법률적인 일을 다루는 기관이므로 법률가가 팀장이 되면 일의 처리 속도와 합법성이 제고될 것이다.

모난 돌이 돼 사방에서 정을 맞고 따돌림을 당하더라도 불법과 부패에 부역하지 않을 것이다. 진급과 평판에 인질 잡히지 않고, 옳지 않은 일은 하지 않고, 옳은 일은 반드시 실현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책임지는 것을 회피하지 않는 그런 양심적인 공직생활을 한번 시도해보고 싶다. 내 자신을 믿어주고 ‘내 삶’을 치열하고 충실하게 살기 위해서.



나는 왜 판사를 그만두고  방위사업청으로 갔나

정 재 민
● 서울대 법대 졸업,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사법연수원 수료(32기)
● 前 판사, 舊유고유엔국제 형사재판소(ICTY) 재판연구관, 외교부 영토법률자문관  
● 세계문학상, 매일신문 포항국제동해문학상 수상
● 저서 : ‘보헤미안랩소디’  ‘국제법과 함께 읽는 독도현대사' ‘소설 이사부’ ‘독도 인 더 헤이그’






신동아 2017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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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민 | 전 판사·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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