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호

이것이 포퓰리즘이다

동상이몽 재벌개혁 준조세 폐지가 대기업 특혜?

경제 현실과 공약 괴리 좁혀야

  • 정현상 기자|doppelg@donga.com

    입력2017-04-27 21:5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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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文, 기업지배구조 개선➞ ‘성형미인 만들기’
    • 安, 공정위 권한 강화 ➞ ‘업계 요구 반영 미흡’
    • 洪, 기업 기 살리기 ➞ ‘재벌 폐해 외면’
    • 劉, 일감 몰아주기 집중규제 ➞ ‘기존 규제로도 충분’
    • 沈, 재벌3세 세습 금지 ➞ ‘지나치게 엄격’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이후 재벌개혁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재벌과 권력이 짝자꿍이해서 서로의 뒤를 봐주고 이익을 나눠가졌다는 의혹을 받은 것이다. 한 정치권 인사는 “최순실 사태의 배후는 재벌”이라는 역설적인 지적을 하기도 했다. 재벌이 엄청난 정보력을 바탕으로 비선실세에 접촉해 자사의 이익을 실현하려는 과정에서 이번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이란 것이다.

    한편으로 재벌은 이번 사건에서 피해자로 비친다. 박영수 특검은 수사 결과 발표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최순실(61·구속 기소) 씨와 공모해 거액의 뇌물을 받고 대기업들을 압박해 미르·K스포츠재단에 출연을 강요한 혐의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헌법재판소는 탄핵심판 결정문에서 “피청구인(박 전 대통령)의 출연 요구를 받은 기업으로서는 수용하지 않을 수 없는 부담과 압박을 느꼈을 것” “(박 전 대통령은) 법적 근거 없이 대통령의 권한을 이용해 기업의 사적 자치 영역에 간섭한 것”이라고 밝혔다.

    분명한 것은 이번 기회에 재벌과 권력의 유착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재벌의 운용 행태를 바꾸는 제도 개혁을 통해서건, 선거를 통한 정치 심판을 통해서건 문제가 될 소지를 과감히 없애야 한다는 것이 수개월간 촛불민심이 요구한 내용이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결정문은 뒷부분에 ‘현행 헌법상 권력구조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한 항목은 ‘재벌기업과의 정경유착’이다. 현행 헌법상 대통령 권력의 과도한 집중은 우리 사회의 고질적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재벌기업과의 정경유착’과도 깊이 관련돼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일부를 인용해보자.

    ‘과거 재벌기업은 정치권력의 보호 속에서 고도 경제성장을 이뤄낸 산업화의 주역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재벌기업 중심의 경제성장은 정경유착과 이로 인한 불법과 부패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정치권력의 재벌기업과의 정경유착은 재벌기업에게는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는 반면, 다른 경제주체의 자발성과 창의성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역대 정부 모두 실패

    선거 과정에서 재벌개혁을 공약으로 내세웠던 박 전 대통령이 재벌과의 유착으로 결국 탄핵되고, 구속까지 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역대 정부가 하나같이 재벌개혁을 공약했지만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실현 가능성과 의지보다 표를 얻기 위한 차원에서 논의가 진행되다 보니 그런 결과를 낳았다.

    이번 대선을 앞두고도 각 대선 후보 모두 여러 가지 재벌개혁안을 내놓고 있다. 이번에도 실현 의지가 약하거나, 구체적인 실행방안이 나오지 않을 수 있다. 또 목표는 크나 현실성이 없을 경우 자칫 표를 얻기 위한 포퓰리즘(populism) 공약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섣부른 재벌개혁은 기업의 투자 의지를 꺾고 결과적으로 경제의 활력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포퓰리즘은 대중추수주의로 번역되는데, 옥스퍼드 사전은 이를 ‘보통사람들의 의견과 바람을 대변하려는 정치사상이나 활동’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문제는 여기서 이념적 지형에 따라 ‘보통사람’의 대상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좌파의 시선으로 보면 문재인·안철수 후보의 재벌개혁 공약은 약하다. 그래서 심상정 후보는 4월 7일 보도자료를 내고 “문재인·안철수 후보의 재벌공약은 유승민 후보만도 못하다”라고 비판했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는 기업지배구조 개선에 방점을 찍고 있다. 집중투표제와 전자투표 등을 통해 경영구조를 투명하게 바꾸고 지주회사제도가 기업승계에 악용되지 않도록 자회사 지분 의무 소유비율을 높이겠다고 밝혔다. 안철수 후보도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감사위원 분리선출, 집중투표제와 다중대표소송제를 도입하겠다고 밝혔지만, 안 후보는 공정거래위원회의 권한을 더 강화해서 시장 질서를 바로잡을 계획이다.

    반면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와 정의당 심상정 후보는 공정위의 전속고발권을 폐지하고 일감 몰아주기를 통한 재벌들의 사익 편취를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현 대선후보들 가운데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만 친재벌 정책을 주장한다. 재벌의 나쁜 짓은 책임을 묻되 재벌 자체를 죄악시하는 문화는 경제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재벌에 대한 제재보다는 성장에 방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왜 재벌개혁인가

    대선후보들의 구체적인 공약 내용을 이해하려면 먼저 재벌 현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2017년 4월 1일 현재 현행법상 재벌(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은 모두 27개로, 소속 계열사 수는 1155개에 달한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한국전력공사, 한국토지주택공사 등 주요 공기업도 여기에 들어갔지만 올해부터는 제외됐다.

    재벌은 1960년대 정부로부터 직접 수혜를 입었고 국가경제에 큰 도움을 줬다. 외환위기 이후에는 삼성·현대차·SK·LG 등 글로벌 기업이 등장했다. 2015년 우리나라 전체 수출 중 상위 10대 기업이 35.7%를 차지했다. 이런 긍정적 영향에도 불구하고 문어발식 확장, 독과점적 지위, 소유와 지배 일원화로 인한 경영의 비효율성 같은 부정적 영향도 나타났다.

    재벌을 규제하는 현행 정책은 직접상호출자 금지, 신규순환출자 금지, 채무보증 금지, 금융계열사 의결권 제한(15%), 총수일가 사익편취 규제, 공시 의무화 등인데 재벌의 집중을 완화하고, 횡포를 방지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지적이 많다. 재벌기업 지정 기준인 자산총액은 국민경제의 성장과 더불어 수시로 상향조정됐다. 1987년 4000억 원에서 시작해 2017년엔 10조 원으로 늘어났다.

    자산총액 기준 지정 제도의 문제점은 규모가 늘어나면 지정대상이 돼 규제를 받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경우에 따라 기업이 자산액을 조작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또 1위와 27위의 자산총액 차이가 몇십 배 이상 차이가 나 똑 같은 재벌 규제를 적용하기엔 무리가 따르기 때문에 10대 재벌 등 개수로 제한하자는 주장도 나온다.


    총수 견제장치 강화 한목소리


    대기업의 문어발식 확장을 막기 위해 마련됐던 제도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출자총액제한제도(출총제)다. 대규모 기업집단에 속하는 회사가 순자산액의 일정비율(30%)을 초과해 국내회사에 출자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1987년 재벌규제를 시작하면서 처음 도입할 당시엔 순자산의 25%내에서 금지해 가장 강력한 재벌확장 방지정책이었다. 이후 재벌의 강력한 저항으로 예외 조항이 신설되는 등 무력화되다가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이 제도가 폐지됐다.

    이후 재벌 계열사가 급증했다. 2008년 5대 재벌 총계열사가 241개였는데, 2013년에는 352개로 크게 늘어났다. 재벌의 경제력 집중이 급속도로 확대된 것이다. 그동안 재벌기업은 출총제가 투자를 저해하는 요인이라고 주장했으나, 출총제 폐지 뒤 투자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출총제 시대에는 투자가 늘어났다.

    지나친 재벌 확대를 막기 위한 또 하나의 제도가 지주회사 제도다. 지주회사는 다른 회사의 주식을 보유해 사업활동을 지배하는 것을 주된 사업으로 하는 회사를 말한다. 1987년 재벌규제 도입 당시에는 지주회사 설립이 금지됐다. 하지만 미국과 일본이 지주회사를 이용하고 있고 한국도 외환위기 이후 기업구조조정에 활용하기 위해 1999년부터 이를 허용했다. 허용과 동시에 재벌 확장에 악용되지 못하도록 강력한 규제가 있었지만 재벌의 요구와 저항으로 규제가 점점 완화돼 지금은 재벌조직의 핵심으로 등장했다.

    지주회사는 구조조정보다 외려 계열사 확장에 악용돼왔다. 지주회사도 상장하고 자회사도 상장하는 모순이 있었고, 그룹 내에서 지주회사와 지주회사 밖 계열사가 병존하는 모순도 있다. GS의 경우 69개 계열사 중 32개는 지주사 밖 계열사다. 지주회사제도가 재벌을 만들고 확장하고 세습하는 핵심 장치로 악용됐다는 비판도 있다. 따라서 지주회사의 규제를 다시 강화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지주회사의 자회사 주식 의무소유비율을 높이고, 부채비율을 현행 200%에서 100%로 낮추며, 증손회사는 금지시키고 손자회사까지만 허용하는 방안도 논의됐다.

    경영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기업 내부의 총수 견제장치도 강화돼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상법개정안이 담고 있는 집중투표제, 감사위원 분리선출, 대표소송제 활성화 등이 그런 장치인데, 이는 사실상 모든 기업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도 하다. 그동안 총수 견제장치로 사외이사제도가 있었지만 자사에 우호적인 사람들을 사외이사로 앉혀두는 경우가 많아 총수의 전횡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했다. 유럽의 경우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고, 이사회에 종업원 대표가 들어가 내부 이해관계자의 목소리가 반영되도록 하기도 한다.



    문재인 후보는 지난 1월 삼성·현대차·SK·LG 등 4대 재벌 개혁을 1호 경제공약으로 내놓았다. 30대 재벌의 자산에서 ‘범(汎)삼성 재벌의 비중이 25%에 달한다며 10대 재벌, 그중에서도 4대 재벌 개혁에 집중하겠다고 선언했다.
     
    문 후보의 재벌개혁 주요 내용은 △지배구조 개혁을 통해 투명한 경영구조 확립 △재벌 확장 방지 및 경제력 집중 해소 △공정한 시장경제 구축 등이다. 구체적으로는 주주총회에 집중투표제 도입, 노동자추천이사회 도입, 반시장 범죄에 대통령 사면권 제한, 지주회사 요건과 규제 강화,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 스튜어드십 코드(Stewardship code·기관투자가의 의결권 행사 자율지침) 실효성 높이기, 대기업 준조세금지법 제정 등을 도입하겠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특히 재벌들이 관심을 갖는 제도가 집중투표제다. 이것은 주주총회에서 이사진을 선임할 때 1주당 1표씩 주는 단순투표제와 달리 선임되는 이사 수에 해당하는 만큼 투표권을 주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되면 5명의 이사를 뽑을 때 주주는 5주의 의결권을 갖게 된다. 만약 소액주주들이 의결권을 모은다면 원하는 특정 이사에게 집중투표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대주주가 내세운 후보가 선출되는 것을 막을 수 있어 그만큼 소액주주의 권리가 높아진다. 하지만 경영진이 헤지펀드의 공격을 받아 경영권을 빼앗길 수도 있게 된다.


    ‘정부 의지 중요’


    문재인 후보의 재벌정책은 싱크탱크인 ‘정책공간 국민성장’에서 입안했다. 최정표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가 ‘국민성장’에서 경제분과위원장을 맡아 재벌개혁 방안을 총괄했다. 지난 30년 동안 재벌 연구에 매진해온 경제학자다. 최 교수는 “출총제, 지주회사법, 상법 개정이 핵심 이슈인데, 그 가운데서도 출총제가 가장 중요하다”며 “이명박 전 대통령이 없앤 이 제도를 부활시켜 10조 원 이상 그룹 가운데 10대 재벌만 규제하는 게 현실적인 개혁방안이다”고 말했다.

    방안이 너무 과격하면 재벌의 저항이 클 수 있고, 10대 재벌이 바뀌면 그 이하 재벌도 따라가기 때문에 10대 재벌만 규제해도 충분하다는 게 최 교수의 의견이다. 그러나 이 제도의 부활에 대해선 국민성장 내부에서도 비판 의견이 나왔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출총제는 매우 자의적이며, 지속가능하지 않은 규제 수단이다”며 “규제 대상을 10대 재벌로 하고 규제 비율을 순자산의 30%로 하는 것의 객관적 기준이 없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규제대상 재벌들이 법 준수보다는 완화를 위한 로비에 집중하고, 다시 규제기준이 완화되면 정부 불신이 가중되는 악순환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최 교수는 출총제가 실효성이 없었던 것은 예외 조항 등으로 인한 것이지 초기엔 매우 강력하고 효율적인 수단이었음을 상기시켰다.

    문 후보는 재벌공약 발표 때 그동안 재벌개혁이 지지부진했던 이유에 대해 “정부의 의지가 약했고, 규제를 피해가는 재벌의 능력을 정부가 따라가지 못한 측면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날 문 전 대표의 재벌 인식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는 “재벌총수 일가는 분식회계, 비자금조성, 세금탈루, 사익편취 등 수많은 기업범죄의 몸통”이라고 표현했다. 그만큼 재벌에 대한 문제의식이 강한 것으로 보인다.



    안철수 후보는 3월 16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재벌개혁 공약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공정거래위원회의 시장 감시 기능 강화를 통한 불공정 거래 관행 척결 △재벌의 기업지배구조 개선 △시장의 견제·감시 기능 강화 △산업구조 개혁 등을 담고 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안으로 △공정위 권한 강화 △감사위원 분리선출 및 집중투표제·전자투표제  의무화 △다중대표소송제 도입 △기관투자자의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비리 기업인에 대한 사면 금지 및 등기임원 자격 제한 등을 제도화할 계획이다.

    안 후보는 문 후보와 비슷한 재벌개혁 공약을 내세우고 있지만, 공정위 권한과 관련해서는 문 후보와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있다. 특히 공정위의 전속고발권을 폐지하자는 문 후보와 달리 안 후보는 공정위 권한을 더 강화해 준사법기관이 돼야 제 기능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참고로 전속고발권은 공정거래법 관련 사건에 대해 공정위 고발이 있어야만 검찰이 공소를 제기하는 제도인데, 고발이 남용돼 기업의 경제활동을 어렵게 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도입됐다. 공정위가 독점권을 갖고 있다는 비판이 나와 2014년부터는 감사원, 중소기업청, 조달청에도 고발요청권이 부여됐다.


    ‘소수 주주 보호’

    안 후보는 공정위의 시장 감시기능을 강화하는 것은 대기업을 옥죄자는 것이 아니라 좀 더 공정하고 경쟁적인 시장 환경으로 바꾸자는 취지임을 강조하고 있다. 또 공정위의 독립성을 강화하기 위해 공정거래위원회 위원 임기를 3년에서 5년으로 늘리고, 상임위원 수도 5명에서 7명으로 증원해 국회 추천을 받도록 할 계획이다.

    내부거래 및 기술탈취 등 불공정거래에 대한 조사를 강화하고 적발 시 엄중 제재하며, 대기업 중심의 독과점적 시장구조가 장기간 지속될 경우 공정위가 사업자에게 주식의 처분이나 영업양도 등의 조치를 명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공정위의 조사를 방해하는 행위에 대한 처벌도 강화할 계획이다.

    다중대표소송제, 감사위원 분리선출, 집중투표제 등은 3월 임시국회에 상정됐다 무산된 상법 개정안에도 들어 있다. 다중대표소송제는 모회사의 지분 1% 이상을 가진 주주가 자회사 임원들의 경영행위에 대해 소송을 걸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지주회사가 늘어났지만 자회사를 견제할 수 있는 제도가 없어 소수 주주를 보호하려는 취지다. 민주당의 상법 개정안에는 모회사가 자회사 지분의 50%만 보유해도 다중대표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자회사 평균지분율이 75%를 넘는 우리나라 지주회사 체제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소송이 많아지면 경영진의 진취적인 기업가정신이 위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감사위원 분리선출은 감사위원 선임 시 모든 주주의 의결권을 3%로 제한하는 내용이다. 이 경우 최대주주의 의결권도 3%로 제한돼 3%의 지분을 가진 해외 펀드 여럿이 연대하면 최대주주보다 많은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해외 펀드가 이사회를 장악해 의결사항이 이들의 의도대로 움직일 수 있어 경영권 분쟁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 전자투표제는 주주가 주주총회에 출석하지 않아도 온라인을 통한 전자투표를 진행할 수 있어 주주 참여도를 높일 수 있고, 결과적으로 경영진에 대한 견제효과가 커질 수 있다.


    홍준표 후보의 경우 재벌개혁보다는 재벌의 기 살리기 정책을 고안하고 있다. 4월 5일 대선후보 초청 한경 밀레니엄포럼에서 홍 후보는 “집권하면 제일 먼저 기업 기(氣) 살리기 정책을 펴겠다”고 밝혔다.

    “경제정책의 기본은 기업 기 살리기다.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이 되면 규제가 더 많아진다. 대기업이 되면 더더욱 많아진다. 이런 규제 틀 속에선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으로 성장할 이유가 없고, 중견기업이 대기업으로 올라갈 이유가 없다. 기업 규제를 없애고 혜택을 주는 것이 기업 의욕을 북돋우고 경제를 살리는 길이다.”

    따라서 홍 후보는 재벌개혁 정책을 따로 두고 있지 않다. 그는 “일자리가 충만한 것이 중요할 뿐 재벌 지배구조가 어떻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친(親)대기업 정책을 펴서 기업의 국내투자 여건을 마련해 한국판 리쇼어링(reshoring: 세제지원 등을 통해 해외 진출 기업을 돌아오게 하는 것)을 이끌고, 청년실업 해소도 이뤄내겠다는 것이다.



    유승민 후보는 정치에 입문하기 전 KDI 연구원 시절 재벌 전문가로 재벌의 긍정 기능을 강조한 바 있다. 하지만 지금은 경제공약만큼은 ‘좌클릭’했다. 심지어 정의당 심상정 후보조차 재벌개혁안만큼은 법인세 인상을 주장하는 유승민 후보가 문재인, 안철수 후보보다 낫다고 평가할 정도다.

    유 후보는 2월 13일 혁신성장 2호 공약으로 공정거래와 관련된 재벌정책을 발표했다. 무엇보다 재벌의 일감 몰아주기를 집중 규제하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재벌 총수일가가 계열사 일감을 몰아 받을 수 있는 개인회사를 설립하지 못하게 하고, 총수 일가의 개인회사가 그룹내 다른 계열사와 내부거래하는 것도 금지하겠다고 밝혔다.

    유 후보는 “재벌총수 일가는 적은 지분으로 수많은 계열사를 지배하면서 ‘사적 이익’을 누리고 있다. 각종 편법을 동원해 3세, 4세로까지 경영권을 물려주고 있는데 일감 몰아주기가 대표적인 수법”이라고 지적했다. 현재의 상속증여세법은 내부거래 비중이 30% 이상인 재벌 계열사의 지분을 3% 이상 갖고 있는 지배주주나 친족에게 증여세를 부과한다.

    또 공정거래법은 재벌 총수 일가 지분이 30% 이상인 상장사(비상장사는 20% 이상)가 일감 몰아주기를 하면 고발조치토록 하고 있다. 이런 규제로는 오히려 정당한 내부거래까지 처벌하게 되고, 정작 총수 일가의 사익편취는 막지 못한다는 것이다. 유 후보는 또 공정거래위원회의 전속고발권을 폐지해 불공정행위 피해자들이 즉각 고발할 수 있도록 공정위를 개혁하겠다고 강조했다. 발표문에서 유 후보는 기울어진 운동장론을 펴고, 공정한 거래와 경쟁을 강조했다.

    “재벌들은 혁신적 기업가정신 대신 경영권 세습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또한 계열사 일감을 받아서 하는 사업, 경제력을 바탕으로 장악할 수 있는 내수업종, 면세점 사업 등, 손쉽게 할 수 있는 사업만 하려 합니다. 협력업체들에 단가 인하를 강요하고 기술 탈취, 인력 빼가기 등 불공정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불경기로 소상공인, 자영업자 등 시장의 약자들은 먹고살기가 너무 어려운데, 강자들의 소위 갑질과 불공정행위는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한국경제는 재벌대기업들이 지배하고 힘을 남용하는 ‘기울어진 운동장’이 돼 왔습니다. 우리 경제가 진정한 혁신성장으로 나아가려면 공정한 거래와 경쟁이 펼쳐지는 ‘평평한 운동장’으로 바꿔야 합니다.”


    심상정 후보의 재벌개혁 인식이 가장 진보적이다. 3월 28일 오전 대한상공회의소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대선후보 초청 특별강연’에서 심 후보는 재벌개혁을 강하게 주장했다. 그는 “재벌 위주의 화려한 성장 뒷면에는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 자녀를 낳기 어려운 나라, 청년이 절망하는 나라라는 짙은 어둠이 동반됐다”고 지적하며 압축성장의 그림자를 걷어내기 위한 3대 과제로 재벌체제 개혁(경제민주화), 불평등 해소, 가계부채 해소를 제시했다.

    심 후보는 “현행법만 제대로 적용해도 재벌3세 세습은 불가능하다. 차기 대통령이 먼저 해야 할 일은 법대로 재벌의 뒷배를 봐주지 않겠다는 걸 분명히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기업과 하청기업 간 계약에서 대기업의 ‘납품단가 후려치기’가 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해도 너무한다는 하청기업들의 하소연이 빗발치고 있습니다.

    재벌 3세들은 ‘땅 짚고 헤엄치기’식으로 중소기업과 골목상권을 약탈하고 있습니다. 복합쇼핑몰 입점, 대형마트 진출로 580만 명이 넘는 중소상인은 삶의 현장에서 뿌리째 뽑혀 나가고 있습니다.”이런 현실을 바꾸기 위해 그는 집중투표제와 전자투표제, 다중대표소송제, 감사위원 전원 분리선출, 대주주와 특수관계인 의결권 제한, 노동자 추천 이사 도입을 내걸었다. 또 출자총액제한제 재도입, 지주회사 요건 강화, 순환출자 해소, 징벌적 손해배상제, 공정위의 전속고발권 폐지 등도 주장했다.


    왜 포퓰리즘인가

    최정표 교수는 과거 정부에서 공약했던 재벌개혁이 왜 포퓰리즘에 그쳤는지 이유를 세 가지 들었다. 19대 대선 후보들이 인식해야 할 대목이다.

    “첫째는 정치인과 대통령 등 권력자의 의지부족이다. 솔직히 정치인들은 재벌개혁에 큰 관심이 없었다. 재벌개혁을 하지 않아야 재벌들이 계속 자신들에게 로비할 수 있으니 굳이 실행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선거 때 표를 얻기 위해 공약으로 내세운 것뿐이다.

    둘째는 재벌의 저항이 너무 거셌기 때문. 셋째 국민의 무관심 탓이었다. 재벌개혁이나 경제민주화는 경제 틀이 바뀌어 국민 모두에게 혜택이 가는 거지만 그 기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반면 일자리와 경제 활성화, 복지정책 같은 것은 피부에 금방 다가오니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러니 선거 끝나고 정치인들이 재벌개혁에 대해 침묵해도 그에 맞서 데모조차 하지 않는다. 로드맵을 보여줘야 한다.”

    최 교수는 이스라엘의 사례를 들었다. 2012년 재벌의 독점 횡포가 심하고 물가가 오르자 20만 명의 시민이 거리로 나가 촛불을 들었다. 인구 230만 명의 이스라엘에서 20만 명이면 우리나라로 치면 500만 명이 촛불을 든 셈이다. 결국 의회는 횡포를 막기 위해 재벌 해체 결정을 내렸다.

    문 후보가 지난 1월 발표한 재벌개혁안에 대해 당시 언론들은 표만 의식하고 대안은 부족한 포퓰리즘으로 흐를 가능성을 우려했다. 또 정부가 기업 경영에 지나치게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었다. 연기금 등의 의결권 행사 지침인 스튜어드십 코드의 실효성 높이기 주장이 대표적이다.



    ‘재벌개혁 자체 모순’

    반면 문 후보의 재벌개혁안에 대해 미흡하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민주당 유승희 의원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문재인 후보의 재벌개혁 진정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문 전 대표는 지금과 같은 제왕적 재벌경영체제를 개혁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문 전 대표는 재벌개혁을 말하면서도 법인세 인상과 관련된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는다. 나아가 문 전 대표는 대기업 준조세 폐지를 이야기하며, 16조 원 규모의 대기업 부담을 면제해주려고 한다. 재벌 문제의 핵심은 과도한 영업이익과 사내유보금을 축적한다는 것인데 이를 해결하려는 실질적인 의사가 있는지 의문이다.”

    문 후보의 대기업 준조세 금지법에 대해 이재명 성남시장은 경선과정에서 “대기업 부담금을 폐지하는 특혜”라고 지적했다. 준조세 중 상당수가 법정부담금이고 기부금 등 비자발적 부담금은 비중이 높지 않다는 것이다. 2015년 대기업이 납부한 준조세 규모는 약 16조 원, 이 중 비자발적 기부금 규모는 약 1조3000억 원 정도다.

    하지만 지금의 경제현실을 더 존중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대선후보들의 재벌개혁 공약은 지나치게 이상적이라는 지적도 있다. 김종인 전 민주당 대표는 재벌개혁이란 말 자체에 모순이 있다고 봤다.


    ‘이미 세계 최고 수준 규제’


    “나는 재벌개혁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재벌을 어떻게 개혁하나. 제도를 확립해서 그걸 지키도록 감시하는 것이 중요한 거다. 암탉이 밉다고 목을 비틀면 암탉이 알을 낳지 않아서 먹을 게 없어진다. 그와 마찬가지로 재벌이 밉다고 목을 틀어쥐고 경제활동에 지장을 초래하면 경제는 더 어려워진다. 그러니 재벌기업이 국가가 정한 룰을 제대로 지켜나가도록 감시를 철저히 해야 한다. 그런 룰을 새롭게 설정하자는 거다. 암탉이 앞마당에서 이리저리 쑤시고 다니며 먹이를 다 쪼아 먹어버리면 안되니까 원을 그려서 그 안에서 모이를 먹으라는 거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재벌개혁보다 성장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답답한 것은 대선후보들이 성장에 대해서는 제대로 얘기하지 않는 것이다. 지배구조 문제를 들지만 현실을 다시 봐야 할 측면이 있다. 강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게 강자라는 말이 있다. 이익 내는 기업이면 지배구조가 대체로 좋은 것이다. 지배구조에 관한 한 모범은 따로 없다. 물론 IMF 체제 이전에는 한국 재벌기업의 전횡도 있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현재 논의되는 지배구조 문제는 마치 성형미인을 만드는 것과 같다. 집중투표제, 감사 분리 선임, 지배주주 의결권 제한 등을 도입하면 경영진은 마치 밤에 문을 열어두고 자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여긴다. 경영진이 경영권 방어에 급급하다 보면 경영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정부는 기업에 자율권을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정부가 너무 세세한 규율을 정해서 시장을 간섭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신석훈 한국경제연구원 기업연구실장도 대선후보들의 재벌개혁안이 강경일변도라고 주장했다. “기업 정책은 소유 지배구조, 행위 통제, 제재 등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돼 있다. 한쪽 규제가 강하면 다른 영역에선 풀어주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현실성이 있다. 공정위 권한을 강화하는 것은 좋으나 거기에 징벌적 제재까지 강화한다는 건 지나친 규제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업에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2013년부터 시작된 일감 몰아주기 제재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강한 기업 규제다. 이미 강한 규제들이 있음에도 더 강하게 몰아붙이는 것은 문제가 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3월 말 ‘19대 대선후보께 드리는 경제계 제언문’을 통해 “현행 기업지배구조 관련 제도는 이미 선진국 수준이거나 그 이상이다.

    ‘제도’ 부분에서는 더 나은 해법을 찾기 힘들며, 이제는 공정하고 일관된 집행에 힘을 쏟아야 한다”고 했다. 또 “새정부 신드롬으로 5년마다 정책방향이 바뀌어 중장기개혁들이 매몰될 수 있다. 정부 주도형 성장공식인 ‘대한민국 주식회사’를 과감히 포기하고 민간 주도의 파괴적 혁신을 유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선을 앞두고 후보들과 국민의 기대는 커졌지만 경제 현실은 순탄하지 않다. 이 괴리를 좁히는 것에 대해 대선후보들이 집중적으로 고민해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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