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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현대사

“독일 통일은 경제력으로 소련의 승인을 산 것”

‘라인 강의 기적’ 주역 아데나워 서거 50주기

  • 백범흠|중국청년정치학원 객원교수·정치학 박사

“독일 통일은 경제력으로 소련의 승인을 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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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북정책을 두고 좌파, 우파로 나뉘어 충돌하는 한국은 한반도 통일을 위해 어떤 길을 걸어야 하나. 4월 19일은 독일 통일의 씨앗을 뿌린 아데나워(1876~1967) 서거 50주기다. 독일은 통일이라는 과업 앞에서 좌·우파의 구분이 없었다. ‘접근을 통한 변화(Wandel durch Annaehrung)’로 통일을 이뤄냈다. 동·서독 통일은 아데나워(총리·보수)가 에르하르트(총리&경제장관·보수)와 함께 이룩한 경제력 및 공산주의에 대한 면역력을 바탕으로 바르(특임장관·진보)가 설계하고, 브란트(총리·진보)가 추진했으며, 슈미트(총리·진보)가 이를 더 단단히 하고, 콜(총리·보수)과 겐셔(외교장관·중도)가 종결지은 게르만 민족의 일대 과업이었다.
“독일 통일은 경제력으로 소련의 승인을 산 것”

1963년 6월 23일 콘라트 아데나워(오른쪽) 당시 독일 총리가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 함께 쾰른에서 차량으로 이동하고 있다.


1989년 11월 9일 귄터 샤보프스키 동독(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 사회주의통일당(SED) 정보담당 서기는 술렁대는 기자단 앞에서 동독 국민은 ‘지금 즉시’ 자유롭게 해외여행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수많은 동베를린 시민이 동·서 베를린을 가로지른 장벽으로 몰려들었다. 베를린 장벽은 몰려든 시민에 의해 세워진 지 28년 만에 무너졌다.

이듬해 초 서독(Bundesrepublik Deutschland)이 경제난에 처한 소련에 원조를 제공하면서 동·서독과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가 참가한 독일 통일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2+4회담이 열렸다. 1990년 8월 말 통일조약이 체결되고, 9월 2+4 회의의 승인을 받아 10월 3일 ‘거짓말같이’ 통일이 이뤄졌다.

다수 외교관과 국제정치학자는 독일 통일을 ‘동방정책(Ostpolitik)의 승리’라고 평했다. 아직도 많은 이가 동방정책에 앞서 ’서방정책(Westpolitik)’이 있었으며, 동방정책은 ‘서방정책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거짓말 같은 통일

1939년 5월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동몽골(東蒙古) 노몽한(할힌골) 일대에서 벌어진 일본군, 소련군 간 전투는 기갑부대 중심의 게오르기 주코프 장군 휘하 소련군의 압승으로 끝났다. 일본군의 노몽한 전투 패배는 1941년 4월 일·소 중립조약 체결로 이어져 2개월 뒤인 6월 독·소 전쟁 개시 후 독일의 간청에도 일본이 소련과의 전쟁에서 중립을 고수함으로써 결국 독일이 패배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노몽한 전투는 1939년 9월 독일군, 소련군의 폴란드 침공, 1940년 5월 독일군의 벨기에·프랑스 침공, 1941년 6월 독일군의 소련 침공, 1941년 12월 일본군의 하와이 진주만 기습 등 제2차 세계대전으로 가는 시발점이 됐다.



‘중립국 통일안’ 거부

독일 제3제국(히틀러 제국)은 소련 침공 이후 동부전선은 물론, 미국·영국 등 사방에서 적을 맞았으며 1945년 4월 베를린이 함락당하면서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졌다. 독일은 패전으로 인해 프로이센 왕국 이래의 고유 영토 오데르-나이세선(Oder-Neisse Line) 이동(以東) 약 10만㎢를 소련과 폴란드에 빼앗겼으며, 나머지 영토도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에 분할 점령당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패전에 이어 불과 27년 만인 1945년 두 번째 패전을 겪은 독일인들은 심리적 공황에 빠졌다.

공황 상태의 서독을 추슬러 ‘라인강의 기적’을 이뤄내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유럽공동체(EC)에 가입시켜 다시 열강의 하나로 우뚝 서게 만든 콘라트 아데나워 전 서독 총리가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인 1967년 4월 19일 라인 강변의 소도시 뢴도르프에서 91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워진 바이마르공화국(1919~1933) 시절 쾰른 시장을 지낸 보수 기민당(CDU) 출신 아데나워는 1949년 73세의 나이로 서독 총리로 선출됐다. 당시는 미국 영국 프랑스가 서독 내정에 합법적으로 개입할 수 있었다.

아데나워는 △경제성장과 △서독의 국제 지위 회복이라는 2대 목표 달성에 주력했다. 아데나워는 경제를 성장시켜야 공산주의의 위협을 저지할 수 있으며, 서독의 국제적 지위도 회복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아데나워는 루드비히 에르하르트 장관에게 경제정책을 위임해 지금도 전 세계가 찬탄하는 라인 강의 기적을 이뤄냈다. 서독의 1인당 GDP(국내총생산)는 1950년 1000달러에서 1969년 5000달러로 급증했다(2015년 경상가치 기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까지 독일인에게 민족주의란 대체로 보수 진영의 가치였다. 진보 진영은 일반적으로 국제주의적 성향을 보였다. 1951~1955년 외무장관을 겸직한 아데나워는 일정 기간 미국, 영국, 프랑스의 간섭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되 주권을 강화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아데나워의 외교 방향은 바이마르공화국 시절 총리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이 추진한 ‘영국, 프랑스와의 관계 개선 후 소련(러시아)에 접근한다’는 방식과 유사했다. 아데나워와 슈트레제만의 외교정책은 공히 ‘독일에 대한 위협은 동쪽의 소련으로부터 나오며 서쪽의 영국, 프랑스와의 관계를 개선한 후 소련에 대응한다’는 국가 전략에 기초했다.

 제2차대전 패전 후의 아데나워와 1차대전 패전 후의 슈트레제만의 외교는 독일이 ‘취약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했다. 아데나워 외교의 중심은 환대서양(trans-atlantic) 관계, 즉 미국과의 관계 강화와 프랑스·베네룩스 3국(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과의 경제협력 증진이었다. 핵무장한 소련으로부터 위협받는 상황에서 서독은 미국으로부터 경제뿐 아니라 군사 지원도 받아야 했다. 아데나워는, 영국을 혐오한 슈트레제만과 달리 소련의 위협에 맞서려면 미국, 영국, 프랑스와의 동맹이 긴요하다고 확신했다.

서독은 1950년 발의된 ‘슈망 플랜(Schuman Plan)’을 통해 패전국의 멍에를 벗었다. 슈망 플랜에 근거해 1951년 서독과 프랑스, 이탈리아, 베네룩스 3국이 참가하는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가 창설됐다. 서독은 유럽석탄철강공동체를 통해 해외시장을 확보했으며 경제를 계속 성장시키고 주권도 강화해나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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